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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배치에는 배제의 흔적이 있다

<헤테로토피아>, 미셸 푸코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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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다 읽었다. <말과 사물> 이후 푸코의 1차 저작을 읽은 것은 2년 만이다. 아주 재밌었고, 푸코의 날카로움을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었다. 공원이나 도서관처럼 늘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공간을 보며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해내는구나, 싶어서 무릎을 쳤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의 철학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공간이 왜 실은 이질적인 공간인지, 우리의 일상적 공간들이 실은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 폭로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은 <말과 사물>,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 같은 푸코의 주저들의 사이드킥 같은 책이어서, 푸코를 조금 읽은 사람에게 더 재밌게 읽힐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를 전혀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이 책의 해설 같은 글을 쓸 것이다.




래비나우: 역사적 참조와 언어 놀이는 분명 근대의 에피스테메(epistēmē)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공간, 지식, 권력> p83


<헤테로토피아> 뒷부분에는 부록처럼 인류학자 폴 래비나우와 푸코가 나눈 공간과 건축에 대한 대담집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쓱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에피스테메(epistēmē), 푸코 철학의 전반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다. <헤테로토피아> 역시 이 개념을 알고 읽느냐 모르고 읽느냐에 따라 읽히는 내용이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 개념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지나가야 한다.


고양이와 호랑이, 강아지는 어느 쪽이 서로 가까운가?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호랑이와 고양이가 가깝다. 린네의 생물 분류학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둘 다 고양잇과다. (종속과목강문계, 우리는 이 구분을 중학교에서 배운다) 커다란 종이 상자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한두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아 맞네, 역시 호랑이는 고양잇과 맞네, 하고 맞장구도 쳤을 거다.


이 맞장구를 친다는 것이 포인트다. 사실 우리는 마음속으로는 이 분류가 거북하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둘 다 친숙한 대표 반려동물이다. 인터넷에 가장 많은 짤방은 아마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호랑이는 우리에게서 멀다. 호랑이는 우리 주변엔 없고, 동물원에 가서야 볼 수 있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그래서 종속과목강문계를 배워 알고는 있지만 그 분류가 썩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분류는 어떤가? 18세기 청나라에서는 동물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사람이 키우는 동물, 전설상의 동물, 광폭한 동물,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 등. 재밌지 않은가? 청나라 분류법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같은 범주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는 광폭한 동물이고 고양이는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 장면에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중요한 질문을 떠올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린네가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은 것도 같은 18세기다. 같은 시대, 서로 다른 공간에 이렇게 큰 생각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러한 차이가 단지 다른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혹시 차이는 시대를 넘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푸코는 16세기부터 그가 살던 시대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문서들을 분석하고 나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epistēmē)라고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적절한 번역어가 발견되지 않아 다른 번역가들도 그냥 에피스테메로 표시한다)




에피스테메에 대한 글만 써도 한 바닥 글이 더 필요할 것이지만, 이 글은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글이므로 설명은 여기에서 줄이도록 하겠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이 필요한 분들이 있을까 하여 에피스테메에 대한 글을 아래에 링크해 놓겠다) 여기에서는 일단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가 있고, 그 체계를 에피스테메라고 부른다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넘어가자.


이 에피스테메가 죄에 대해 어떻게 작용했는지 연구한 책이 <감시와 처벌>이고, 광기에 대해 어떻게 작용했는지 연구한 책이 <광기의 역사>이며, 말과 사물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한 책이 푸코의 주저 <말과 사물>이다. <헤테로토피아>는 납작하게 설명하면 에피스테메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적 공간에 대해 작용해왔는가에 대한 푸코의 철학적 단상을 담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푸코의 철학들 사이에 <헤테로토피아>가 자리 잡은 위치가 대충 어디쯤 되는지는 짐작될 것이다. 이제 <헤테로토피아>의 공간들에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자.




헤테로토피아는 '다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그리스어 헤테로(heteros)와 '장소'라는 뜻을 가진 토피아(topia)의 합성어이다. 그대로 번역하면 '다른 장소(other spaces)'라는 뜻이 된다. 푸코는 도서관이나 박물관, 묘지와 병원, 목욕탕과 공원 등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러한 일상적 공간들을 가리켜 헤테로토피아, 즉 다른 장소라고 말한다. 즉 푸코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다른 장소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다른 장소, 헤테로토피아를 경험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IMG_1875.jpeg 공원은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가까운 자연이다. 집 근처 양재 시민의 숲에서 직찍.


많은 현대인들은 도시에 산다. 집과 회사를 오가며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 공원에 간다. 잠시나마 자연 곁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공원은 기묘한 공간이다. 공원에는 나무도 있고 잔디도 있고 꽃도 있다. 작은 연못도 있고 때로 졸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 자연이 있는가?


공원에 있는 나무는, 꽃은, 잔디는 실은 인간이 조성한 것이다. 연못과 개울을 만들고 유지하고 보수하는 이들도 모두 인간이다. 잘 생각해 보면 공원은 자연의 재현(representation)이다. 공원은 자연의 다른 공간(heterotopia)인 것이다. 공원은 자연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나무와 꽃과 잔디와 연못을 자연을 흉내 내어 배치해 둔 곳이지만, 실은 자연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지만 조금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헤테로토피아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책에는 없지만)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인기 리얼리티 예능인데,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 ENA


<나는 솔로>의 참여자들은 솔로나라라는 (대개는 펜션 형식의) 장소에 입소해 5박 6일 동안 자신의 짝을 탐색하고 찾는다. 마음이 맞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하며 마지막 날에는 최종 선택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서로를 선택한 참여자들은 최종 커플이 되어 솔로나라를 떠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솔로나라라는 장소에는 '현실적인 연애'가 배제되어 있다. 현실에서는 이뤄지기 힘든 거리(서울과 부산이라던지)에 있는 이들이 한 장소에서 서로를 연애 상대로 고려를 해보고, 현실에서는 고려 대상 조차 될 수 없는 독특한 상대들(프로레슬링 선수라던지, 호주 국적 외국인이라던지...)을 만난다. 무엇보다 그 공간은 생업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5박 6일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다.


즉 솔로나라는 일종의 헤테로토피아다. 나는 솔로나라에서 최종 커플이 된 이들이 현실 커플로 잘 이어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간은 연애를 표방하지만 실은 그 연애는 재현(representation)이다. 솔로나라의 공간은 현실의 연애를 배제한 공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솔로나라야 말로 상징계의 금지들을 제거하고 실재계의 사랑을 직접 탐닉할 수 있는 주이상스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라캉의 관점 또한 가능하고 나는 이 관점을 더 좋아하지만, 이 글의 범위 밖이므로 이 부분은 언젠가 다른 글로 써 보겠다)




헤테로토피아는 심지어 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 서양에는 오래전부터 신혼여행이 있었다. 여성이 처녀성을 상실하는 것은 그녀가 태어난 집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게 신혼여행이 존재한 이유다. 여성의 부모는 여성이 처녀성을 상실하는 곳이 익명의 장소이길 바랐다. 하지만 '신혼여행지'라는 장소가 지도상 좌표를 가지는 공간은 아니다. 모두에게 신혼여행지는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혼여행은 호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차와 비행기, 해변, 식당 등 신혼여행의 모든 동선이 신혼여행지다. 이렇게 공간이 아닌 것도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다.


묘지도 대표적인 헤테로토피아이다. 묘지는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자들을 분리한다. 서양에서 묘지는 도시 중심의 교회 바로 옆에 있었다. 이 한 바닥 글에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사람들은 닮은 것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에피스테메)이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은 하나님께 가야 하므로 묘지는 하나님 가까이에 있는 교회 곁에 있었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시대가 오자 묘지는 도심에서 도시 외곽으로 이전되었다. 사회는 죽음을 종교적인 것에서 의학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죽음을 시야에서 밀어내고 싶어 하게 되었다. 묘지는 우리 모두 언젠가 갈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타자(他者)에게 속한 것으로 하여 우리의 공간으로부터 배제하는 헤테로토피아다.


감옥과 정신병원 또한 말할 것도 없는 헤테로토피아다.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가 얘기하듯 감옥과 정신병원은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이들을 격리 수용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편,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옥과 정신병원은 사회로부터 비정상을 배제하는 헤테로토피아다.




이 밖에도 푸코가 이 책에서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드는 것들은 정말 많다. 회원제 클럽, 남/녀 목욕탕, 수유실 등 여성 전용 공간 등은 모두 포섭과 배제가 작동하는 헤테로토피아이고, 도서관과 박물관은 선별된 것들만 배치하고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는 헤테로토피아이며, 배(ship)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현대인의 존재 방식을 닮은 헤테로토피아이다.


하지만 이미 글이 길어져서, 나는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고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배제'에 대한 것이다.


학생 시절 혹시 교실 밖으로 내쫓긴 경험이 있는가? 그렇게 듣기 싫었던 재미없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기쁨으로 작용했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수업을 들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분은 왜 들게 된 것일까?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단순한 공간의 관찰이 아니다. 공원을, 솔로나라를, 신혼여행지를, 묘지와 박물관과 도서관을 그저 관찰해 보라는 것이 아니다. 푸코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푸코는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 순응, 규범의 이면을 의심해 보라고 하는 것이다. 누가 왜, 어떤 이유로 이 공간을 이렇게 배치했는가? 이렇게 질문해 보라고 하는 것이다.


학교는 언뜻 보기에 학생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푸코가 보기에는 아니다. 책상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선생님과 칠판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수업 시작종과 종료 종이 울리는 것은 학생들을, 혹은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은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기 위해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배운 것은, 사회엔 절대복종해야 하는 권위(선생님)가 있고, 거부할 수 없는 규칙(교칙)이 있으며, 세상(사회)은 내가 배우는 것이지 바꾸는 것이 아니고, 지배계급(선생님, 출제자)이 아니라 피지배계급(우리, 학생들)끼리 경쟁해야 하며, 그 경쟁 결과(성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피지배에 익숙해지기 위해 학교 교육을 받는다. 우리는 뭔가 숭고한 것을 배우기 위해, 국어 영어 수학 수업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거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업에서 '배제'되는 것은 처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급생들의 공간에 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가 훌륭한 피지배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학교는 대표적인 헤테로토피아다. 학교는 누군가 규율권력에 맞서 싸울 가능성을, 혁명가의 탄생 가능성을, (혹은 교육의 내용 그 자체를) 배제하기 위해 학생들과 선생들과 교실과 책상과 의자를 배치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공원이 자연을 배제한 것처럼, 묘지가 죽음을 배제한 것처럼, 감옥과 정신병원이 비정상을 배제한 것처럼, 모든 배치에는 이렇게 배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 예도 선생님은 '철학자 열 사람을 모아 놓아도 푸코 한 사람만큼 놀랍지 않다'라고 하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푸코의 철학을 '폭로의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푸코의 말은 내겐 늘 폭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늘 나를 가슴 철렁하게, 깜짝 놀라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트레바리 클럽 [바깥의 사유] 주제책으로 선정되어서 함께 읽어 보았다. [바깥의 사유]는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클럽 [보탬]의 주요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한 독서 모임이다. 모임에 참여하지는 못하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책을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좋은 책을 찾아 준 [바깥] 파트너들에게 감사 인사 드린다.


[바깥] 멤버분들은 모임 날 모여서 즐거운 이야기 나누어 보시기를.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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