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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21. 2024

미셸 푸코 (2) 말과 사물 (1)

나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가까웠으면 좋겠다

<광기의 역사>에 이은 푸코의 두 번째 책은 <말과 사물>이다. 이 책에 대해 쓰려니 감개무량함이 느껴진다. 작년에 한 석 달 정도, 이 책에 정말 푹 빠져 살았다. 게임을 출시하고 스스로에게 주었던 휴가, 남국의 풀빌라 거실에 앉아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너무나 놀라운 내용으로 가득해서 이 책 한 권에서만 170여 개의 꼭지들을 필사하고 나 나름대로의 주석을 달았다. 내가 쓰고 모은 주석이 원고지 1천 장 분량, 그러니까 책 한 권 분량이 나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고개를 드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먼 철학의 지평이 보였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왜 나는 몰랐을까? 아니, 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푸코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왜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엄청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모르고 사는가? 


이 당연하지만 엄청난 이야기를 한 줄로 줄이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지금은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편에 걸쳐 푸코를 따라오고 나면, 당신에게도 그날 내게 새롭게 열렸던 지평이 열리게 될 것이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천천히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이야기는 이번에도 여전히 다소 엉뚱한 지점에서 시작한다. 




고양이는 왼쪽의 호랑이와 가까운가, 오른쪽의 강아지와 가까운가? 


고양이와 호랑이, 개는 어느 쪽이 서로 가까운가?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호랑이와 고양이가 가깝다. 린네의 생물 분류학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둘 다 고양이과다. (종속과목강문계, 우리는 이 구분을 중학교에서 배운다) 모두들 커다란 종이 상자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한두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아 맞네, 역시 호랑이는 고양이과 맞네, 하고 맞장구도 쳤을 거다. 


이 맞장구를 친다는 것이 포인트다. 사실 우리는 마음속으로는 이 분류가 거북하다. 고양이와 개는 둘 다 친숙한 대표 반려동물이다. 인터넷에 가장 많은 짤방은 아마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호랑이는 우리에게서 멀다. 호랑이는 우리 주변엔 없고, 동물원에 가서야 볼 수 있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그래서 종속과목강문계를 배워 알고는 있지만 그 분류가 썩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분류는 어떤가? 18세기 청나라에서는 동물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사람이 키우는 동물, 전설상의 동물, 광폭한 동물,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 등. 재밌지 않은가? 청나라 분류법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같은 범주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는 광폭한 동물이고 고양이는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 장면에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중요한 질문을 떠올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린네가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은 것도 같은 18세기다. 같은 시대, 서로 다른 공간에 이렇게 큰 생각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러한 차이가 단지 다른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혹시 차이는 시대를 넘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푸코는 16세기부터 그가 살던 시대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문서들을 분석하고 나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epistēmē)라고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적절한 번역어가 발견되지 않아 다른 번역가들도 그냥 에피스테메로 표기한다)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라니, 말이 약간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호두가 뇌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실제로 호두에는 불포화지방산과 DHA가 많아 두뇌 발달에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호두가 뇌에 좋다는 것을 16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불포화지방산과 DHA는커녕 근대 화학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시대인데?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8세기 사람이다) 


푸코에 의하면 16세기 사람들은 무의식 중에 ‘닮은 것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호두는 뇌를 닮았다. 호두의 껍질은 인간의 단단한 두개골을 닮았고, 그것을 깨뜨리면 그 안에 뇌와 유사한 모습을 가진 호두가 나타난다. 무의식 중에 ‘닮은 것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한 16세기 사람들은 그래서 호두가 뇌에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호두와 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다) 


16세기 사람들은 질병이 돌거나 가뭄으로 농작물들이 말라죽으면 왕의 탓을 했다. 왕이 신심을 잃어서, 왕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왕이 사악한 마법사를 가까이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왕과 자연이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가졌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공유된 속성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왕과 자연을 동일시하게 했다. 


그런데 17세기가 되자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 후 도래한 이성의 시대에 지식은 보다 엄밀함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지식은 단지 ‘닮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닮은 것은 동일함(완전히 같은 것)과 차이로 나누어진다. 린네의 종속과목강문계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호랑이와 고양이는 고양이과(Felidae)까지만 일치한다. 속으로 세부 분류하면 고양이는 고양이속(Felis), 호랑이는 호랑이속(Panthera)으로 분화한다. 이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분류학은 생물의 특징 중 동일한 것과 차이를 관찰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 출처 미상.


이제 17세기 사람들은 16세기 사람들과 달리 ‘닮은 것’에서 지식을 발견하지 않게 되었다. 16세기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체계에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에피스테메의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돈키호테가 늙은 말을 타고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악한 거인아 정의의 창을 받아라!”라고 외치면서. (실은 우리는 <돈키호테>를 본 적이 없다. <돈키호테>의 원작은 2천 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벽돌책이다) 아마 어린 시절에 이 장면을 보며 다들 의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게 정말 웃긴가? 이게 그 시절의 유머 감성일까?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 시대 최고의 코미디 소설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는 길을 지나다 포복절도하는 젊은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친구는 이성을 상실했거나 아니면 <돈키호테>를 읽는 모양이군."


읽다가 포복절도할 정도로 웃겼던 그 시대 최고의 코미디 소설은 왜 더 이상 우리에겐 웃기지 않는가?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 위키미디어 제공


푸코의 설명은 이러하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격한 이유는 풍차가 거대하다는 점, 움직인다는 점이 거인과 닮았기 때문이다. 즉 16세기의 ‘닮음의 에피스테메’를 돈키호테는 가지고 있다. 돈키호테에게 풍차는 곧 거인이다. 그런데 <돈키호테>가 출간된 것은 17세기 초이다. 위에서 설명했듯 17세기는 닮음의 에피스테메가 소멸하고 새로운 에피스테메인 동일함과 차이가 등장한 시대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가 그래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함과 차이의 에피스테메조차 현대에는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에겐 17세기 사람에게만큼 <돈키호테>가 웃기지 않은 것이다. 


어떤가. 그럴 듯 한가? 푸코의 설명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에피스테메의 틀로 사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17세기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보며 웃었지만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시대엔 푸코가 없었고, 그들이 어떤 에피스테메를 기준으로 사고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맨 위에서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이번 두 개의 포스팅을 읽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우리는 에피스테메는 거대한 인식의 틀이고, 우리는 그 틀을 벗어나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틀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적어도 미셸 푸코 이전의 인류 그 누구에게도 에피스테메는 보이지 않았다. 16세기의 사람들은 '닮음'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았고, 17세기의 사람들은 '동일함과 차이'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보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 그 틀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푸코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를 아우르는 에피스테메는 없을까? 우리가 16세기의 '닮음'을 비웃듯, 그리고 17세기의 '동일함과 차이'를 비웃듯, 우리 다음 시대의 사람들이 우리 시대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그 무엇, 우리의 다음 시대에는 사라져 웃음거리가 되는 무엇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푸코는 그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푸코가 지목한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너무나 긴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음 연재일에 올라갈 2편에서 계속하기로 한다. 


아쉬운 분들은 에피스테메가 광기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한번 살펴보심은 어떨지. 에피스테메의 변화에 따라 광인은 우리와 함께 살기도, 떨어져나와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https://brunch.co.kr/@iyooha/96




https://brunch.co.kr/@iyooha/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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