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표준체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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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시대별로 그 시대 사람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인식의 틀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틀의 이름은 에피스테메이며, 그 틀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틀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현대의 에피스테메는 '인간'이며, 그래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할 것이다. 무엇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 나는 먹는 얘기를 하기로 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먹었나? 요즘 체중이 좀 는 것 같아 저녁밥을 반공기만 먹었는데, 딱 세 개만 먹기로 한 감자칩을 TV 앞에서 한통 다 먹어치우진 않았는가? 그리고 감자칩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오밤중에 스쿼트 두 세트를 하지는 않았나?
당신이 당신의 몸과 건강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이 글은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늘 당신의 건강, 체중, 건강 관련 여러 수치들에 관심이 있다면 이 글은 좀 길지만 정말 재미있을 것이다. 이 글의 부제는 '당신은 표준체중인가'이다. 자, 이제 시작해 보자.
내 어린 시절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어린아이가, “아빠랑 먹는 돼지 불고기가 제일 맛있어요!”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TV 공익 광고가 있었다.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영양도 많고 맛도 있으니 돼지고기를 먹자는 캠페인이었다. (당시엔 삼겹살이 별로 인기가 없었는지) 소고기로 편중된 국민들의 식습관을 다양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광고였다. 아마 80년대 초였을 거라고 기억한다. 그 시대 건강식의 키워드는 ‘골고루’였다.
그래서 ‘골고루’ 먹는 것보다, 고기와 기름기를 식단에서 제거하고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는 것이 훨씬 건강한 식사라고 주장하는 이상구 박사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이상구 박사는 의사였고, 본인이 가진 과학적 세계관과 통계 자료를 이용해 어째서 고기와 기름기가 몸에 좋지 않은지, 왜 채소가 과학적으로 건강에 좋은지 설명했다. 이상구 박사의 강의는 아주 유명해져서, 그의 강의가 TV에 나온 다음 날엔 슈퍼마켓에는 채소가 동이 나고 고기 값이 폭락했다. 이렇게 ‘골고루’의 시대는 저물고 채소의 시대가 왔다.
2000년대에는 웰빙 열풍이 불었다. 웰빙은 처음엔 일만 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자, 뭐 이런 느낌이었는데 점차 변질되더니 식품 건강 쪽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시대에 유행했던 것은 호밀, 통밀, 녹차 같은 것들이었는데, 패스트푸드 업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호밀빵 버거, 통밀 샌드위치 따위들을 출시했다. 아마도 패스트푸드는 몸에 좋지 않다, 같은 선입관과 싸워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2010년대에 와서는 식품영양학계에서는 대반란이 일어났는데, 아시다시피 그 주인공은 저탄고지이다.
저탄고지 다이어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짧게만 설명해 보겠다. 저탄고지는 탄수화물을 제한하고 지방 섭취를 늘리는 식이요법으로, 원래는 당뇨 치료를 위해 도입된 식단이었다. 그런데 이 식이요법에 체중감량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임상적으로 발견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저탄고지 식단을 시도했다. 사람에 따라 정도차이는 있지만 대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본,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식단이다 (나 자산도 저탄고지로 13kg 정도를 감량했고, 3년째 같은 방식으로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지방의 역설>의 저자 니나 타이슐스는 “저탄고지는 아직 소수의견에 불과하지만, 먼 미래에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했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저탄고지가 세상에 등장한 지 10년도 되지 않아 우리는 ‘고지’가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탄’이 과학이 된 2020년대를 살고 있다. 현대 건강의 적은 단순당과 탄수화물이다. 요즘엔 마트에 갈 때마다 새로 출시된 제로 음료를 만난다. 이제 의사들은 TV에 나와 40대 이상이 되면 혈당 관리를 위해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근육 유지를 위해 매일 붉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권한다. 나는 최근에 아주 극단적이지만 ‘건강을 위해 채소를 끊어야 한다’는 연구 결과도 본 적이 있다.
자, 어떤가? 아마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다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건강과 관련된 이러한 중요한 정보가 10년 단위로 바뀌고, 심지어 완전히 뒤집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같이 이러한 주장들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다. 채소를 권하는 이상구 박사는 의학자였고, 저탄고지의 효과도 과학적 통계로 제공되며, 최근엔 국제 건강기구인 WHO가 제로음료의 주 재료인 아스파탐을 발암물질로 지정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뉴턴 역학의 공식은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수정된 적이 없다. 적어도 과학이라면 10년에 한 번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이렇게 입장을 바꾸는 것을 과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고, 명확하고 고급스러운 워딩으로 ‘당신의 건강을 위해 과학의 조언을 들으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이런 것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가? 적어도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었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단언한다. 이런 것들은 과학이 아니라고.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어렵다고 말이다. 식품영양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식품영양학도들이 발끈할 것 같은 발언인데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 푸코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우리는 과학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매일 손에 드는 스마트폰은 양자역학의 옳음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일반인에게도 열린 우주관광의 시대는 뉴턴 역학의 건재함을 확인시켜 준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데 필요한 통신 위성들은 모두 상대성이론이 적용된 시계를 탑재하고 있는데, 이는 지상의 시간과 인공위성의 시간이 진짜로 다르게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늘 느끼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과학은 당연하다.
하지만 인류에게 과학이 당연해진 것은 실은 오래되지 않았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처음 등장하는 뉴턴의 책 제목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이다. 뉴턴이 살던 시대의 과학은 철학과 구분되지 않았다. 연금술이 유행이던 시기에, 과학은 점성술이나 흑마술 같은 학문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거쳐 17-18세기 과학이 등장하고,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를 증명해 낸 후 사람들은 과학을 과학이 아닌 것과 구분해 내기 시작했다.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을 구분했다. 그런데 과학적 지식과 비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과학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과학은 어떻게 스스로 지식을 쌓아 올려 지금까지 왔을까?
물은 언제나 100도에서 끓는다. 오늘 100도에서 끓은 물은 아마 내일도 100도에 끓을 것이다. 내가 끓여도, 당신이 끓여도 같은 온도에서 끓을 것이고, 서울에서 끓여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끓여도 역시 같은 온도에서 끓을 것이다. (디테일은 그렇지 않지만, 일단 여기서는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자) 그래서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사실은 과학이 되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물이 100도에서 끓는 것은 정말 과학인가? 온도가 먼저 있었고, 물은 우연히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은 것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물이 어는 온도를 0도로, 끓는 온도를 100도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 ‘0도’와 ‘100도’는 그저 그 온도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온도체계란 자연의 상태에 붙여놓은 이름의 뭉치일 뿐이다. (푸코는 이러한 과학을 가리켜 ‘스스로 명명한 이름에 갇힌 자폐적 과학’이라며 비웃는다)
마찬가지다. 과학이 막 탄생했을 무렵, 과학은 관찰 후 재현되는 것을 지식으로 쌓았다. 그래서 분류학이 등장한다. 속씨식물 중 떡잎이 두 장이 나는 것은 쌍떡잎식물로, 한 장 나는 것은 외떡잎식물로 분류되었다. 네발짐승 중 앞발을 잘 쓰는 동물은 고양이과로, 잘 못쓰는 동물은 개과로 분류되었다. 그저 이름일 뿐인 ‘외떡잎식물’, ‘쌍떡잎식물’, 그리고 ‘고양이과’와 ‘개과’는 그 시대에 ‘0도’, ‘100도’와 마찬가지로 과학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고도화되는데, 18세기에 와서 학자들은 외형이 아니라 기능에 따라 재현들을 분류하기 시작한다. 어류에게는 아가미가 있고 인간에게는 폐가 있는데, 이 두 개의 기관은 외형은 전혀 다르지만 기능이 같다. 이제 ‘호흡기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지식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호흡기관'은 과학인가? 폐와 아가미를 호흡기관으로 분류한 것은 적어도 단순히 외형만을 관찰한 후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을 구분한 것보다는 뭔가 진보한 것 같지만, '호흡기관' 자체는 결국 외부의 산소를 조직 내부로 옮기고, 내부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행위에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여전히 이 과학은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근대에 오면 비로소 지식들에게 ‘왜?’라고 묻는 과학이 탄생한다. 동물에게 호흡기관은 왜 있는가? 왜 순환기관이 있는가? 왜 개과는 집단생활을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생명에 대한 질문으로 발전했다. 왜 세상의 부(富)는 증가하는가? 하는 질문은 경제에 대한 질문으로 발전했다. 언어란 무엇이고, 언어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러한 질문은 언어학과 문헌학으로 발전했다. 이제 지식은 재현의 기원을 문제 삼기 시작한다. (<말과 사물> 본문에서 푸코는 압도적인 양의 사료를 자신의 주장 위에 세우는데, 이런 디테일을 모두 이 글 한 바닥에서 옮기긴 어렵다. 이 부분을 납득하고 싶은 분은 본문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 ‘인간’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말하고 일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이제 막 탄생한 과학이 더할 나위 없이 관심을 가질만한 절대적 소재다. 이제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수많은 ‘인간과학’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왜 저자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가? 하는 질문은 정신의학과 광인, 정신병원을 탄생시켰고, 왜 저자는 죄를 짓는가? 하는 질문은 범죄심리학과 현대 감옥을 만들어 냈다. 왜 일하는 노동자는 고통을 받는가? 하는 질문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혁명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은 정치학과 사회학이 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위에서 의아해했던 식품영약학도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이 음식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식품영약학의 시작은 이런 질문이 아니었을까?
푸코는 이러한 학문들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인간과학들이 ‘과학’의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위에서 얘기했던 먹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대체 우리는 지방(fat)이 왜 몸에 나쁘다고 생각하며 살게 되었는가? <지방의 역설>은 지방의 역사를 계보학적으로 살펴보는 책인데, 이 책은 지방 마녀사냥의 시작은 1952년 발표된 앤셀 키스 박사의 논문 <식단-심장 가설(diet-heart hypothesis)>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키스는 당시에 식단과 질병과의 관계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였다. 키스는 미네소타 병원의 남성 정신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실험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66명의 환자들에게 지방 비율을 각각 9~24%로 다르게 만든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실험은 2~9주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는 이를 토대로 키스는 저지방 식단이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약간 더 낮춘다는 실험 결과를 확보했다.
사실 당시에 키스 자신도 이 실험 결과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스는 이 불확실한 결과를 마치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 밀어붙였다. 이 논문에서 키스는 높은 어조로 “지방 섭취와 심장질환 사이에는 분명히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식품영약학 분야의 권위자인 키스의 주장에 감히 맞서는 연구자는 없었다. 그래서 주장은 오늘날까지 지방에 대한 거대한 불신의 씨앗이 되었다. 심장 질환뿐만이 아니라 비만, 암, 당뇨 등 모든 질병이 지방 섭취 탓이라는 연구 결과가 수십 년 동안 쏟아져 나왔다. (<지방의 역설>에서 작가 니나 타이슐스는 지방과 붉은 고기가 지금까지 모함을 받은 것은 식품 영양학 주류 연구자자 그룹이 앤셀 키스를 지지했을 뿐만이 아니라, fat이라는 영어 단어가 두 가지 뜻(지방, 뚱뚱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키스의 연구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푸코가 직접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푸코는 저탄고지 다이어트가 등장하기 전에 죽었다) 푸코라면 키스가 심장질환과 지방사이의 관계를 마치 과학인 것처럼 엮어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키스는 당시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도 따지지 않고 단지 66명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방에 대해 과학적 진단을 내렸다. 푸코는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할 것이다.
키스의 연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현대의 연구자들은 콜레스테롤의 종류도 여러 가지이고, 그중 심장질환과의 관계가 있는 콜레스테롤은 따로 있으며, 심장질환의 원인이 콜레스테롤 한 가지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키스가 해낸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엄밀히 말한다면, 키스가 해 낸 것은 지방이 9~24%로 분포된 다른 식단을 먹은 66명의 환자들 중 몇몇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약간 낮춰진다는 것이 ‘재현’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자, 짜잔. ‘재현’이 다시 등장했다. 재현에 대한 얘기를 우리는 언제 했는가? 그렇다. 17-18세기의 과학은 바로 재현이었다. 물이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이 재현되는 ‘이름을 붙이는 과학’인 것이다. 인간과학이 ‘과학’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얼마 전까지 고작 재현될 뿐인 ‘이름’을 지식이라고 착각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키스는 훌륭한 학자였고, 아마 본인의 재현이 과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현을 과학으로 착각한 키스의 논문은 80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오늘 점심에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고,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대신 파스타를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과학은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형식과학이나 생물학이나 언어학 같은 경험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일까?
푸코는 인간이라는 대상이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과학은 통시적이어야 한다. 빛의 속도는 3.0 ×10^8m/s이다. 내년 혹은 100년쯤 후에 이 속도가 변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고정적이지 않다. 인간에 대한 관점은 계속해서 바뀐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길지만, 예를 들어 우리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은 16세기엔 존재하지 않았다. 존엄은 신이나 천사, 종교인, 혹은 왕이나 귀족 등 존엄할 이유가 있는 대상과 계급에 주어졌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었고, 그 시대의 인간은 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고, 신에게 구원을 갈구해야 하는 작은 존재였다. 예컨대 동성애는 과거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전기자극치료가 그 병의 과학적 치료 요법으로 인정받았다.
인간에 대한 관점뿐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도 바뀐다. 역시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자세히 얘기하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애국심은 최근에 발명된 개념이다. 현대인이라면 정도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애국심은 수백 년 전에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동양에는 군주에 대한 충성만 있었고, 서양의 군신은 심지어 계약관계였다)
이러한 고정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과학, 그러니까 인간과학은 ‘그 시대’에 한해서만 과학적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면 공시적(共時的)이긴 하지만 통시적(通時的)이지는 않다. 과학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통시성(시간을 초월해 가져야 하는 보편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학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다시 먹는 얘기를 해보자. 80년대 신바람 건강식을 만들었던 이상구 박사와 지방을 심장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 앤셀 키스 박사, 그리고 저탄고지를 연구하는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인간을 위해 자신의 시대에 과학이라고 믿었던 것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는 달랐다. 연구 방식이나 태도의 차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연구자라면 자신의 자리에서 누구나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문제는 ‘인간’이다. 고정될 수 없는 인간은 시대마다 달라졌고, 그 결과 연구의 태도는 같았음에도 인간과학의 결론은 시대마다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중요한 질문을 만나게 된다.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많은 학문들이 인간을 연구하고, 자신의 연구 결과에 과학의 프레임을 씌우려 하는 것일까? 대체 인간이 무엇이길래 시대마다 변하며 시간 속에 고정할 수 없는 것일까?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은 적이 있는가? 당신의 체형은 표준인가, 과체중인가? 당신의 콜레스테롤 수치나 혈압은 정상에 비해 어떠한가?
체중뿐만이 아니다. ADHD검사 결과 점수가 몇 점 이상이면 당신은 정상이 아닌 과잉행동장애이고, 웩슬러 검사 결과가 80점 미만이라면 정상이 아닌 경계성 지능이며, 햄버거를 점심시간마다 먹으면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을 확률이 정상인에 비해 11% 증가한다.
정상인에 비해 말이다. 정상인에 비해. 그런데 대체 정상이란 무엇일까? 현대 인간과학에 의하면 질량지수(BMI)를 측정했을 때 18.5~25 사이의 결과가 ‘재현’되는 사람, ADHD 결과 과잉행동장애를 가지지 않은 결과가 ‘재현’되는 사람, 웩슬러 검사 결과 80점 이상의 지능을 가졌음이 ‘재현’되는 사람일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짐작이 가는가?
그렇다. 위에서 보아왔듯 이것들은 전혀 과학이 아니다. 우리는 재현이 과학이 아니라 단지 ‘이름을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위에서 보았다. 물이 끓는 온도는 100도다. BMI가 18.5~25인 사람은 표준체형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그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과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끊임없는 탐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간은 실은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는 고작 이름일 뿐인 것들에 의해 재단되고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과체중으로, 과잉행동장애로, 경계성 지능으로.
오늘 점심으로 샐러드를 싸왔는데, 동료가 맛있는 낙지 비빔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만약 갈등을 느낀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지난 검진 때 받은 성적표에 혈압이 경계선으로 나왔기 때문이라면 당신의 식단의 주인은 당신인가, 인간 과학인가?
현대의 인간은 간단한 먹는 것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래서 햄버거 하나를 먹어도 죄책감을 느낀다. 인간과학의 일종인 식품영양학의 지식을 받아들인 나의 슈퍼에고는 ‘그건 칼로리가 높아’ 이렇게 말한다. ‘정상 체중이 되어야 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미 인간과학으로 재단되고, 인간과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저 이름일 뿐인 인간을 연구하는, 그저 재현에 불과한 과학 말이다.
인간이 그저 이름일 뿐이라는 것은 이 짧은 문서에서 내가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글이 이미 너무 길어져서 설명은 여기에서 줄이려고 한다. 더 깊은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말과 사물>을 직접 읽어 보시는 것이 좋겠다.
푸코가 인간과학의 허망함을 고발했지만 그 이후에도 인간과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푸코가 비판한 수많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아직도 대학에서 학문으로 연구되고 있다. 인류학은 생물학의 하위분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 같은 책을 쓴다. 생각해 보라. 세상에 인간과 인간들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과학들이 존재하는 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이름과 껍데기로 남아 세상을 떠돌 것이다.
또한 정말로 인간과학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도 푸코가 지적한 비극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을 규정하기 위해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들이 사라진다면, 그때는 정말 인간과학의 ‘대상’에 불과한 '인간'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학이 탄생한 순간 인간은, 인간과학의 존립과 관련 없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정말 비극적인 책이 된다.
‘참으로 비극적인 책이다’, 푸코의 스승인 이폴리트는 이 책, <말과 사물>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푸코가 오지 않기를 바랐던 세상은, 내 생각엔, 니체가 오지 않기를 바랐던 허무주의의 세상과 많이 닮았다. 푸코는 이 책에서 담담하게, 니체가 그렇게 오지 않기를 바랐던 마지막 인간들의 세상, 지독한 허무주의의 역사가 우리에게 도래했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셸 푸코에 대한 꼭지가 끝났다. 그리고 이 브런치북의 연재도 이번 편이 마지막이다. 다음 글은 이 브런치북에 대한 작가의 에필로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 글을 쓰는 일이 이렇게 재밌는 일이라는 걸 <하얀 로냐프강>을 탈고하고 수십 년 만에 다시 깨달았다. 언젠가 다시 다른 주제로 돌아올 수 있기를. 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