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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28. 2024

[에필로그]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학문

새로 생긴 집 앞 포차에서

매일 기다리는, 매일 저녁 마나님과의 술자리



나: 예전에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학문은 컴퓨터공학이라고 한 적 있잖아. 


마나님: 오빠가 그랬었지. 


나: 이제 컴퓨터공학은 두 번째 같아. 


마나님: 아, 바뀌었다? 


마나님: 그런데 나는 왠지 그 첫 번째가 뭔지 알 것 같은데. 


나: (웃는다) 뭔데? 


마나님: 철학이겠지 뭐, 책장에 늘어나는 책이 무슨 책인지 딱 보면 바로 알지. 


나: (웃는다) 


마나님: 그런데 그게 왜 재밌어?  


나: 그 학문의 본질이 재미니까 그런 거 아닐까. 세상에 재미가 본질인 학문은 철학뿐일 거야. 



마나님: 컴퓨터공학의 본질이 재미 아니야? 오빠 컴퓨터공학 배워서 게임 만들잖아. 


나: 컴퓨터공학의 본질은 컴퓨터공학을 통한 새로운 제품, 혹은 가치의 창출이지. 그 가치 창출의 목적은 실은 이윤 추구고. 


마나님: 아하? 


나: 의학의 본질은 생명을 구하는 거고, 생물학의 본질은 생명의 신비를 알아내는 것이고. 문학의 본질은 언어를 통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철학은 역할이 없어. 


마나님: 역할이 없어? 


나: 물론 역할이 있는 철학도 있어.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지. 장 자크 루소가 없었다면 프랑스혁명이 한참이나 미뤄졌을 수도 있고. 모든 시대의 모든 정치철학들은 다 역할이 있었거나, 지금도 있지.  


나: 하지만 대부분은 그 역할의 추구가 목적이 아니야. 재미 추구가 목적이지. 


나: 에피스테메는 무의식에 작용하는 인식의 틀이다, 도덕과 양심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다, 언어는 실재를 죽이는 도구다, 이런 것을 깨달으면 세상을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어. 이게 굉장히, 엄청나게 큰 재미로 작용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하지만 그뿐이지. 나 혼자 재밌을 뿐이야. 



마나님: 동조해 줄 수가 없어서 아쉬운데. 


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아. 본질이 재미가 아니라면 이 무용한 학문이 플라톤 이후 2천5백 년을 살아남았겠어?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수천 년을 메이저로 살아남았을까. 문헌학 같은 것은 니체의 시대에는 최고로 인기 있는 학문이지만 현대에는 마이너 한 명목으로만 남았잖아. 


마나님: 나는 여전히 심리학이 제일 재밌는 학문 같아. 


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마나님: 아쉬운 건 인간과학에 불과하다는 것이지만 말이야. 


나: (빵 터진다) 



마나님: 아효, 인간과학 따위를 조기 졸업까지 하고 석사씩이나 했단 말인가. 실망이다, 과거의 나님.  


나: (한참 웃다가) 당신 이제 제대로 푸코한테 절여졌는데. 


나: (웃으며) 인간과학씨, 술이나 한 잔 받아봐. 


마나님: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다음, 술을 받는다) 


(잔을 부딪힌다) 




18편짜리 글, [인문학 비스킷]이 끝났습니다. 블로그에 두서없이 써둔 단상들을 그저 몇 개 테마로 묶어보는 가벼운 기획이었는데, 어느새 제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네요. 주말마다 도서관에 앉아 글을 쓰고 정리하고 퇴고를 하고 있자니, 열심히 살았던 소설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니체와 아모르파티, 포스트모던과 이항대립 탈구축, 푸코와 인간과학. 어느 하나도 쉽지 않은 주제이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실 제가 쓴 글로는 아마도 한참 부족할 겁니다. (제 읽기와 공부가 부족한 건 당연하구요) 겉핥기에 불과하더라도 이 개념들에 어떻게든 닿아보려 했는데,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언젠가 다른 주제를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인사 드립니다. 





(노파심에서) 농담을 설명하면 재미없지만, 이 에필로그는 심리학을 인간과학이라며 비난, 혹은 비하하는 글이 아닙니다. 인간과학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글 두 편을 읽어 보세요. 


https://brunch.co.kr/@iyooha/97


https://brunch.co.kr/@iyooha/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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