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 라마찬드란
아직 영화화되지 않은 만화 원작 <타짜> 4부의 악당은 "동작그만! 밑장 빼기냐?" 외치며 고니를 압박하는 아귀가 아니다. <타짜> 4부의 악당은 아귀처럼 우악스럽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영리하고 차가운, 계산적인 남자인데, 이 남자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성적 취향이 있다. 그는 여성의 발을 좋아한다. 마지막 대결을 위해 주인공과 마주쳤을 때,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발이 조금만 덜 예뻤더라도..." 그녀의 발이 조금 덜 예뻤더라면, <타짜> 4부의 스토리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사실 발 페티시에 공감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페티시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마 대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프로이트 조차 이 발 페티시라는 성적 취향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발 페티시가 있는 이유는 발이 성기를 닮았기 때문이다." 어떤가, 공감이 되는가?
라마찬드란 박사를 비롯한 뇌과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발이 성기를 닮았기 때문에 발 페티시가 있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성기를 닮은 손 페티시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손 페티시의 성적 취향은 없다. 프로이트의 분석이 부족한 것이었다면 뇌과학은 발 페티시에 대해 어떤 답을 내 놓을까?
캐나다의 신경외과의사인 와일더 펜필드는 인간의 대뇌피질, 좀 더 명확히는 뇌의 중심고랑 뒤쪽 표면에 인간의 감각신경과 운동신경이 각기 다른 신체부위에 얼마만큼 연관되어 있는지 연구하여 위와 같은 모델을 만들었다. 이것을 펜필드 호문쿨루스(Homunculus of Penfield)라고 한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발의 위치는 성기의 바로 아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손은 성기로 부터 멀다. 손은 얼굴 혹은 이마와 맞닿아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되는가? 그렇다. 이것이 뇌과학이 말하는 발 페티시의 원리다. 뇌의 중심고랑 뒤편의 펜필드 호문쿨루스 최하단 부위에서, 신경 섬유 조직 일부가 잘못 연결된 경우가 발생하면 발 페티시가 발생하는 것이다. 발을 보거나 상상하거나 하여 활성화된 신경 섬유가 성기에 대한 감각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루트를 통한 자극은 성기에 대한 직접적인 자극으로는 얻어질 수 없기 때문에(발에 대한 발화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색다른 경험과 흥분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뇌의 구조에서 '인접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뇌의 가장 바깥 조직인 신피질에 있는 200억개의 신경세포는 각각 평균 7천개의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된다. 이 연결 중 단 몇개의 연결이 잘못되어도 발 페티시의 예에서 보았듯이 뇌는 부분적으로 오류를 일으킨다.
인접함에 대한 신기한 다른 예제를 하나 더 살펴보자. 이번에 살펴볼 것은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이라고 하는 능력이다. 공감각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단 하나만 살펴보겠다. 보통 사람은 흰 종이에 검은색 잉크로 5라는 숫자를 적으면 그것을 당연하게도 검은색 5로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숫자를 빨간색으로 인지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6은 녹색, 7은 남색, 8은 노란색으로 본다. 그리고 이 능력은 심지어 유전이 된다. 이러한 사람을 숫자-색상 공감각자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왜 굳이 '능력'이라고 표현하는가?
왼쪽 그림에는 5 사이에 몇 개의 2가 숨어 있다. 이 숨겨진 2가 어떤 도형을 그리고 있는지 얼마 만에 파악할 수 있는가?
아마 보통 사람들은 2를 찾아내고, 그 2가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데 최소한 수십초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공감각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숫자-색상 공감각자는 오른쪽 그림 처럼 세상을 본다. 공감각자는 왼쪽 그림을 보면 즉시 2가 삼각형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낸다. 이러한 놀라운 능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뇌 측두엽의 방추회에는 색깔을 감지하는 감각신경의 영역인 V4와, 낱말과 숫자를 인지하는 감각신경 영역인 서기소 영역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영역은 서로 매우 인접해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제 짐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 공감각자란, 방추회내에 있는 V4와 서기소 영역 사이의 신경 섬유 조직 일부가 잘못 연결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숫자-색상 공감각자는 숫자가 입력되었는데 색상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한 가지 케이스의 공감각자만 살펴보았지만, 세상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공감각자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음계를 듣고 색상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요일(월요일, 화요일 같은 것 말이다)을 색상으로 느끼며, 어떤 사람은 특정한 도형을 보고 맛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 이탈리아의 신경생물학자인 자코모 리졸라티는 원숭이의 뇌를 연구하다 신기한 현상을 발견한다. 일단 운동명령과 관련된 전두엽 영역에 원숭이가 특정한 움직임을 수행할 때 발화하는 뉴런이 있다는 사실은 과학자 일반은 물론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어떤 뉴런은 원숭이가 땅콩을 집을 때 발화할 것이고, 어떤 뉴런은 나뭇가지를 잡아 당길 때 발화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운동명령 뉴런이다. 그런데 리졸라티는 이 뉴런들이 직접 행동을 하지 않아도,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발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땅콩 뉴런은 땅콩을 직접 집지 않아도, 다른 원숭이가 땅콩을 집는 것만 보아도 발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발견이다. 땅콩을 집는 타인의 시각적 이미지는 여러분 자신이 땅콩을 집는 이미지와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의 이미지를 입력받아 자신의 땅콩 뉴런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뇌는 내적 정신 변형(internal mental transformation)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신경 세포 집합을 리졸라티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고 부른다.
이 거울 뉴런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라마찬드란 박사와 뇌과학자 그룹은 이 거울 뉴런의 존재가 인류가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말한다. 문화는 모방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부모님을 모방하고, 선생님을 모방하며 타인의 행동과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거울 뉴런이 없었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는 자폐 스펙트럼의 어떤 그룹은 바로 이 거울 뉴런이 손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거울 뉴런 체계에 결함을 지닌 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델화할 수 없으며, 그래서 감정이입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앞으로 거울 뉴런이 자폐의 원리를 설명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감각과 거울 뉴런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이런 긴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이야기가 대체 예술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단 공감각과 예술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통계적 수치로 이야기하고 시작하겠다. 시인, 소설가, 예술가들 그룹 중 공감각자의 비중은 비예술인, 혹은 일반인 그룹의 무려 일곱배에 달한다. 이것만 해도 공감각과 예술은 매우 관련이 높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이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소설가에게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이 이 소설을 통해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소설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내가 그 소설을 썼겠소?"
이 소설가가 한 대답이 이해가 되는가? 이전에 몇 번 한 얘기지만 언어와 실재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겠다. (이전에 읽었던 분은 이 부분은 넘어가셔도 된다)
당신이 코타키나발루의 거대한 석양 앞에 서 있다고 하자. 그 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가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 어떻냐고 말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봐." 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감동한 건 처음이야" 라고 할 것인가? 어느 쪽 대답이든, 그 대답은 당신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장대한 석양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언어로는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로 세계를 기술할 수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면 이제 다시 소설가의 말로 돌아가보자. 소설가는 "그걸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내가 그 소설을 썼겠소?"라고 되물었다. 즉 소설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실재(實才)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긴 소설로서 표현한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나는 예술이 실재(實才)에 닿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이야기를 쓰면 글이 한 바닥 더 필요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글에서 하겠다.)
언어가 세계, 혹은 실재를 직접 기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은유를 사용한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쓴다. 마음이 호수인가? 마음과 호수는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떤 기분, 정확히는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호수가 가진 어떤 속성, 그러니까 고요함, 잔잔함, 맑음, 그윽함, 고상함 등을 가진 시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그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공감이 다시 등장했다. 우리는 언제 공감에 대해 이야기했는가? 그렇다. 거울 뉴런을 이야기하면서 였다. 즉 우리에게 거울 뉴런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 마음은 호수"라고 쓴 순간 시인이 느꼈던 그 예술적 감흥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울 뉴런은 그저 같은 부위의 신경 세포를 활성화하는 뇌의 메커니즘을 담당하는 뉴런이라고 했다. 즉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거울 뉴런은 우리의 특정한 뇌세포 그룹을 활성화한다.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바로 그 시인이 "내 마음은 호수"라고 썼을 때 활성화했던 그 뉴런일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마음'과 '호수'를 함께 연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 연결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인의 글을 읽은 덕분에 지금껏 우리 뇌에 한 번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연결이 갑자기 성립한다. 숫자 5를 붉은 색으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평범한 우리의 뇌가 숫자 5를 순간적으로 붉은 색으로 본 것이다. 공감각자의 시야를 순간 가져본 자극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뇌과학이 말하는, (혹은 라마찬드란 박사가 말하는) 예술의 정체다. 예술가가 아닌 우리가, 거울 뉴런을 통해 공감각자인 예술가의 신경 세포 활성화를 우리 뇌 내에서 재현하는 것. 그래서 예술가가 아닌 우리로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은유적인, 예술적인 자극을 받는 것이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과학에 대해 '과학에는 표정이 없다'고 말한다. 이 표정이 없는 과학이 말하는 예술이란 이런 것이다. 거울 뉴런이 촉발한 뇌 세포 연결의 복제. 어떤가, 좀 딱딱하고 재미 없었는가?
하지만 인간은 물론 우주 전체를 원자 단위로 분해해도 거기엔 영혼을 비롯한 어떠한 정신활동도 없다고 말하는 환원주의 물리학자들도 자신의 어머니를 단순한 분자의 집합으로 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오히려 신비를 느낀다. 신경 세포 활성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선명한 감흥을 얻는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감격하고,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나 뮤지컬을 보며 눈물을 짓기도 한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닌가. 코타키나발루의 장대한 석양은 단지 태양에서 핵융합에 의해 튕겨나온 광자들이 대기와 산란되어 750nm 정도 되는 파장으로 내 망막에 닿기 때문에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나키나발루의 석양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다. 단지 거울 뉴런이 촉발한 뇌 세포 연결의 복제일 뿐이라고 해도 예술이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번 주말에도 전통 음악과 현대 미술이 콜라보하는 예술 공연을 보러 갈 것이고, 거기에서 실컷 새로운 뇌 세포 연결을 즐길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라는, 예술이라는 기적을 누릴 것이다.
예술에 대한 다른 시각을 담은 글 하나를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