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예술공연 <여섯개의 불가능> 관람 후기
우리 트레바리 클럽 멤버이자 아티스트인 양민정님@Minjong Noelle Yang이 아트디렉터이자 퍼포머로 출연한 다원예술공연 [여섯개의 불가능]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이 글은 공연의 관람 후기입니다.
공연 관람자/관계자 분들과 나누고자 작성한 글이라, 이번 포스팅은 다른 글들과는 달리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브런치에 적합한 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왕 썼으니 남기고 싶어서 올려둡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충동은 본질적으로 죽음충동이라고 말한다. 유기체에게는 근본적으로 무기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무기체는 무한하다. 무기체는 어떤 개별이 아니므로 우리는 유기체라는 개체를 벗어나면 근원적 일자와 합일한다. 이것이 죽음충동이며, 무제약자를 향한 욕망이다.
나는 예술이 실재에 대한 희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대타자로부터 상속받은 상징의 세계를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 이전에 이미 분절되어 파편이 된 세상 속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상징으로 모든 세상을 항상 덮을 수는 없다. 모든 세상이 하나로 뭉쳐 산문이 된 새벽, 실재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시인은 시어를 포착한다.
실재가 거기에 있다는 걸 깨달은 시인은 마침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상징계에 속하지 않고 실재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좌절한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상징계의 산물이고, 실재를 죽이는 도구다. 언어로 옮기는 순간 실재는 죽는다. 엄마에게 도착하기 전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샘물처럼, 실재는 예술 향유자에게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버린다.
라캉이 말하는 대상a가 바로 이렇게 예술가가 가져오지 못하고 거기에 남는 실재다. 예술은 대상에 닿지 못하고, 예술가가 희구하는 것은 여전히 거기에 남는다. 예술가는 대상의 그림자만을 얻을 뿐이다. 그래서 예술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다.
공연의 제목 [여섯개의 불가능]에서 불가능한 여섯개는 사랑, 모순, 순결, 언어, 고요, 휴식이다. 언어로 재단된 실재는 이미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단의 아티스트는 이것들, 자신들의 예술 소재들을 가리켜 이미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제목은 대상이 이미 현상계에, 상징계에 없다는 고백이다. 본질적으로 예술은 비극이라는 선언이다.
하지만 원래 모순적인 것 아니던가. 인간을 원자단위로 분해해도 거기에 어머니의 영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환원적 물리주의자들은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성관계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캉주의자들은 배우자들에게 돌아간다. 예술은 영원히 대상a에게 거절당할 것을 알면서도, 혀끝에서 영원히 맴도는 이름처럼, 반복되는 미끄러짐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숙명인 것이다.
https://youtu.be/Fwwsx2BjYRE?si=TBDT0-VaD_x6ueu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