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독서모임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이번 시즌의 테마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우리는 첫 시간에 내가 관찰하거나 상호작용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물론 우주 전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카를로 로벨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읽었고, 두 번째 시간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무아(無我)를 원영 스님의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를 통해 배웠다. 세 번째 시간에는 연속적인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은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며 착각이라고 말하는 뇌과학서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을 읽었다.
이 세 가지 관점, 관계적 양자론, 불교, 그리고 뇌신경과학의 결론 중 하나만 옳아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믿기 어렵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멤버들은 내가 없다는 결론을 완전히 포착했고, 어떤 멤버들은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익숙해졌으며, 어떤 멤버들은 아직도 내가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모두가 궁금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체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이다.
늘 그렇지만, 나는 결국 니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무력화하고, 춤추고 노래하듯 살라고 하는 니체에 대해서 말이다.
이번 시즌 우리의 마지막 책은 니체를 참 좋아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책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고발하는 참여적 사회소설로 읽을 수도 있고, 작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작중에 등장해서 독자와 대화하는, 셰익스피어 이후의 소설 형식을 깨뜨린 포스트모던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그저 삼각, 사각 관계를 그린 복잡한 로맨스 소설로도 읽을 수 있고, 삶과 배우자, 혹은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의 무게에 대해 말하는 잔잔한 드라마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독서모임 주제책으로 선정했으므로 이 책을 일부러 니체에 빗대 읽어보려고 한다. 이미 서두가 너무 길었다. 바로 시작해 보자.
프라하에 살고 있는 유능한 외과 의사 토마시는 이혼 후 자유연애주의자가 되었다. 토마시는 사랑과 성행위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시는 의사로서도 뛰어나지만 남성으로서도 세련된 매너와 상류층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매번 쉽게 새로운 여성을 찾아낸다. 토마시는 말하자면 가벼운 남자다.
하지만 토마시는 행위가 끝나면 여성을 집에 보내거나, 장소가 여성의 집이었다면 스스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함께 잠을 자는 것은 사랑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토마시는 자신의 삶에 무거움이 침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느 날 토마시의 작은 마을로 출장을 가는데, 거기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테레자를 만난다. 토마시는 늘 그렇듯 원나잇의 가능성을 남기기 위해 그녀에게 프라하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며 명함을 건네는데, 열흘 후, 정말로 테레자가 토마시를 찾아온다. 커다란 여행 가방과 함께.
다른 여자를 안듯 토마시는 테레자와 관계를 나누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테레자는 프라하에 연고가 없었다. 게다가 정사가 끝나고 그녀의 몸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토마시는 테레자를 자신의 방에서 재우기로 했다.
가벼움의 상징인 토마시는 자신의 삶에 갑자기 등장한 무거움을 끌어안고 난처해한다. 그래서 토마시가 등장하는 챕터들의 제목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테레자는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잘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에 갈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지식을 상징하는 책은 일종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녀가 일하는 호텔 바에 토마시가 들어와 코냑을 주문하고 책을 펼쳤을 때, 테레자는 그에게서 운명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커다란 <안나 카레니나> 양장본을 품고 프라하에 있는 토마시의 집 문을 두드렸다.
테레자는 운명을 믿고,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테레자는 사랑과 성행위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당연히 그녀는 강력한 정조관념을 가지고 있다. 테레자와 사실혼 관계임에도 계속해서 다른 여자를 사냥하듯 만나는 토마시와는 달리, 테레자는 작중에서 딱 한번 바람을 피운다. (그것도 사실은 토마시를 이해해 보려는 행위였고, 이해는커녕 테레자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는다)
무거움의 상징인 테레자는 토마시의 바람기, 즉 가벼움을 끌어안고 난처해한다. 무거운 테레자는 영혼과 육체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테레자가 등장하는 챕터들의 제목은 '영혼과 육체'이다.
이쯤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조금 어려운 얘기가 될 수도 있다. 어려운 이야기는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다소 엉뚱하지만 이런 질문이다.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나와 당신이 살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이 존재하냐고?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영토인가? 구성원인 국민인가? 정부와 시스템인가? 혹은 역사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것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믿음 체계에 포섭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믿음일 뿐, 본질적으로는 허구이다.
이런 예제는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존재하는가? 삼성전자는 무엇인가? 주식인가? 건물인가? 구성원들인가?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름을 떠올리며 같은 질문을 해보라. 그 회사는 존재하는가? 바로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회사나 국가 같은 개념은 물론이고, 양자역학, 우주론 같은 과학이나, 유물론, 유심론 같은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 문화, 예술, 종교도 사실은 전부 상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믿음 체계다.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우리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들, 국가와 사회 구성요소부터 테레자가 믿고 있는 도덕, 영혼, 운명, 사랑, 강력한 정조관념까지, 이 모든 것들을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가벼움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허구적 신념 체계를 하나씩 버려보자. 대한민국과, 삼성전자와, 양자역학과, 우주론과, 도덕과 운명과, 밀란 쿤데라와 소설들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과 내 가족, 그리고 내 이름까지 모든 무거운 것들을 버려보자.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어떤 사람은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 만큼은 남아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바로 그 질문의 가능성 때문에 우리 모임은 위에서 언급한 책 세 권을 읽었다.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했지만 '나' 조차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조차 존재하지 않는, 모든 상징과 허구가 제거된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완전히 깨닫기는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니체의 핵심 개념이므로 아주 조금만 살펴보고 가자.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더 높은 것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말한다. 무엇인가의 지배를 거부하는 힘을 말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힘을 말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확신에 찬 어조로 어떤 시사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의견이 여러분의 의견과 달라 불편했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 아저씨의 의견은 정말 기사 아저씨의 의견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의견은 라디오 토론 방송에 참여한 어느 패널의 것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창조의 행위가 아니다.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노예적인 태도이고, 굴복하는 것이고, 굴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던, 어떤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건 마찬가지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가치는 파괴되어야 한다. 신, 도덕, 국가, 이념 등 지금까지 절대적으로 숭배되는 것들, 즉 '무거운' 것들 말이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 밀란 쿤데라가 상정한 '가벼운 것'은 힘에의 의지적인 것, 혹은 힘에의 의지 그 자체다.
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라하의 봄을 사회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라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주화 운동을 말한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 <프라하의 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체코슬라바키아의 해방자였다. 소련은 나치에 의한 체코슬라바키아의 함락을 막기 위해 체코슬라바키아의 군사동맹이 되어주었고, 체코인과 현지 유대인들과 협력하여 나치 부역자들을 추방하거나 처치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도래하자 소련은 동구권 공산주의 블록의 유지를 위해 체코슬라바키아의 또 다른 압제자가 되는데, 체코슬라바키아 시민들은 주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소련과 공산정권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이다.
화가 사비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녀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반대하여 아버지의 뜻과 반대로 살았다. 그녀는 과학자 프란츠의 애인이지만, 프란츠가 정말로 자기 부인과 이혼하고 사비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자 프란츠를 떠난다. 사비나는 가벼운 사람이다.
그 시대 체코슬라바키아의 지식인들은 소련과 공산주의를 악으로 규정했다. 지식인이라면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를 무릅쓰고서라도 마땅히 그들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비나는 다르다. 사비나의 악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두 똑 같이 구령에 맞춰 걸으며 똑같은 공산주의의 구호를 외치는 그 행위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항거하기 위해 거리를 행진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자고 외치는 체코슬라바키아의 지식인들의 그 행위도 마찬가지로 사비나에게는 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모든 무거운 것에 항거한다.
사비나는 소련의 괴뢰국가로 전락한 체코슬라바키아를 떠나 스위스로, 파리로, 마지막엔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녀는 공산주의가 박해한 예술을 수호하는 예술가로 대중들에게 소개된다. 사비나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는 격분해서 외친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얄팍함)예요!" 그녀는 민주주의 홍보를 위해 미국에 의해 얄팍한 아이콘으로 빚어진 스스로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거움을 거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비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거움을 거부하고 항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우리는 위에서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후에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존재한다. 무거운 것들이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깨닫기 어렵다.
어떤 정치 단체는 독일에서 사비나 특별전을 연다. 특별전에 전시된 그녀의 사진 앞에는 철조망이 그려져 있었다. 책자에 묘사된 그녀의 약력은 화가라기보다는 순교자나 성인에 가까웠다. 사비나는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사람들은 사비나가 무엇에 대해 항의하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무거움에 매몰된 이들에게 그녀는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사비나가 등장하는 챕터의 제목은 '이해받지 못한 말들'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 중 가장 니체적 인간은 사비나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공산주의는 물론, 전체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모두 항거했다. 니체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모두 무거운 것, 즉 힘에의 의지가 약한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밀란 쿤데라는 니체처럼 모든 무거움에 항거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밀란 쿤데라는 책의 맨 앞부분에서 이미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무거움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다. 이런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부 2절에서
빛-어둠, 두꺼움-얇음, 뜨거움-차가움, 존재-비존재 등, 이러한 극단적 이분법에 쿤데라는 반대한다. 존재는 자신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어서 무거움을 만들어낸다. 혼자 사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더 아름다운 이성을 빼앗고자 남과 다투고 싶지 않아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냈고, 그 제도를 지키기 위해 윤리적인 정조관념과 도덕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온통 우리가 만들어낸 것들 속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가벼움만으로도, 혹은 무거움만으로도 우리는 살 수 없다. 밀란 쿤데라는 이를 모순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이항대립론에 맞서 모든 모순 중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미묘하다고 말한다.
토마시는 정말로 마지막까지 테레자와 함께했다. 토마시는 어느 매체에 소련과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의사직을 잃는다. 더 이상 의사가 아니게 된 토마시는 테레자와 함께 도시를 떠난다. 토마시는 더 이상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대신 작업복을 입고 창문을 닦는 일을 한다. 그럼에도 토마시는 행복해했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시골길을 걷다가 트럭에 치여 함께 죽는다. 토마시의 옛 연인이었던 사비나는 이 소식을 토마시의 아들에게 듣는데, 그녀는 토마시가 자신을 떠난 후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고, 토마시와 테레자가 어디를 가던 길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토마시의 아들은 그들이 자주 가던 호텔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대답한다. 그 말을 듣고 사비나는 조용히 웃는다.
토마시와 테레자가 함께 죽었다는 것은 그들이 마지막까지 함께였다는 것이었고, 그들이 호텔에 가끔 놀러 갔다는 것은 그들이 마지막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됐다. 가벼움과 무거움 따위가 무엇이 그리 중요할까? 토마시는 행복했을 것이다. 사비나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카레닌이라는 큰 개를 키웠다. 그들은 카레닌과 함께 산책하며 여생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자 카레닌은 나이를 먹었고, 테레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웃음 지은 채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토마시와 테레자에게 사랑받았고, 그 생의 끝에 주인인 테레자의 무릎을 벤 채 죽었다. 그렇다면 됐다. 카레닌은 가벼움과 무거움 따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카레닌은 행복했을 것이다. 카레닌은 미소 지은 채 죽었다. 그래서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카레닌의 미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