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지그문트 프로이트 / <라캉 읽기>, 숀 호머
프로이트의 논문집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과 <라캉 읽기>를 완독했다. 독후감 두 개를 한꺼번에 쓰려다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어차피 독후감을 빙자하여 내가 쓰고 싶은 아무 말 쓰는 컨텐츠인데 굳이 두개를 쓰랴, 싶었다. 그래서 사상 처음으로 책 두 권에 대한 한 편의 독후감을 써 보기로. 이번 아무 말은 초자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프로이트와 라캉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아마 긴 독후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전 생애에 걸쳐 정신에 관한 여러개의 모형을 개발했다. 무의식에서 비롯되어 의식으로의 표출을 모색하는 강렬한 욕망들의 경제학적 모형(리비도의 개념은 경제학에서 왔다),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으로 구성된 위상학적 모형, 에로스(생명충동)-타나토스(죽음충동)의 이원론적 모형, 그리고 이드(id, 원초아), 에고(ego, 자아), 수퍼에고(superego, 초자아)로 이루어진 구조적 모형이 그것이다. 우리는 오늘 이 마지막 모델만 살펴볼 것이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이드, 에고, 수퍼에고에 대한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겠지만, 이 컨텐츠는 늘 인문학 문외한을 고려하여 쓰여지고 있으므로 간단하게만 설명해보겠다. 이후로는 이드, 자아, 초자아로 표시하겠다 (원초아는 이드만큼 어렵게 생긴 용어라…)
이드는 원초적인 본능이다. 막 태어난 아기는 이 원초적인 본능만을 갖고 있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싼다. 아기의 욕구는 늘 적절하게 해소된다. 엄마가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아이는 본능과 현실, 그러니까 세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본능을 느끼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자기 자신이 곧 세상이다.
그런데 아기가 12개월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본능이 거부되는 것을 경험한다. 엄마가 따뜻한 젖 대신 차가운 숟가락을 자신의 입에 집어 넣는 것이다. 아기는 숟가락을 거부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엄마 젖처럼 꿀꺽꿀꺽 삼킬 수도 없는 것을 나의 본능과 관계 없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어야 한다. 아기는 처음으로 내가 곧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세상과 구분된 나, 즉 자아가 탄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18개월이 되면 배변훈련이 시작된다. 배변욕을 느끼지도 않는데 엄마는 아기를 자꾸 변기에 앉힌다. 아기는 본능이 거부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의 본능을 통제하는 외부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의자에 바로 앉아야 하고, 포크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며, 밤이 되면 잠들어야 하고, 어지른 장난감은 치워야 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반복되며 아기의 안에 축적된다. 이제 아기는 배변욕을 느끼는 이드에게 스스로 말한다. ‘안돼, 변기에 앉기 전엔 안돼’, 체화된 규칙은 자아의 행동을 감시하고 자아로 하여금 본능을 억누르게 한다. 초자아는 이렇게 탄생한다.
이러한 이드-자아-초자아의 구도에서 프로이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초자아이다. 이드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자아 역시 필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인데 초자아는 그렇지 않다. 초자아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훈육을 받아야 형성된다. 초자아는 의식와 무의식에 모두 자신을 투사한다. 의식에 투사된 초자아를 우리는 도덕이라고 하고, 무의식에 투사된 초자아를 우리는 죄책감, 혹은 양심이라고 부른다. 이 도덕과 양심이 적절하게 형성되는 것이 프로이트에게는 중요하다.
만약 훈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초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면 자아는 쉽게 범죄를 선택한다. 초자아의 명령이 동작하지 않고, 도덕과 양심의 법이 약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초자아가 아예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는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훈육이 지나쳐 초자아가 너무나 강대해질 경우, 자아는 별것 아닌 것에도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도덕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강박증이 생기는 것이다. 이 죄책감이 자신을 향하면 자아는 스스로를 학대한다.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이렇게 해석한다. 조금 어렵게 얘기하면 프로이트에게 우울증은 초자아의 분노의 대상이 동일시를 통해 자아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보다 더욱 극단적인 경우는 초자아가 단지 투사로서 의식과 무의식에 자신을 남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아에게 실체로 느껴지는 경우다. 이 경우 자아는 초자아로부터 분열을 느끼고, 초자아가 자신의 외부에 정말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것이 감시 망상을 경험하는 원리다. 누군가가 자신을 늘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외친 과거의 그도, 소련 비밀경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망상에 평생을 시달린 수학자 존 내쉬도 이런 원리로 망상증을 앓았다.
프로이트의 초자아에 대해서는 알았으니 그럼 이제 라캉 이야기를 해보자.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유명한 라캉의 아포리즘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학창 시절에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잘 생각해보면 나의 욕망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부모님의 욕망을 욕망한 것이다. 더 멋진 배우자를 찾고 싶은 것도, 더 많은 돈을 가지거나 유명해 지고 싶은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타인의 욕망이다.
라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라캉은 명상을 통한 자아 찾기, 수도자 혹은 미니멀리스트의 삶, 심지어 기부를 통한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는 결정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타인의 욕망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쩌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걸까?
엄마는 아기의 입에 이유식을 넣으며 ‘맘마’라고 말한다. 아기가 ‘맘마’를 따라하면 엄마와 아빠는 기뻐한다. 아이는 이렇게 ‘맘마’라는 언어가 먹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어서 엄마는 사과를 눈 앞에 보여주며 ‘사과’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세계와 뒤엉켜 한덩어리였던 빨간색 물체가 비로소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아이의 지평에 도착한다. 아기는 처음으로 사과를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라캉은 이러한 과정을 상징의 세계(이하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라캉에게 상징계란 언어, 개념 체계, 그리고 이것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 문화적 규율을 뜻한다. 아이가 ‘사과’라는 언어로 세계에서 사과를 분절해냈듯, 이렇게 인간은 언어와 상징을 통해서만 세계를 파악한다. 인간은 '이미 형성된 개념'들 속에서 사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라캉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언어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모든 개념, 모든 법, 모든 규칙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개념과 법과 규칙들은 우리와 관계 없이 원래 거기에 있었다는 점에서 타자적이다. 즉 우리가 상징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만들어져 있었던 타자적, 사회적, 상징적 개념과 규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것이 무의식이 생성되는 순간이며, 그래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주체는 처음부터 분열되어 있다. 스스로 세계를 인식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아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타자를 받아들여 주체가 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타자가 있다. 그 타자가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든 개념들을 받아들일 것이며, 내가 금지한 것들을 하지 말지어다, 라고.
그런데 어딘가 닮지 않았는가? 훈육을 통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고, 도덕과 양심을 부여하는 것. 그렇다. 라캉의 상징계와 타자의 담론은 프로이트의 초자아를 닮았다. 하지만 여기에 닮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이 우리의 이드에 기인한다고 했다. 하지만 라캉은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라캉에게 초자아는 주체의 욕망을 규제하는 상징적 구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맹목적인 즐김을 명령하고 강요하는 주체이기도 한 것이다. 저 핸드백을 욕망하라! 저 자동차를 욕망하라! 더 좋은 대학을, 직장을, 돈을, 명예를 욕망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초자아인 것이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초자아는 주이상스(향락)에 대한 명령이다 – 즐겨라!’ 라캉에게 욕망은 타자에 속하므로 즐기라는 명령 또한 초자아의 것일 수 밖에 없고, 이 향락에의 명령은 달성될 수 없는 명령이므로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욕망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라캉에게 이드와 초자아 사이를 조율하는 자아 같은 것은 없다. 초자아의 형성을 도와 극복할 수 있는 정신증 같은 것도 없다. 라캉에게 우리는 모두 치유될 수 없는 정신병자다. (우리가 모두 정신병자라는 것은 언뜻 염세적인 문장처럼 보이지만, 이 문장은 실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생략하겠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독해할 때 염두에 두면 좋은 것은, 프로이트는 늘 자아의 통합을 생각하고 라캉은 그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점은 내가 오늘 쓴 초자아에 대한 이 둘의 다른 해석 말고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형성과정, 나르시시즘에 대한 관점, 증상의 관해에 대한 관점 등, 많은 부분에서 드러난다.
사실 여기에 라캉의 환상 개념을 더 붙이면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탈한 것들인지까지 얘기할 수 있는데, 이미 독후감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어져서 여기에서 줄이려고 한다. 다만 아래에 라캉의 환상 개념에 대해 예전에 써 둔 글을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