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정답(정해진 답)은 없다.
대니얼 클라인,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를 읽고
대니얼 클라인이 쓴 이 책은 순전히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원서명은 <Every Time I Find the Meaning of Life, They Change It>이라고 한다. 번역하면 ‘인생의 의미는 찾았다 싶으면 또다시 바뀐다’. 저자는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를 보면서 현재를 즐기는 일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걱정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스누커즈. 원서의 표지 모델이기도 하다.
학교 다닐 때에는 5지선다형 문제에서 맞는 답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했다. 우리 때에는 주관식이라고 해봐도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지인 중에는 대입 문제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마지막에 김첨지가 문을 ( ) 열었다 부분에서 ‘왈칵’인지, ‘벌컥’인지 헷갈려서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가 현진건 작가라면 내 작품을 그런 식으로 문제 낸 것에 대해 화를 ‘벌컥’ 냈으리라.)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선생님으로부터, 주위 어른들로부터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모범답안 같은 말씀을 자주 들으며 자라왔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무조건 어른들의 말씀이 삶의 진리가 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더구나 내 아이가 내 말대로 열심히 따라 살면 딱 나 정도만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아이한테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말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내 삶이 정답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므로.
딱 맞아떨어지는 답을 낼 수 있는 질문은 과학의 영역이다. 아니, 심지어 과학 분야에서조차 종종 그 ‘정답’이 정답이 아니었음이 밝혀져서 뒤집히는 사례가 얼마나 빈번한가. 하물며 다변하는 세상 속 각양각색의 개인들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단언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공통의 사회 규범과 추구할 만한 가치는 물론 있겠지만....
동료 중에 "그건 틀렸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이 있다. 문.이과 특성으로 사람 일반화하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극 이과 성향이라는 그의 말투가 극 문과 성향인 내가 듣기엔 거슬릴 때가 종종 있다. 이왕이면 "그렇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마땅하고, 나 역시 가급적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자꾸 내가 "틀렸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자신의 관점과 경험으로 볼 때 ‘이건 틀렸고, 저게 맞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 자신의 의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너도 이렇게 해라"라고 강요까지 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그런 분들에게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오답을 제시하는 것만큼 무모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가 80살 노인이라는 점이 반갑다. 각자 자신의 ‘정답’ 아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존중하고 응원해 주는 것 같다. 이인은 <어떻게 나를 지키며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 어른이다"라고 말했다. <신경 끄기의 기술>의 저자 마크 맨슨도 "확신은 성장의 적"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어른이 될수록 점점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 같다.
책에 "완벽주의란 온전한 성취감을 절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데는 완벽한 방법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결코 남 못지않게 실수나 실패가 많았다. 어쩌면 그것들은 분명 그 순간에 ‘틀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생 전 과정을 보았을 때 "정답은 없다"는 말이 큰 위안이 된다. 남처럼 말고, ‘나’로 살기. 충분히 그래도 되는 이유,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