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C Book

통제의 이분법

마시모 피글리우치, <가장 단호한 행복>을 읽고

by 양만춘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으라면, 지금 바로 죽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죽으라면 지금은 점심을 먹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까요. 죽음에 대해서는 일단 점심을 먹은 다음에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글인데 저자는 2014년 가을에 이 글을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1세기에 살았다는 이 철학자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짧은 글에 삶과 죽음을 대하는 멋진 유머와 냉철한 현실 감각 모두를 담아냈는지 감탄하며 에픽테토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


나는 이 구절을 보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백세희의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떠올랐다. 비록 에픽테토스의 말에는 유머가 담겨 있었던 반면, 백세희는 우울증으로 인해 힘들어하며 그 치료 과정을 담은 글을 썼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둘 다 공통적으로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식욕으로 대체하고 있다. 죽음은 점심이나 떡볶이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심각한 것이지만, 지금 당장의 사소한 점심 식사나 떡볶이가 더 간절하게 와 닿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가 보다.


“주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한 마음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20세기 초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가 쓴 <평온을 비는 기도>이다. 이런 마음가짐들은 <엥케이리디온>의 첫 구절에서 온 것인데, <엥케이리디온>과 <담화록>을 남긴 아리아노스는 에픽테토스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러한 정신은 결국 에픽테토스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엥게이리디온>의 첫 구절에서 통제의 이분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고 한다.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의견, 동기, 욕구, 반감 등 우리 자신이 하는 것들입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몸, 재산, 평판, 직장 등 우리 자신이 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키케로가 통제의 이분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들었던 비유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과녁에 창이나 화살을 명중하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의 최종 목적은, 요컨대 (스토아주의자들이 표명한) 최고선은 화살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과녁에 화살을 정확히 맞힐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때, 자신의 ‘최종 목표’는 인생에서 최고선에 대응됩니다. 실제로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는 것은 인생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에 대응됩니다.”


과녁을 맞히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지만 화살이 과녁을 정확히 맞히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건강하고 부자가 되는 결과는 우리의 통제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했다면, 과녁을 맞혔는지 못 맞혔는지(건강한지 병약한지 또는 부유한지 가난한지)에 따라 우리의 자존감이 달라져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태도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선택’은 하되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담화록> 제4권, 4.23에도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것들을 더 귀중하게 여길수록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는 더 좁아집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건강, 부, 명성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우리는 간절히 바라고, 온전히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 즉 판단, 의견, 목표, 가치관 그리고 결심은 소홀히 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느라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려서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


상황이나 결과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에 임하는 마음 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상황이나 결과를 우리가 온전히 선택,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집착한다. 삶의 진리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철학자나 종교인이 아닌 이상, 현실에 초연하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론과 이상은 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지는 반면, 현실의 물질과 감각은 너무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와 닿곤 한다. 죽음보다 점심 식사나 떡볶이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현실에 대한 집착과 욕심으로 더 불행해지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무엇도 진정 우리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빌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여관에 들른 나그네처럼 살아간다면 현실 속 상실과 실패에 조금 더 초연할 수 있을까?


“누군가 여러분의 몸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며 남에게 넘겼다고 해봅시다. 분명히 화가 나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조종하고 마음대로 다루는 현실에는 화를 내지 않는 겁니까?”


“삶의 기술을 실천한다는 것은 마치 병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사람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친 부위를 보호하고 치료해서 제대로 낫게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글이 어려워져 버린 것 같다.ㅠ.ㅠ 지금까지 참고 읽어주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다! ^^;)

결국! 에픽테토스의 가르침대로 사는 방법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을 거두고 통제할 수 있는 것, 즉 내면의 발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기술을 실천하는 사람은 외부의 것에서 위안을 얻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외부의 것들을 탓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에서 위로를 얻고 피해의 원인을 찾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참 뻔한 말 같고 이미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병에 걸렸다가 회복하는 사람이 갑자기 마라톤을 뛰거나 무거운 역기를 번쩍 들어 올릴 수는 없는 것처럼 조금씩 천천히 자신의 다친(부족한) 부분을 살피며 살아간다면 내면의 평화도 조금씩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고민이 되거나 힘들 땐 이런 질문부터 던져 보자.


“지금 이것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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