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C Book

병원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책

-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by 양만춘

지난 10월,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남편이 병원 지하에 있는 편의점에서 책을 한 권 사 왔다. 노란 표지의 이기주 책,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였다.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인 건 알지만, 그래도 병원 편의점에도 그의 책이 있다니 신기했다. 얼마나 대중적인 작가가 되면 편의점에 책이 진열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내가 처음 보는 것인데도, 2020년 3월 18일에 1쇄를 발행했는데, 4월 15일 즉,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15쇄를 발행했다고 돼 있다. <언어의 온도> 발행 부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부럽다!)


이 작가도 처음부터 유명하지는 않았다. 몇 년 간 무명작가로서 힘들게 지냈다는 것은 이 책에 실려 있는 그의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무더운 여름, 아침부터 커다란 헝겊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신 어머니가 가방에서 대여섯 권의 책을 꺼내며 말씀하셨다고 한다.

"물어물어 서점 몇 곳을 돌았어. 네 책을 좀 사 왔다···."

이기주 작가는 몇 권 사봤자 보탬이 안 되니까 앞으로 이러지 마시라고 화를 냈지만 어머니는 나직한 소리로 웅얼거리셨다.

"알아,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니···."

그날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에 밤새 뒤척인 작가는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다른 작가들이 흔히 하는 강연을 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강연장에서 무수한 말들을 쏟아내고 나면 힘겹게 적은 문장들이 자신이 일으킨 파도에 의해 야금야금 침식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자신은 일정한 분량의 글을 쓰려면 한동안 입을 앙다문 채 자신의 말과 떨어져 지내며, 목구멍으로 삼킨 말을 절이고 묵히고 삭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작가는 자신만의 '활자의 숲'을 일구며 살아가겠다며, 독자들이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처럼 이기주의 책 속에서 잠시 쉬기를 바란다. 그런 작가의 바람처럼 나 역시 병원에서 그의 책을 만나 잠시 쉴 수 있었다.


이 책은 여백이 많다. 한 편의 글이 짧은 데다 지면 상으로도 빈 곳이 많다. 정신을 집중해서 공부하듯이 읽거나, 후루룩 빠른 속도로 읽어내리는 책이 아니다. 글들이 서로 연관돼 있지도 않으니 아무 쪽이나 펼쳐서 읽으면 되고, 편하게 쉬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일기장같이 예쁜 디자인의 표지와 감성적인 삽화까지 곁들여져 전반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것입니다." - 프롤로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는 가능한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거나, 시간이 거기서 멈추기를 바랄 만큼,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반면, 일 때문에 만나는 관계이거나, 불편한 사이라면 한 시라도 빨리 그와 헤어지기를 바란다. 차라리 혼자 무료한 시간을 보낼지언정, 그런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기는 것이 아깝다.


어린 자녀나 아픈 가족을 돌보는 일은 마냥 즐겁기보다는 신체적·정신적으로 피곤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런 희생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돈을 쓰는 것보다 시간을 쓰는 것이 실은 더 어렵다. 그리고 상대의 가슴을 데울 수 있는 것도 결국 내가 건네는 시간이다.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보호자가 병실에 함께 머물 수도, 마음대로 병실을 방문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병동 출입구 앞에 서 있거나, 다른 층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려주었다. 수술 전·후에도 각각 5분 정도만 보게 할 정도로 보호자의 병동 출입이 힘들었지만, 병원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걷기 운동을 할 때는 나를 부축해 주었는데, 나를 위해 느린 걸음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어 참 고맙고 행복했다. 아프면 외롭다. 그럴 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더없이 소중하다. 언젠가 그 사람이 아프면 그땐 내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리라 생각했다(물론, 서로 아프지 않고 시간을 공유할 수 있으면 그게 훨씬 더 좋다)


입원했을 때 남편이 사다 준 이 책을, 당시에는 수술을 앞둔 불안감과, 수술 후 통증으로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책장 한 켠에 놓인 책을 이번에 마저 읽고 그때를 회상했다. 병원 편의점에서 환자의 손으로 건네질 수 있는 책을 쓴다는 것도 참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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