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모르게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이럴 것이다’라고 흔히 판단을 내려 버리기 쉽다. 국어 교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신규 발령을 받고부터 지금까지 오해를 받는 경우는 다음과 같다.
1. 한자를 잘 알 것이다.
내 머리 구조는 도저히 한자를 암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중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할아버지 선생님이셨는데 시험 문제를 거의 미리 알려주다시피 하셨다. 예상한 대로 시험 문제가 나왔지만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 요상하게 생긴 그림문자는 도통 서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특히 직접 한자를 써야 하는 문제는 그냥 다 틀렸다. 보지 않고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내 한문 성적은 중간고사에서 60점, 기말고사에서 61점.(다른 과목 성적은 생각나지 않는데 한문 점수만 정확히 기억나는 건 왜일까?)
대학교에 가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했다. 국어국문학 전공 교재에 한자가 너무 많았다. 강의실에서 책 펴고 교수님 설명을 들으며 대충 이런 뜻이겠구나 때려 맞추며 연필로 적어 두기 바빴다. ‘현대시 텍스트 읽기’ 수업은 잊을 수가 없다.
당시 나는 4학년 1학기였는데 몇 번 수업을 들은 교수님은 나와 익숙해서 그런지 나한테 시 본문을 소리 내서 읽어 보라고 하셨다. 1920년대 시였는데 한자가 많았다. 시를 읽는 도중 끊기면 주위에서 말해줘서 더듬더듬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자신감인지 ‘(한자)한 춤을 춘다’는 부분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읽었다. "야한 춤을 춘다"고... 강의실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교수님은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웃으셨다( 참고로 교수님은 여성 시인이다). “하긴 묘(妙)한 춤이 야할 수도 있겠구나.” 그때 교수님께서 내게 해 주신 위로(?)였다. 여담이지만, 이후 그때 강의실에 있던 한 남자 선배로부터 고백 편지를 받았다. 이상한 사람이다. 무식한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 웃긴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혹시 내가 좀 야해 보였나?^^;
모든 게 어렵고 조심스러웠던 신규 교사 1년 차, 옆에 앉은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책 한 권을 펼치며 요청하시는 말씀, “이거 한글로 바꿔주실 수 있어요?”. 무슨 말씀인고 하니 그분이 다니는 대학원 교재인데 한자로 쓰인 부분이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국어 선생님이니까 한자도 술술 읽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일부분이라도 쉽게 바꿔줄 수 있는지 부탁하시는 거였다.
부당하거나 무례한 요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책 한 권을 통째로 바꿔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본인도 어쩔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평소 그분이 신규인 나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 책 한 권을 통째로 한글로 다 바꿔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멀쩡한 한글을 놔두고 왜 이렇게 많은 한자로 지면을 도배해 버린 것인지 원망스러울 만큼...
두 번째 학교에 발령을 받고 갔을 때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남편에게 보냈다. “이거 이 학교 교훈이래. 무슨 말이야?” 그 정도였다. 아직 *이버 한자 사진이 통용되기 전이었고 난 새 학교의 교훈도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한자를 잘 쓰면 얼마나 편하고 멋있을까 싶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쓰인 문학 작품은 한자가 많은데 수업 전에 미리 음과 뜻을 다 적어둬야 한다. 작품 설명에 필요한 한자를 책을 안 보고도 ‘휘익~’하고 칠판에 멋있게 써 보고 싶지만, 언감생심. 책을 보고 그림을 옮겨 그리듯 한자를 쓴다. 심지어 가끔 틀려서 지우고 다시 쓰기도 한다. 아이들에게는 미리 내가 한자를 아주아주 못한다는 것을 고백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좀 창피하다.
2. 글을 잘 쓸 것이다.
물론 국어 교사 중에 일부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긴 하지만 국어 교사라고 해서 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때도 글쓰기 관련 수업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있으면 듣고 싶었지만 찾기 힘들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그랬다. 어떤 글이 잘 쓴 글인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초에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학생들의 글을 평가할 때 조금 찔리기도 한다. 만약 누가 “그러는 너는 글을 얼마나 잘 쓰냐?”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국어교사라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뚝딱’ 하고 멋진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무슨 행사만 생기면 교장선생님은 국어 교사를 찾는다. 그렇다. 교장선생님 얼굴 사진과 함께 실린 인사말(교지, 축제, 오케스트라 공연 등), 교장선생님께서 많은 학부모님들 앞에서 보고 읽으시는 그 원고의 대부분, 내가, 우리 국어교사들이 쓴 거다. -.-;
일 년 동안 한 번도 부르신 적이 없고 내 존재 자체를 아실까 싶었는데 무슨 행사가 있으면 드디어(?) 교장선생님과 독대하게 된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고쳤으면 좋겠다는데 뭘 어떻게 고치라는 건지 알기 어렵다. 내 마음도 표현하기 힘든데 교장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 수가 있나? 내가 교장선생님으로 빙의된 것처럼 상상해도 그분의 말을 대신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싫. 다.
그나마 많은 국어 교사가 작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평균 이상의 글쓰기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건 많은 책을 읽고 비평해 온 경험이 쌓인 결과이리라. 그리고 변명으로 들릴지 몰라도 본인이 직접 글을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글을 가려내고, 어떤 글에서 어떤 점이 부족한지 충분히 비평할 수는 있다고 본다. 미술비평가가 화가일 필요는 없는 것처럼... 또한, 일 년에도 수 백 편의 학생 글을 수 차례에 걸쳐서 읽고 평가하다 보면 아무리 글쓰기 재주가 없다고 해도 글을 보는 안목은 길러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그래서 내 글은 좋은 글인가?’하는 질문은 하지 말기로 하자.)
그러므로 내 글이 형편없다면 그건 “국어교사인데도 글을 이 정도밖에 못 써?”하고 비판받을 일이 아니라 그냥 개인인 내가 글을 못 쓰는 걸로.... 하면 안 될까요?^^;
3. 웬만한 책, 특히 문학작품은 다 읽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학생들이 이것을 전제로 하고 말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00의 000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라는 질문에 나는 도대체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읽어도 모르겠지만 안 읽었으니 더욱 모르겠다. 무슨 근거로 내가 자신들이 읽은 책을 ‘당연히’, ‘이미’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지... 내 수준을 높게 봐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태백산맥 전 권을 다섯 번 읽었다는 중3 학생이 뭐라 뭐라 말할 때에는 그 아이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자극받아서 나도 읽기 시작했는데 5권째에서 눈 아프다는 핑계로 그만뒀다. 언니나 남편은 ‘기본 중에 기본’(도대체 그 '기본'은 누가 정하는 건가?)이라고 하지만 호흡이 긴 대하소설은 나로서는 시작하기도 겁난다. 태백산맥은 읽다가 중단했지만, 남들이 다들 읽었다는 ‘토지’, ‘아리랑’, ‘한강’,....등등은 시작도 못해 봤다.
그나마 한국문학작품들은 대학교에서, 임고 준비를 하면서 ‘의무적으로’ 많이 읽어서 다행이다. 교과서에 일부만 제시돼 있는 소설도 전체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니 그 점은 다행스럽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억이 오래되다 보면 내용이 확실치 않고, 심지어 A 이야기와 B 이야기가 뒤섞여 버리기도 하므로 수업 전에 줄거리 요약본이라도 다시 읽어봐야 낭패를 면할 수 있다. 국어 교사의 머릿속에 항상 작품 전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문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다 문학소녀나 문학 소년이 아닌 것처럼 국어 교사라고 해서 다 문학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아니 즐기기 어렵다고 해야 맞을까? 컴퓨터와 교무업무 전산시스템이 출현하기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들은 빨간 색연필로 시험지를 채점했고, 생기부에도 손으로 한 두 줄을 적을 뿐이었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던 그 시기에 오히려 선생님들은 여유 시간이 많으셨는지 과학 선생님은 공강 시간마다 과학 준비실에서 서예를 하셨고, 수학 선생님은 체육관에서 탁구를 치셨고, 국어 선생님은 교무실 책상에 앉아 소설을 읽고 계셨다.
하지만 지금 학교에서는 화장실도 뛰어갔다 올 정도로 쉬는 시간에도 메신저에 쌓여있는 메시지를 체크하고 NEIS(‘나이스’로 흔히 읽지만 전혀 나이스 하지 않아서 그냥 ‘네이스’ 정도가 맞는 것 같다)에 들어가서 클릭하고 자판을 두드리기 바쁘다. 공강 시간에 소설책을 읽고 있는 국어 선생님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만약 간혹 계시다면 그건 거의 수업이나 행사(독서감상문 쓰기 대회 같은) 준비 때문일 것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학교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면 또다시 육아와 살림을 하느라 두 번째 출근을 한 것 같은 생활을 하는 선생님들이 많다 보니 퇴근 후에도 여유 있게 소설을 읽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나 시처럼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휴식을 취하는 국어 선생님들도 분명 계시다. 대체로 미혼이거나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여유 시간이 생기면서 가능해지는 것 같다.
문학 작품에 대한 애정도 변한다. 이미 너무 많이 인용된 한 영화의 대사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싶지만, 사범대학도 아니고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나 역시 요즘은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지난해에 유행하는 소설 두 권을 사 둔 것이 아직도 책장에 새책처럼 꽂혀 있다. 남편은 안 볼 거면 빨리 알라딘에 팔아야 값이라도 잘 쳐준다고 하는데 나는 읽을 거야 읽을 거야 하다가 결국 해를 넘겼다. “날 사랑하긴 한 거니?” 라고 문학이 내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 될 것 같다. “그땐 분명 그랬어. 지금도 사랑은 해.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다른 데로 눈이 가.”
문학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서는 나 역시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문학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얕은 샘물을 마시며 갈증을 해소하고 감동받는 정도인 것 같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기가 막힌 통찰과 상상, 따로 적어 두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표현에 감동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더욱 문학보다는 현재 세상의 모습과 변화,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책들을 더 찾아 읽고 있다. 자꾸만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내가 몰랐던 세상이 펼쳐지다 보니 어쩌면 시류에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러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국어교사라고 해서 가슴에 시집을 품고 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감성적인 모습은 아니다.
•한자를 모르니 내 글에는 한자가 거의 없다.
•글은 되도록 간결하게 써야 된다는데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진 걸 보면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문학작품들은 내가 거의... 안 읽어 봤다.
전체 국어 교사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지만 국어 교사의 일반화된 모습에 나를 끼워 넣을 생각은 절대 없다. 전체의 모습과 개별의 모습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전체의 모습도 편견에 의한 것이거나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00 직업 가진 사람은 이래”라는 말은 다른 직업인에게도, 국어교사에게도 적절한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내가 다른 국어교사와 다른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