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y Pitta

END & AND

by 유정

5년 전, fantastic scar pink는 8명의 배우에게 색깔을 입히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 찍고 글 쓰고 디자인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독립출판 프로젝트를 fantastic scar pink의 첫 번째 프로젝트로 삼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무모한 독립출판물은 독립서점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과연 얼마나 많은 만났을지….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던 fantastic scar pink는 가진 모든 무모함과 정성을 쏟아부었음에도 어찌할 줄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더 살뜰히 살피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이 프로젝트는 고맙게도 fantastic scar pink에게 END가 아니라 AND가 되어주었다. 다음의 후기는 Fairy Pitta의 두 번째 주제이자 이처럼 무모한 일을 벌이게 만든 fantastic scar pink 구성원 각자의 시작에 대한 짧은 소회다.




상처 19살 때부터 시작해서 3일에 한 번 꼴로 면도를 해 왔는데, 평균적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면도를 하다가 베인다. 그러니까 처음 면도를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20년 동안 480번 정도, 480개의 상처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것도 늘 같은 자리, 목젖 근처에 말이다. 이제는 베인 순간 피부를 타고 번져가는 핏물이 짜릿하게 느껴질 정도다. 남아있는 분홍빛 상처는 영혼의 흔적이다. 내게 남아있지 않은 기억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춰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그 기억들은 상처를 마주하는 타인에게 전달된다. ‘그 상처는…’, ‘글쎄요… 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런 식의 대화가 시작되면 기억이 간질간질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당시의 따뜻했던 느낌, 욱신거렸던, 혹은 숨기려 했던 기억들…. 얼마 되지 않는 기억들은 물론 슬픔과 외로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을 지나쳐 살아왔던 거다. 상처가 없이는 그 시간들이 불가능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기억해낸다. 시간이 지나면 옷 속으로 이불속으로 들어가듯 그 기억들도 사라진다. 마치 다음 상처를 기다리 듯 잠이 든다.

사진 나는 인물 촬영하는 걸 가장 좋아한다. 촬영하는 동안만큼은 피사체와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촬영하는 시간 동안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고 ‘내 사진’을 더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욕심이라 해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사진이 밝아지고 재미있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는 좀 더 밝고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넣을 수 있게 됐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거다. 그동안 여지가 없는 사진들을 찍었다면 이제는 보다 넓게 찍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여덟 명의 배우들. 그들 하나하나가 내 앞에서 한 시간 반 동안 공연을 해줘서 고맙다.

영상 사진 작업의 연장선 위에 놓고 싶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사진과 영상을 함께 작업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에 가까운 영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벽에 걸어두고 볼 수 있는 사진 같은, 혹은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움직임은 최소화하되 감동을 줄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건, 움직임을 최소화할수록 작업은 까다로워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음악과 영상의 균형을 맞추는데 공을 들였다. 음악이 지닌 무게만큼 영상에도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움직임을 절제했고, 결과적으로 사진을 이용한 영상 작업이라는 콘셉트가 잘 맞아떨어진 셈이 됐다. 덕분에 음악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이번 영상 작업은 ‘적당한 무게’를 찾는 작업이었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 무게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 사이에 있으리라.

- from ‘Photographer’ a.k.a. fantastic scar pink




상처 왼쪽 쇄골 아래로 10cm쯤 되는 곳에 상처가 하나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상처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분홍빛이다. 내게는 조립 설명서 같은 상처다. 무언가 하나 끼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상처다. 그리고 성급한 성격 탓에 주로 손에 자잘한 상처가 많이 난다. 하나 생기면 하나가 아물고… 손에 생기는 상처들은 계주를 하듯 바통을 이어받는다. 마음의 상처는 헤아리기 힘들다. 그래서 하나가 생길 때마다 심장 깊숙이 박아 넣는다. 그렇게 박아 넣은 상처들이 가득 차오르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짐작이 맞아떨어지기만 바랄 뿐이다.

일곱 살 생일에 사촌 오빠에게서 노트를 한 권 선물 받았다. 그 노트에 일기를 쓰다가 시를 썼고, 시를 쓰다가 그만 소설의 덫에 걸렸다. 놓을 수 없어서, 놓아버리고 싶지 않아서 여태 이러고 있다. 다룰 줄 아는 기술 하나 있어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에 의하면, 글은 나에게 기술이다. 그러니까 나는 기술자인 셈이다.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지 10년, 이제야 겨우 수습을 면한 기분이다. 수습 딱지를 떼고 나면 훨훨 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기다리는 중이다. 빛나는 문장이 나를 찾아와 주기를 기다린다. 그가 내게 와서 ‘너도 이제 진짜 기술자가 되었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면 위로하고 싶다. 나를, 당신을 위로할 수 있다면 좋겠다. 위로받고 싶으니 위로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나는 그리 위로받을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위로받고 싶다, 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로하고 싶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첫 번째 위로다. 여덟 명의 배우와, 함께 작업한 황규백 작가와, 이 책을 보아줄 이름 모를 누군가와 나. 그리고 내 안에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디자인 가능한 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보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자인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직장에서부터 손대기 시작했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싶다가도 자꾸 고개를 드는 욕심 때문에 자꾸, 빠져들고 있다. 디자인은 두 번째 기술이자 덫인 셈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기술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다. 글도 마찬가지지만, 무엇을 할 줄 아는 것과 다룰 줄 아는 것은 다르다. 나는 디자인을 할 줄 알지만 아직 다룰 줄은 모른다. 디자인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나도 디자인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니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가뜩이나 걸음이 느려 터진 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내가 그걸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하고 싶은 것이 디자인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 from ‘Writer, Designer’ a.k.a. fantastic scar p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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