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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 May 19. 2021

슬럼프가 왔다면 컴퓨터를 켜세요

회사생활 슬럼프에 대처하는 중고신입의 자세

조직개편 2주전이었던가. 내가 기억하기로는 조만간 있을 큰 변화에 대해 소감을 나누는 부서별 CEO 미팅 자리였다.  


"우리 회사는 너무 빨리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적응하기 힘들어요."


그때 내가 그 말을 도대체 왜 했던 것인지 지금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마도 회사의 문화 중 하나인 오픈 커뮤니케이션의 뽕에 단단히 취해있었던 듯 하다.)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신입사원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든 이들을 싸하게 만들었던 눈치없던 그 한마디는 사장님의 신입을 향한 덕담과 조언으로 어영부영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때의 그 말을 후회하면서도 내심 틀린 말은 절대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실제로 입사한 후 모든 것이 빠르게 변했다. 명목상 존재하던 직급이 모두 사라졌고 '님'이라는 호칭만으로는 이 사람의 경력이 몇 년인지, 프로젝트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직급이 사원이든 과장이든 본인이 맡은 업무를 막힘없이 리드해나가자는 것이 조직개편의 핵심이었다. 코로나로 장기화된 재택근무에 회사에서는 파격적으로 사무실을 축소시키고 코로나 종식 후에도 재택근무를 이어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사실 누가봐도 혁신을 넘어 파격적인 조치였다. 회사가 직원을 믿지 않는 한 어려운 결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봐도 주니어인 나에게 이러한 변화들은 좋기도 하면서 제법 부담스러웠다. 지금까지 상명하복이 익숙한 회사생활을 해오다 PM으로서 스스로 업무를 리드해나가기가 익숙치 않았다. 특히 마케팅처럼 매출을 일으키는 부서에서 나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가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특히 새로운 상사와 새로운 업무들에 적응해나가며 겪는 시행착오가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고통스럽다.) 이제야 직장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업무를 받으며 또 버벅이고 흡수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존감이 깎였다. 누가 뭐래도 나는 슬럼프였다.


슬럼프가 왔다면, 컴퓨터를 켜세요


그러던 와중, 어제 일과 마무리 후 노트북을 켜 그동안의 업무 파일들을 정리했다. 파일 정리를 게을리 한 탓에 컴퓨터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기 때문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일회용 엑셀 데이터 파일을 모두 지웠다. 미뤄두었던 고객사 자료들을 공용 드라이브에 보기좋게 업데이트 해놓고 인터넷 임시 파일도 전부 삭제했더니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그러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기획한 파일을 발견했다.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사수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작업한 기획안이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업무를 알려주는 사수와의 채팅방 내 대화들을 캡쳐한 폴더도 있었다. 입사 후 교육 내용을 정리한 폴더도 눈에 띄었다. 이 회사에 스며들기 위해, 그리고 한 회사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직장인으로서 자리잡기 위해 나름 치열하게 노력했던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마음이 동했던 이유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불평불만이 가득했던 마음을 달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변화는 어렵다. 하지만 어려움을 알기만 할 뿐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내 노력들은 의미없이 사라질 것이다. 나는 극복하고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또 슬럼프가 찾아온다면,  주저없이 컴퓨터를 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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