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인 가구'라는 말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예전에는 1인 가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를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인식하는 비율이 77.7%라고 한다. 결혼 전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가구 형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혼자'라는 단어와 함께 검색하는 연관어도 부정어보다 긍정어가 늘었다.
나 역시 6년째 혼자 사는 중이다. 이 기간은 10년도 안된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혼자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난처하거나 손해 보는 경험보다도 자기 주도적이고 나를 확고하게 알아가기 좋은 경험이 많았던 듯하다. 특히 나는 부지런한 편이다. 요리부터 청소, 운동, 자기 계발 등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바쁘게 산다.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결핍이 없으니까 혼자 사는 게 재밌지."라고 말한다.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적합한 사람이다.
혼자 사는 것을 긍정하는 인식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역시 상존한다. 바로 돌봄 문제가 그렇다. 사람은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가, 돌봄이 필요한 존재로 이 세상을 떠난다. 돈이 많아도, 권력이나 명망 같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어도, 평소 건강을 자부하는 사람도, 사람이라면 돌봄을 필요로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럼에도 혼자 살다 보면 돌봄의 책무를 잊고 살기 쉽다.
함께 사는 강아지가 아프기 전까지 돌봄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늙어버린 강아지가 '쿠싱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매월 수십 만 원씩 납부하는 병원비도 돌봄의 책무 중에 하나였지만, 매일 2회씩 잊지 않고 먹여야 하는 약도, 아프기에 세심히 챙겨야 하는 감정 교류도 수반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를 돌보지 않는 시대다. 이기적인 시대에 다른 존재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억울하다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억울함이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이번 주에 대학 병원을 가야 한다고 했다. 목수로 오랫동안 일한 아버지가 공사장 소음으로 난청과 동시에 작은 소리를 잘 듣지 못해 검진이 필요했다. 나는 오후 휴가를 쓰고 병원으로 갔다. 최대한 빨리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사 시간에 늦어 의료진에게 자세히 설명도 듣지 못하고 아버지는 수면 마취 검사에 응해야 했다.
나는 수면 마취 중인 아버지를 기다리며 깨달았다. 더 이상은 아버지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닌, 보호자로서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책무를 가졌다. 이를 테면 휴가를 해외여행이나 개인적인 유희를 위해 쓰기보다도 언제 생길지 모르는 응급 상황을 위해 남겨야 한다. 강아지 병원비는 특히 비싸다. 갑작스레 큰 금액이 필요할 수가 있으니 비상금을 마련해야 한다. 내가 돌봐야 할 주변의 모든 존재에게 정서적 관계도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혼자 사는 것은 분명 장점이 많다. 그러나 긍정적 인식으로서 혼자 삶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돌봄 문제 해결이 불가피하다.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이나 돌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닌, 사회 시스템으로 책임질 필요도 있다. 혼자 사는 삶을 영리하다고 여기는 구조적 용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서비스나 제도를 활용하여 기본적 돌봄을 하되, 혼자 살아도 주변에 관계 맺는 사람과 서로 돌볼 수 있도록 하는 인식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단순하게 '1인 가구'가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한 삶의 방식을 반복하면 이기적 삶의 방식만을 학습할 것이다. 그것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러한 세상이라면 '혼자'라는 단어 연관어에 긍정어보다 부정어가 많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