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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은도 Jun 30. 2022

선배 나 좋아하는 거 아니죠

난 선배 안 좋아해요

선배의 방문 후 확실히 마음을 좀 열게 됐었나 보다. 선배와 나는 톡을 주고받는 횟수도 늘었고 밤이 되면 으레 통화를 하거나 늦게까지 톡을 주고받았다. 원래 그렇게 말이 끊이지 않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연락을 수년간 안한탓인지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락을 다시 시작하고 바로 나눈 대화들보다 한층 더 깊은 일들이 입으로 튀어나왔다. 선배는 전에는 내가 친동생 같다며 은근 잔소리를 조금은 했는데 세월이 사람을 좀 누그러뜨렸는지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잘 받아주는 바람에 내가 하리라고 생각지 못한 일들도 털어놨다. 


이혼이 내게 준 죄책감과 불안들, 내가 먼저 물꼬를 터서 그런지 선배도 만만치 않게 깊은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그중 한 가지는 선배의 전 여자 친구 이야기였다. 대학생 때 잠깐 사진을 보여주긴 했었다. "내 여자 친구 이쁘지?" 라며 잠깐 스치듯 말한 것이 전부였다. 그 후에 사회 나가 만나서는 잠깐 여자 친구가 아프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별로 길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묻지 않았었다. 그리고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여자 친구를 하늘나라로 보낸 것이 선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나마 자세한 이야기를 이제야 들을 수 있었다. 아킬레스건 같은 이야기라 차마 물어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제 스스로 발화하고 있었다. 숨죽여 들었다.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본능적 느낌이 있어서. 

선배는 그 상처가 아물 때까지 동굴 속에 들어가 혼자 상처를 핥는 시간들을 보내왔던 것 같다. 이후로 연애도 더 하지 않았다고 했다. 평소 선배를 향한 내 장난기가,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건 아니냐고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꿀꺽 삼켜버렸다. 


이렇게 선배의 아픈 이야기들을 나눠줘서 얼마나 기쁘고 위안이 됐는지. 알 수 없는 동지애가 피어올랐다. 삶이란 전장에서 피와 상처를 흘린 전우. 비록 각개전투였지만 붕대를 두른 모습은 엇비슷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속 깊이 나눈 이야기는 나중엔 불안의 소재로 둔갑해 버린다. 선배의 동굴의 나날들이 언제고 다시 시작될까, 걱정 많은 나는 그걸 나도 모르게 마음에 염려로.


하루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화장이 너무 잘 돼서 누구라도 보여주고 싶어서 선배한테 무턱대고 영상통화를 걸었다. 선배는 내 얼굴을 보곤 생각지도 못하게, "이쁘다."라는 직언을 해서 나를 당황시켰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쁘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자꾸 이쁘다고 하네. 대학생 땐 곧 죽어도 이쁘다고 한적 없는데.


내 머릿속에 경고등이 반짝였다. 이 사람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되는데. 

왜냐면 난 곧 죽어도 선배가 남자로 좋진 않았기에, 든든한 오빠에서 끝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선배 진짜 나 좋아하는 거 아니죠?"


"으이그, 아니야."


"휴 다행이다. 나 좋아하면 안 돼요. 난 선배 안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걱정돼서 의심이 들 때마다 혹시 나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난 선배에게 관심 없다고 웃으며 농담조의 경고를 계속 날렸다. 선배는 묘하게 아니라고 피해 갔지만 계속 너무 이상했다. 

계속 유혹당하는 기분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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