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수리해주는 남자
선배를 만나고 나서 집안의 각종 물건들이 약속이나 한 듯 하나 둘 고장 나기 시작했다. 전이라면 굉장히 스트레스받았을 일이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수리를 부탁하려면 몇 번이고 전화해야 하며 그마저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고 일 처리가 제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주방 싱크 위 서랍 한쪽이 떨어져도, 그리고 며칠 후 갑자기 싱크 수전에서 물이 새도 걱정이 안 되었다. 집주인 할머니에게 전화하는 대신 잠자코 있었다.
금요일 밤 일을 마치고 온 선배는 상황을 보더니 바로 드라이버를 꺼내 떨어져 내일 한쪽 서랍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서랍이 천천히 닫힐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있어서 수리 하기가 녹록지 않은지 선배 이마에는 진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며칠 전 내가 고치려 낑낑댔지만 실패했기에 선배가 어려워하는 것도 십분 이해됐다. 그래서 못 고쳐도 그러려니 해야지 싶었는데 놀랍게도 꽤 멀쩡하게 수리해냈다.
“와!! 대박!! 선배 진짜 대단해요! 와! 너무 고마워요!!”
선배는 땀을 닦으며 어느 부분을 조심해서 써야 하는지 설명해줬다.
줄줄 새는 수전도 보고는 이것저것 체크하더니 며칠 뒤 직접 맞는 수전을 사 와서 교체해 줬다. 이렇게 직접 고칠 수 있는 거구나 신기하기만 하고, 가만히 있어도 고장 난 곳이 고쳐지는 마법을 보자면 선배야 말로 수리남, 수리 잘하는 남자.
뭔가 작동하지 않거나 고장 나는 상황에 적잖이 스트레스받는 타입인데, 선배가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고, 자문을 구할 곳이 있다는 생각에 그런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게 줄어들었다. 비빌 언덕이 있고 그 언덕에 마음껏 내 등을 부대끼는 기분이었다.
그즈음 내 발목도 고장 나는 사고가 있었다. 본가에 내려갔다가 계단에서 어이없이 발을 헛디뎌 발목이 완전히 꺾였고, 인대가 찢어져 버렸는데 생각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느낌이 왔다. 통증도 통증이고 거동이 불편한 정도 하며, 이래 가지고 서울까지 어떻게 다시 가나 걱정했는데 선배에게 얘기하니 고맙게도 날 데려다주겠다며 본가로 오기로 했다.
“엄마 나 아는 선배가 데려다준다고 해서 걱정 안 해도 돼.”
“누군데 여기까지 데리러 온대?”
“그 요즘 연락한다는 그 애?”
“어. 선배 차 타고 가면 될 것 같아.”
“그래? 그럼 엄마가 잠깐 만나보자. 잠깐 인사만 할게.”
“뭐어?? 안돼에!! 절대 안 돼!”
“아니 엄마가 보면 알아. 엄마가 잠깐만 보면 어떤 사람인지 딱 알아. 인사만 한다니까.”
“절대, 절대로 안된다고!”
“알았어, 알았어. 그러면 여기서 창문으로 볼게.”
“어 절대로 나오 지마.”
이윽고 선배 차가 본가 집 앞에 당도했다. 엄마가 싸준 반찬을 들고나가는데, 엄마가 굳이 반찬 꾸러미 중 하나를 들더니 나를 앞질러 나가 버렸다. 난 발목이 불편해 엄마를 말릴 새도 없었다. 허둥지둥 나갔는데 엄마가 선배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고마워요. 이렇게 여기까지 오고. 덕분에 한 시름 덜었네.”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눈은 선배 얼굴에 고정돼 있었고 관상을 날카롭게 스캔 중이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진짜 엄마 못 말린다.
그렇게 당황한 선배와 나를 알차게 배웅하시고 들어가는 엄마를 확인하곤 선배의 표정을 살폈다.
“선배, 미안해요. 엄마한테 나오지 마시라고 했는데 궁금했는지 기어코 나오시네.”
“아니야. 부모님이 다 그렇지 뭐. 나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말했잖아 너네 부모님이 나보고 오라고 하면 난 간다고. 그리고 너 발목이 이래서 한동안 외출하기도 어려울 테니까 오늘 아예 장 봐서 가자.”
선배는 전에 내 냉장고를 채워주기 위해 갔던 큰 마트에 들러 이번엔 내 발목이 나을 동안 먹을 식량을 또 한가득 사 주었다.
발목을 다친 건 꽤 스트레스받고 암울한 일이었지만 선배가 있어서 힘든지 모르고 그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날 돌봐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가진 무기라도 되는 양, 든든한 마음으로 지내던 나날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선배가 왔을 때 집 근처 식당 정도는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돼서 같이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문득 결혼 전, 똑같이 발목을 삐어서 반깁스를 했던 때가 생각났다. 전 남편과 연애를 하던 시기였는데 회사 근처로 날 데리러 오기도 하고, 자취방 가는 길 언덕 오르기 힘들다고 날 업어주겠다며 호기롭게 날 업었다가 금세 지쳐 날 내려놓기도 했다. 내 다친 발을 씻겨 주기도 했으며, 물이랑 식사를 갖다 주며 내 병시중을 들어줬었다. 약간 슬프고 씁쓸한 기분이 몰려왔다. 그래서 선배에게 부탁했다.
“선배. 나 업어줘요.”
“뭐?”
“업어달라고요.”
“나 허리 나가.”
곤란해하면서도 선배는 곧 앉아서 등을 내밀었다.
선배가 일어서며 내가 번쩍 위로 떠올랐다.
“자 간다!”
선배는 빠른 걸음으로 목적한 식당으로 움직였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는데 아무래도 내가 무거워서였겠지. 역시나 선배는 끝까지 가지 못하고 헉헉거리며 다시 주저 않았다.
“고마워요 선배.”
난 그새 기분이 유쾌해져서 하하 웃고 있었다.
꽤나 추운 날이었는데도 선배의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고, 땀을 훔치곤 날 마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