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여행이라 칭할 순 없다. 난 출장을 왔고 ASD쇼에 참가하기 위해 LA에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15번 국도 위를 구르는 인피니티 SUV 안에 곱게 갇힌 상태였다.
하지만 이 출장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구체화시켜 줬다. 영화 속, 사진 속, 노래 속 장소들이 어렴풋한 상상도에서 실제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들로 변모했으니까. 마치 여행 같은 출장. 아마 나라면 절대 가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장소에 와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모하비 사막을 질주하고 있는 차 안에는 나와 팀장님, 그리고 괴물. 괴물?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장님은 괴물 같은 분이다. 폭주하는 감정의 기복이라던가, 직원들을 향한 신랄한 비난, 가끔은 욕설, 직원들을 숨 막히게 압박하는 기술 등 난 온갖 추문을 들어온 터였다. 그중엔 직접 목격한 바도 있다.
그리고 열렬한 박정희 지지자이자 문제적 사이트의 회원. 팀장님은 사장님과 아침마다 통화하며 시달리는 게 업무 중 하나였고 팀장님의 비유를 빌리자면 사장님은 정신병자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그런 폭력에서 한 발짝 빗겨있었다. 난 아주 가끔 사장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사장님은 거의 팔구십은 정중한 편이었다. 물론 그것은 각자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고, 팀장님은 사장님의 희로애락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항을 알고 대처해야 하는 배역을 맡고 있었다. 난 그 비극의 조연쯤 되었다.
아무튼, 내게는 그나마 정중한 면모를 보여줬던 괴물과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의 흔적이라곤 뭐딱지 만큼도 없는 그 광활한 사막을 달리는 것은 꾀나 기묘한 광경일 터였다.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 자부할 수 있다. 같은 회사에 몸담고 있다는 것 외에 대체 이 조합의 접점이란 무엇인가.
그래 사막으로 주의를 돌려보자.
사막은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영화에선 매끈하게 빠진 머슬카에 아마도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같은 곡이 배경에 흐르고 있었겠지만, 현실은 적막 그 자체였다. 마치 화이트 노이즈가 재생되는 듯 귀가 먹먹할 정도로. 당시 우리는 음악도 틀지 않았고 지평선 끝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결단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곤 알 수 없는 선인장들과 세이지브러쉬, 조슈아 트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이국적 광경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 거칠고 제멋대로인 황량함이 나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묘한 감상에 젖어들게 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활함. 어딜 가나 건물 내지는 산으로 싸인 풍경만 보다가 지속되는 끝 모를 지평선을 보게 되면 사람이 어딘가 이상해 지는 것도 맞을 것이다.
귀마저 먹먹하던 적막의 길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난 그만 슬픔에 빠져 버렸다. 이 넓은 땅에 아무런 생명의 기척이 없다니. 갑자기 이 땅이 너무 외롭게 느껴진다. 외로운 사막. 끝도 없이 넓고 외로운 땅.
그런데 그 순간, "이 사막이 이렇게 외로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나도 처음 이 사막 건널 땐 너무 외롭고 그랬는데 여기도 다 생명이 사는 땅이란 말이야. 밤에 보면 여기 쥐도 있고 도마뱀, 그리고 사막 토끼, 코요테도 있고 그래."
내가 너무 깊게 생각에 빠진 나머지 내 생각을 입으로 말해버린 걸까.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괴물은 내 생각을 훤히 들여다본 것 같았다. 괴물과 나는 사회적으로든 뭐로 보든 동질성이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난 가끔 무엇에 대한 감상을 떠올릴 때 괴물과 비슷한 감상을 떠올린 경우가 꽤 있는단 걸 느낀다. 예를 들면 이런 것도 있었다. 색이라는 게 사실 빛에 대한 반사의 정도일 뿐 색이란 실체는 사실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 그런 자잘한 예시에 이제 사막에 대해 감상을 하나 더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난 금세 제 기분을 회복했다. 밤이면 반짝이는 눈들로 가득 찰 사막을 생각하며 아까까지 슬펐던 내 감성이 이제 멋쩍게 느껴질 정도다.
적막을 달리고 달리다 만난 반가운 마을에서 먹었던 점심. 화장실 또한 반가웠다.
얼마 전 괴물은 날 자유롭게 놓아줬다. 퇴사한 지금 아직도 난 괴물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오늘은 이런 말을 했네, 어제는 저런 갑질을 했네 등등, 그를 괴물로 만들 괴담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난 적당히 맞장구를 치거나 어느 날은 정말 너무 했다며 흥분하며 적극적 동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서 난 오늘도 변함없이 괴물을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 날 발견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