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

by 임제이


커다란 독수리가 황혼의 껍질을 가르며 날아간다. 그 큰 날개는 어떤 욕망도 없이 공기를 미끄러진다. 나는 그 등을 올라탄다. 나풀거리는 옷이 허공에서 흔들리고, 몸은 깃털 처럼 가볍다. 이내 독수리의 등 위에서 나는 갑자기 내 무게를 생각한다. 묵직함이 등을 눌러 공기가 단단해지고 독수리는 나를 다시 땅으로 내려놓는다. 내가 정말 그 위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땅으로 내려와 묵직한 돌덩어리 하나를 배에 품고 움크리고 앉았다. 일어설 마음이 나지 않는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며 묵직한 배를 말랑말랑하게 녹인다. 돌은 언덕이 되고 언덕위에 풀잎 들이 언덕의 곡선을 타고 자란다. 갓 피어난 꽃들. 나는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방이 여러개다. 방이 여러 개다. 한 방은 환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래된 장난감들의 그림자가 바닥을 따라 늘어져 있고 타자기는 입을 다문채 잠들어 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마법의 책이 열린 채로 날 기다리고 있다. 책에 가까워지는 순간, 나는 그 책의 숨결을 타고 창공으로 떠오른다. 별빛이 가벼운 진동 처럼 몸을 스친다. 부드러운 바람과 함께 난 방향을 잃어도 불안하지 않다. 난 날고 있다. 다시 돌아 온 곳에 작은 불씨가 있다. 꺼질 듯 말 듯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작은 불씨. 그 곁으로 가 작은 숨을 불어 넣는다. 불은 이내 자라나 따스하게 내 팔을 녹인다. 따스하고 기분 좋은 물 속에 앉았다. 딸의 보드라운 피부가 내 몸에 감긴다. 남편은 유유히 앉아 있다. 우리는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그고 한 때를 보낸다. 나는 더 깊이 내려가 보자고 말하지만 딸과 남편은 그러고 싶지 않닸고 한다. 나는 혼자 깊숙이 다이빙 한다. 곡선을 그리며 깊이 더 깊이 수영한다. 물속의 생물들, 그 아래는 조용하고 그 조용함과 신비로움은 금세 외로움이 된다. 나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 딸과 남편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차에 올라 눈이 양쪽에 수북히 쌓인 도로를 질주한다. 집으로 향했지만 어느 순간 옆으로 꺾인 길, 그곳에 마을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럭저럭 살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자갈밭을 걷는 날들이 이어지고, 불편하고 지루하다. 풍경은 변하지 않고, 작은 돌처럼 굴러다니는 지루함. 그래도 어쩌면, 더 좋은 음악이 흐른다면 이 길 끝에서 다정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지루함에 대해 잘 생각해 보세요. 보통 이런 문장들. 자갈 밭을 걷는데 불편해서 지루하다는 인과는 어색하죠. 그리고 지루하다는 말을 많이 쓰셨어요. 지루함이 실제로 지루한 것인지요"


GIM훈련생 태준은 정은에게 말했다.

배가 고팠다. 정은은 서둘러 음악치료센터를 나왔다.

복도 센서 등이 한 번 더 켜졌다 꺼지며 등을 밀어냈다.

문이 닫히는 찰나, 방금 전 태준의 말이 다시 꽂혔다.


"지루함이 실제로 지루한 것인지요."


지루한 건 지금 배 속인지, 인생인, 심상일지 애매했다.

어쨌든 가장 시끄럽게 항의하고 있는건 위장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말고, 정은은 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계단씩 내려갈 때마다 방금 떠올렸던 이미지들이 계단 모서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소화가 안 된 건 아닐까."


주차장 입구에서 차를 빼면서 지나가는 차와 부딪힐뻔했다. GIM을 받고 바로 운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들은 후였다. 멍하게 운전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먹을 수 있는 것은 제다 입에 넣어 숨도 쉬지 않고 먹었다.

금세 부풀어진 배가 조롱하는 듯 하다.

정은은 휴대폰을 들었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배 위로 늘어진 티셔츠를 한 손으로 쥐어 잡아 당기고, 다른 손가락으로는 검색창에 'GPT'를 찍어 눌렀다.


' 제 GIM 심상을 분석해주세요'


정은은 아까 세션에서 말했던 심상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황혼 속 독수리, 배에 품은 돌덩이, 동굴, 마법의 책, 불씨, 따뜻한 물, 가족, 자갈밭,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함.

1. 구조에 대한 관찰

당신의 심상은 "상승-하강-상승-하강"의 파동 구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 이건 당연한거지. 음악이 그랬어. '

... 이는 정체가 아니라, 움직이되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에 가깝습니다.

2. 상징으로 본 자아- 경험

독수리: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상화된 자아

배 속 돌덩이: 책임감, 죄책감 혹은 검열된 감정, 소화되지 않은 채 남은 무게

.......

' 나는 더 깊이. 더 멀리 가고 싶은데, 가족은 원치 않는다. 눈 쌓인 도로와 자갈 밭은 '그럭 저럭'이라기 보다 실제로는 이미 선택이 끝난 뒤의 삶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은은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내려 읽었다.

독수리의 비상, 마법의책, 작은 불씨, 깊은 다이빙, 이 모든 것은 사실 "강렬한 긴장"과 "변형 욕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과를 "지루함"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 강렬함을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기 위해 감정을 낮추어 부르는 방어적 명명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루하다"= "위험할 만큼 강렬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안전하게 낮춰 부르는 말" 이라는 가설이 가능합니다.


정은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위험할 만큼 강렬한 감정'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보통 불편하면 긴장하거나 피하고 싶어하지, 지루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 모순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1. 실제로는 '분노, 실망, 후회, 답답함, 질투, 수치심' 등 다양한 감정이 있으나, 그것을 지루함이라 표현하낟.

2. 지루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거나 선택해야 할 의무에서 한 발짝 물러날 수 있따. 판단을 유예시키는 감정.

3. 따라서 자갈밭은 단순한 지루함의 상징이라기보다 "결정되지 않은 삶의 상태" 혹은 "이미 선택했지만 인정하기 싫은 선택 이후의 풍경"


정은은 셋째 손가락으로 이마를 누르며 화면을 바라봤다.


오늘 심상이 말해주는 것: 나는 훨씬 더 멀리 날 수 있고 훨씬 더 깊이 잠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날고 잠수했을 때 돌아올 장소와 사람들이 사라질까 두렵다. 그래서 실제로 느끼는 감정의 강도를 '지루함'이라고 낮춰 부르며 현재의 구조를 유지한다. 동시에 작고 꺼질 듯한 불씩(욕망, 창조성, 자기만의 길)에 여전히 숨을 불어넣고 있다. 즉, 완전히 포기하지도, 완전히 실행하지도 않은 중간 지대에 머무르는 중이다.


문단 아래 마지막 단락이 덧붙어 있었다.


치환

나는 지금 지루하다 -> 나는 지금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 생활은 지루하다-> 이 생활에 대해 나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이 관계가 지루하다 -> 이 관계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직 말해지지 않았다.

당신이 원하는 경우, 다음 단계로는

돌덩이가 언덕이 된 순간 이후, 자갈밭이 다른 지형으로 변형되는 심상을 의도적으로 확장해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정은은 한동안 아무 글도 입력하지 않았다.

창문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방 안에는 먹을 것을 쓸어 넣은 뒤에 남는 묘한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배는 불편하게 빵빵했지만, 어디선가 아주 작게 허기가 다시 일어났다.


"지루하다고 쓴 부분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삶... 이라고 바꿔 써볼께요. 그 자갈들을 하나씩 들어 올리는 이야기를, 다음 장으로 써보겠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정은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오늘 GIM은 결국, 독수리도, 돌덩이도, 자갈밭도, 결국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나는 어디까지 가볼 생각이냐고





GIM(Guided Imagery and Music)은 특정 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을 치료자와 함께 탁색하는 심상 음악치료 기법이다. 구조화된 이완과 치료자의 언어적 안내 속에서 특정음악(주로 서사적 구조가 뚜렷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떠오르는 이미지와 감정, 기억을 지속적을 서술하게 하는 정신치료적 음악치료 방법이다. 훈려관정에서는 내담자의 심상 내용을 단순히 '꿈 해석'처럼 읽어내기보다는, 음악 속에서 나타나는 장면. 상징.정서의 흐름을 시간축 위에서 따라가며 현재 삶의 갈등, 방어, 욕구, 자원 등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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