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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 친구 지혜 Jan 17. 2021

약을 먹느냐 안 먹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형벌

대학생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지막 학기가 찾아왔을 무렵, 취업에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평범한 학점을 이미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학기 시험도 하던 대로 준비하면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다. 학교를 좀 오래 다닌 편이라 주변에 동기들은 어느덧 졸업을 했고, 학교생활에서 그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동아리 후배들뿐이었다.


“동아리방에서 시험 준비할 거야? 나도 그러려고!” 


친한 동아리 후배가 동아리방에서 시험 준비를 할 거라는 얘길 듣고 반가웠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공부하기엔 동아리방이 제격이었지만, 바닥에 난방이 들어오지 않는 매우 차디찬 옥탑 구조였다. 내부에 라디에이터가 있었지만 제멋대로 작동하는 바람에 난로를 구비해둬야 했다. 아무튼 이런 동아리방에 나 홀로 있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해지는 소식이었다.


그 당시에 나는 집에서 짐을 싸 들고 와서 동아리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동아리방에 놓여있는 빈 백이 편안한 침대였고, 새벽에 전기 과부하로 전원이 나간 난방 기구의 전원을 만지작거리던 것도 나만의 로망이었다. 동아리방 창문으로 햇빛이 조금이라도 문을 두드리면 얼른 일어나서 누가 볼세라 샤워실로 향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아리방에 머물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동아리원들이 동아리방에 들어올 때면 마치 내 집에 손님이 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시험이 하루 이틀 앞으로 남은 밤이었다. 후배는 책상에 앉고, 나는 빈 백 위에 반쯤 누워서 외워야 하는 전공이론들을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우고 있는 듯했다. 희한하게 시험 볼 내용을 정리한 종이를 들고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시계가 1시간씩 흘러갔다. 열심히 공부하는 후배 앞에서 혹여나 코라도 곯은 건 아닐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변명을 하자면, 이 모든 게 약 때문이었다. 시험을 준비하기 며칠 전에 처음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을 처방받았다. 하얀색 약 하나를 아침, 저녁으로 먹었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그때는 무슨 약인지 병원에서 설명도 듣지 못했고, 이게 무슨 약인지 찾아본다고 해서 정보가 제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빨리 내 상황이 괜찮아지길 바랄 수밖에. 어쩐지 그 약이 문제였다. 


먹기만 하면 잠이 쏟아졌다. 눈앞이 흐리멍덩해지면서 나는 더 이상 눈을 감는 게 아니라 이미 감긴 눈을 허벅지를 꼬집고 뺨을 때려가며 떠야 했다. 하필이면 그게 시험 기간이라니. 내 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놓여있는 셈이었다. 약을 포기하고 학점을 얻거나 약을 먹고 정신건강을 챙겨야 했다. 


이분법적인 선택지에서 영화 속 주인공은 둘 중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제3의 길을 헤쳐나가곤 한다. 내게 가장 최고의 선택은 약도 먹고 공부도 하는 거였지만, 실상 나는 약도 포기하고 시험 결과도 그럭저럭 끝내놓고 학기를 마무리했다.


나를 포함해서 기분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곤 한다. 무기력하고, 판단할 힘이 없어서 결국 판단을 미뤄버리고는 ‘선택하지 않은’ 선택에 대한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고는 내내 그 결정에 후회를 한다. 이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형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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