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영화 세 번째 시리즈: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공간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색다른 장소로 문득 떠나고 싶어진다. 나도 이맘때면 키다리 친구와 함께 스키장에 가곤 했다. 어쭙잖은 실력으로 스노보드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오면 마음만큼은 이미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기분이다. 속도감과 쾌감에 중독된 나에게 그깟 엉덩방아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 짧은 추억은 따듯한 어묵 국물처럼 겨울을 날 온기를 내게 전해줬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더 춥다. 코로나로 인해 온종일 집안 신세임에도 영하 20도를 웃도는 차가운 공기가 두꺼운 솜이불을 뚫고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서포터와 함께 협곡으로, 프라이와 함께 고대 그리스로 떠나보지만, 육체를 동반하지 않은 여행으로는 역시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언제쯤이면 코로나와의 질긴 인연을 끊어낼 수 있을까. 하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옆에는 귤을 가득 쌓아둔 채 <윤희에게> 열차에 몸을 싣는다.
영화는 달리는 기차의 창문 밖 풍경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누구의 시선인지, 어디로 가는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시작부터 ‘떠남’을 강조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딸 새봄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는 윤희의 시선임을 알게 된다. 여행은 윤희에게 도착한 편지를 몰래 읽은 새봄의 부탁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둘은 편지의 발신지이자, 윤희의 첫사랑이 살고 있는 일본으로 떠난다. 이들의 여행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여행 중 <델마와 루이스>나 <타이타닉>처럼 인생을 통째로 뒤바꿀 거대한 사건을 만나지도 않는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새봄의 도움으로 과거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윤희와 준이 만나기는 하지만, 이들의 만남은 영화 자체를 지탱하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둘을 이어주려고 첩보 활동을 벌이는 새봄의 관점이라면 모를까, 준을 몰래 훔쳐본 뒤 눈물 흘린 일 외에는 그다지 여행 중 누린 것이 없는 윤희의 서사는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내지 못한다. 한 마디로 여행을 다룬 영화치고는 여행 자체가 주는 재미 요소나 개연성이 뛰어나지 않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은 윤희에게 소중하다. 무료함으로 가득한 이 여행이 그녀의 삶을 전복시킨다. 그야말로 윤희의 삶을 180도 바꾸어 놓는 순간이다.
이전까지 윤희의 삶을 되돌아보자. 그녀를 수식하는 단어는 희생, 가족, 외로움, 일상, 억압 등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이다. 원치 않는 삶을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강요받은 그녀는 기성세대 여성의 초상이다. 오빠가 소개해준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고, 오빠가 추천해준 직장에서 근무했다. 당시 많은 여성이 그러했듯, 희생과 봉사의 아이콘이 되어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채,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기 바빴다. 결정적으로 과거 그녀는 가족의 강요로 인해 사랑하던 준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도 겪었다. 윤희의 삶에는 어느 하나도 그녀의 의지로 세운 것이 없다. 그녀에게 산다는 것은 그저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번 여행은 윤희의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이다. 비록 새봄의 요구긴 하였어도, 윤희는 ‘스스로 떠남’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휴가를 가면 자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조리사의 말에 윤희는 덜컥 퇴사를 결정한다. 카메라는 회사를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핸드헬드로 쫓아가며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다시 카메라가 윤희의 정면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다. 그 순간, 그녀의 뒤로는 떠남의 메타포 기차가 지나간다.
새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와 가족에 얽매여온 윤희와 다르게 새봄은 새로운 세대의 자유로운 인물이다. 엄마와 함께 온 일본 여행에 몰래 남자친구를 데려오는 대범함도 보여준다. 그녀가 가진 자유로움은 윤희의 ‘떠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윤희에게 도착한 편지를 몰래 읽은 새봄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편지의 발신지이자, 윤희의 첫사랑이 사는 일본으로 졸업 기념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곳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며칠간 첩보 작전을 벌인 끝에 윤희와 준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한다. 그동안 겨울처럼 꽁꽁 얼어있던 윤희의 마음에 자신의 이름처럼 따뜻한 새 봄을 전해주는 소중한 인물이다. 새봄 이전에는 준의 고모가 있다. 그녀는 영화 시작과 함께 준이 적어놓고 보내기를 매번 망설이던 편지를 준 몰래 부친다. 그녀는 기성세대의 인물이지만 윤희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윤희의 오빠이자, 새봄의 삼촌과는 전혀 다르다. 그녀의 따듯한 행동과 말투는 ‘기성세대는 전부 꼰대’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새봄과 준의 고모. 이 인물들이 한데 어울려 윤희의 떠남을 응원한다.
‘떠남’은 또 다른 ‘떠남’을 불러온다. 일본 여행 이후, 윤희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오빠에게서, 원하지 않던 직장에서, 그런 구속이 담겨있는 과거의 공간에서 떠나기로 결심한다. 차를 타고 떠나는 그녀의 모습과 준에게 쓴 답장을 읽는 나레이션이 오버랩되는데, 그 대사에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것에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그녀는 트럭이 떠난 뒤 조명되는 버려진 과거의 짐들 사이에 자신의 암울했던 과거를 남겨두고 왔다. 윤희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영화가 끝날 무렵 카페에 앉아 이력서를 적던 윤희는 새봄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과거와의 대비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영화 초반 새봄은 윤희에게 무엇 때문에 사냐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아직 자신을 위해 사는 방법을 모르던 윤희는 자식(타인) 때문에 산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한다. 타인이 정해놓은 박자에 맞추어 사는 그녀의 삶은 지루했고,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웠다. 과거에는 새봄의 질문에도 시큰둥한 반응의 그녀였으나, 이제는 새봄이 묻기도 전에 먼저 이야기한다. 그녀의 꿈은 돈을 벌어 조그만 식당을 차리는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꿈을 원동력 삼아 살아간다.
다짐과는 다르게 과거와의 이별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여태 묶여있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자니 근육이 없어 말썽이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온 식당 앞에서도 윤희는 여전히 망설인다. 문은 이미 그녀를 위해 열려있지만, 윤희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 순간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혹시나 여기서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불안이 윤희의 영혼을 잠식한다. 거절과 실패가 익숙지 않은 까닭이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새봄의 한 마디가 그녀를 불안에서 건져낸다. “엄마, 긴장돼?” 그녀의 뒤로 더는 그녀의 등을 떠밀 사람이 없음을 깨닫는다. 대신 그녀의 꿈을 순수히 응원하는 딸 새봄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다. 긴장되는 순간이지만 윤희는 다시 웃음을 되찾는다. 여전히 낯설고 두렵지만, 이제는 암울했던 자신의 과거에 완전한 이별을 고할 시간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윤희는 온 힘을 다해 힘차게 한 발 내딛는다. 화면은 먼저 블랙 아웃되지만, 우리는 행복한 윤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