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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지 Dec 11. 2019

여자 서른, 백수로 살아가기

서른이면 뭐라도 돼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90년생. 백마의 해에 태어났다.

올해로 서른이다. 그리고 약 20여 일 후, 서른 하나를 맞는다. 본격 삼십 대에 접어드는 거다.



시청률 50%를 넘겼던 인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사진=MBC 공식홈페이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가 유행했다. 서른이 된, 비정규직 파티시에 주인공 김삼순이 세 살 연하 현진헌을 만나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당시 여자 나이 서른이란 것은 어떤 분수령처럼 느껴졌다. 일이든, 사랑이든, 삶의 방향성이든 하나라도 제대로 갖고 있어야만 하는 기준. 


극 중 삼순이는 빵과 초콜릿을 만드는 파티시에다. 사진=MBC 공식홈페이지


삼순이는 어느 하나 완벽히 이루지 못했지만, 동시에 아주 못난 사람도 아니었다. 파티시에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바람이 났지만, 잘생기고 부유한 연하 남자 친구를 얻었다. 미인이라 불리는 기준에 적합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웠다. 열여섯의 나는 삼순이를 보며 나의 30대를 막연히 그려보았다. 장밋빛이었다. 적어도 밥벌이는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재, 퇴사 후 1년 2개월 정도를 백수로 지낸다. 짬이 나면 아이들을 가르친다. 알바 수준이라 생활이 윤택하진 않다. 근근이 살아간다. 


나의 20대는 최선을 향해 달려온 시간이었다. 방송사 PD라는 꿈을 20대 중반에 꾸게 됐다.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 다큐멘터리가 좋았고, 그걸 다루는 게 방송국 PD라는 걸 알게 되면 서다. 이후 삶의 대부분은 방송사 공채 준비로 보냈다. 중간에 1년 반 정도의 회사 생활이 있었다. 하지만 꿈에 미련이 남아 공채에 몰입하고자 직장을 그만두었다. 모은 돈을 털어 관련 수업을 듣고 열심히 글을 썼다. (PD 공채 시험엔 논술이나 작문과 같은 글쓰기 평가가 필수다) 1년 동안 쓴 글이 거의 100편에 달한다. 양적 성장이 분명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서른의 끝자락에 와있다.


정신차려보니 서른이다. 


슬슬 걱정이 밀려온다.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PD가 안되면 어떡하지?' 류의 근심이 날 괴롭혔다면, 이제는 '어떻게 먹고살지?'와 같은 걱정이 잠을 못 이루게 한다. 꿈에 온 힘을 쏟은 20대엔 느껴보지 않은 감정이다. 여자 나이 서른을 넘겨 구체적인 밥벌이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꿈보다 중요해져 버린 거다. 이 감정은 막연히 잘 될 거란 낙관도, 내 꿈에 대한 좌절도 아니다. 나이가 들어 분수령에 도달한 한 여성이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느낀 서늘함이다. 


나는 여성주의에 관심이 많다. 이 학문이 지향하는 바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여성이 성별로 받는 차별을 줄이자는 거다. 예컨대 서른의 남성과 여성이 같은 스펙과 능력치를 갖고 있다면 임금, 사회적 대우를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지향한다. 나 역시 나이와 성별이 사람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고 믿는다. '여자 서른'이란 분수령 자체가 허구이며, 사회가 만든 차별의 프레임이다. 



그래서 괜찮았다. '30살에 꿈을 좇겠다는 데, 뭐?' 내가 서른을 넘긴 게 문제가 아니라, 여자 서른을 특이하게 여기는 사회가 문제라는 확신이 있었다. 확신은 냉정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내가 그토록 여자에게 나이가 중요치 않다고 믿어온 데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이와 성별에 매우 민감하단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서다. 서른 넘은 여성을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평가하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도 알고 있다. 


막상 서른이 돼보니, 확신보다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제 꿈만 좇기가 두렵다. 최선이 아닌 최악을 막는 방법에 몰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잠시 PD의 꿈을 미루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손을 뻗고 있다. 작은 기업부터 프리랜서까지 내가 닿을 수 있는 것들을 알아보고 부딪치는 중이다. 불안하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막막하다. 그럴 때마다 크게 쉼호흡을 한다. 숨을 쉬고 내뱉을 때만큼은 불안을 떨칠 수 있다. 


요가와 명상의 핵심은 현재 숨 쉬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와 비슷한 또래, 혹은 같은 나이의 여성이 있다면, 아주 작은 연대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결국 이 글은 '너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다'란 메시지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미천한 나의 인생사를 꺼내보았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꿈을 꾸고 있는가. 혹은 꿈과 이별했는가. 꿈이 없었던가. 혹은 꿈을 찾고 싶은가. 궁금하다. 


이 말을 하고 싶다.

여기 있을 테니, 당신도 어딘가에 잘 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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