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꼬마 예술가들
피켓팅을 뚫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왔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인왕제색도, 각종 불상, 십장생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설명과 함께 관람하다 보면, 괜히 눈길이 한 번 더 간다. 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건 그 작품들을 둘러싼 공간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 가면 제일 먼저 두 건물 사이에 자리한 계단, 계단 위의 하늘이이 보인다. 그 계단 위로 오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풍경이다. 오늘 날씨는 입추에 걸맞게 그간의 폭염이 무색해질 만큼 충분히 선선했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그 공간에서 찬찬히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저 멀리 남산과 N 타워, 북한산이 어우러져 있고 당장 코 앞에는 용산기지의 녹지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늘을 비추던 연못, 그리고 분홍색 배롱나무가 피어있던 광경이 관람 전부터 내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박물관에 입장 후 관람실까지 걸어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이유를 잘 알 수 없다가 안에 자리한 커다란 공간 때문임을 알았다. 2층에 올라 이렇게 가운데가 뻥 뚫린 중정을 내려다보면, 아래의 관람객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고, 맞은편까지도 한눈에 들어온다. 또 천장은 유리로 돼 있어 개방감을 준다. 실내에 들어왔지만 아직도 밖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렇게 기분 좋게 관람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차를 놓고 이촌 시장 부근으로 걸어내려 가는 길에 나는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큰 광장이 존재했다니! 나는 나가지만 어떤 가족들은 들어오며 한갓지게 오갈 수 있다니! 거기다가 정자까지 있는 연못을 또 만나게 되면 갑자기 너무 아깝고 나의 대학생 시절을 후회하고 만다. 서울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대학교에서 지하철로 딱 세 정거장밖에 안되는데 왜 이제 안 걸까 ㅠㅠ
그동안 미술관 파였던 나는 해외여행을 가도 박물관은 내 스타일이 아니지 하면서 과감히 건너뛰곤 했다. 이것은 나의 속단이고 편견이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간 박물관이었지만 국립이라는 규모에 걸맞게 공간감과 깊은 인상을 선물해줬다.
집에 돌아와도 이 건축물이 왜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가에 대해 계속 떠올랐다. 처음에는 박물관 내부의 모습이 오르세 박물관과 비슷해 내가 코로나로 여행을 오래 못 간 탓에 여행에 대한 향수였나 추측했다. 그리고는 '국립중앙박물관 건축' 키워드로 검색해 박물관에 대해 알아갔다. 건축가 선정 스토리부터 내부에 사용한 돌의 특징과 조명, 천장 유리까지 와의 조화, 그리고 내가 느낀 것과 반대로 도보로 도착해 입장할 때 느낄 수 있는 연못, 광장, 건축물이 이루는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게 됐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을 수록 대학생 때, 건축기행 수업을 들은 생각이 났다. 대학생 때를 르네상스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교양을 좋아해 시간표에 가득 채우곤 했는데 당연히 건축 수업도 들었다. 그 당시 프린트 물에 열심히 빈칸을 채우며 필기하며 꽤나 좋아했던 과목이다. 그때 채웠던 빈칸들은 다시 시간이 지나면서 날아갔지만 마음 한 구석에 인상 깊은 이야기들도 몇몇 남아있었다.
오늘 나는 도저히 내가 검색으로 찾아낼 수 없는 그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 한 건물이 커다란 광장을 만들었고, 면적에 의한 기압 차이로 생기는 빌딩풍에 대한 해결 방안으로 유리벽을 세웠다는 내용을 기억한다. 아무리 검색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아마 국립중앙박물관 양 건물 사이에 계단으로 자리한 그 공간 때문에 이 기억이 떠오른 듯하다.
이렇게 박물관이 계속 떠오르고 인상 깊게 느낀 것은 그 8년 전에 들었던 그 자투리 기억들 덕분이다. 나는 이걸 씨앗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마음의 땅에 안착해있었지만 오래도록 싹을 피우지 못했다. 그 사이의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했을 테고, 그것들이 내 마음을 비옥하게도 가물게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습도, 온도, 빛 모든 게 맞아떨어진 어느 날, 그리고 바로 오늘 싹을 틔운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어떤 씨앗인지 선명히 기억한다. 5년 전, 나의 회사 동기 언니가 이런 플랫폼이 있다며 글을 써보는거 어떠냐며 추천해줬던 어플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되면 좋겠다 생각하며 넘어갔는데 이렇게 나는 오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다가 글까지 쓰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각을 견지하고 관심을 가지며 살아간다는 것, 그건 분명 어디선가 뿌려진 작은 씨앗 덕분일 것이다.
그게 또 언제 어떤 싹으로 피어날지 몰라 나는 앞으로의 나날을 더 기대하고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