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나는 엄마와 주말을 보내본 기억이 없다.
웨딩드레스가게를 하셨던 엄마는 늘 바빴고
예식이 있는 주말이면 더 바빴다.
아빠는 선생님이셨는데
나와 남동생에게는 어쩌면 아빠가 엄마였다.
아빠는 자상하신 분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면 일찌감치 나와 남동생을 씻겨
마가린에 간장, 계란 프라이로 밥을 먹이고
아빠의 식단 50프로가 이것 ㅋ)
, 우리를 데리고 나가셨다.
가는 곳은 늘 비슷했다.
집에서 가까운 창경원, 사직공원, 과학관...처럼
입장료가 저렴하거나 무료라
아이들이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곳들...
하지만 자주 가다 보니 점점 심드렁해졌다.
창경원의 홍학떼는 볼때마다 징그러웠고;
과학관에서 가장 좋아했던
암스트롱이 달에서 가져왔다는
투명한 유리공 안에 박힌 밤톨만 한 운석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심심해진 나는 괜히 남동생 하고
티격태격 실랑이를 벌였다..
그럴 때면 아빠는 미아리 고개에 있는
대지극장이란 곳에 버스를 태워
우리를 데리고 가셨다.
나와 동생은 극장 이름이
돼지극장인 줄 알고 깔깔거렸다.
나중에 보니 대지 극장이었다...ㅎ
*이 사진은 60-70 년도 쯤 대지 극장이다.
내가 갔던 80년대는 외관이
어린이 기준 나름 웅장했다 ㅋ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극장 입구까지는
기다란 시멘트 담장이 선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데
담장 벽을 따라
하춘화 리사이틀이나
여자 프로레슬링 타이틀 매치,
성룡이 나오는 무술영화...
같은 알록달록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신이 난 나는 그 길을 늘 폴짝폴짝 뛰면서
그 포스터들의 제목을 크게 읽곤 했다.
동시상영관의 대기실은 늘 어두웠고
그만큼이나 어두운 낯빛의 남자들로 그득했다.
아빠와 비슷한 나이 든 남자들은 별로 없었고
장발에 나팔바지와 티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추레한 차림에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들은 늘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극장 안은 연기가 자욱했다.
극장 안에 어린이는
나와 내 동생밖에 없을 때가 많았다.
대기실 가운데 화장실로 가는
통로 입구에 매점이 있었다.
컴컴한 극장 안에
홀로 눈부신 형광등 빛을 내뿜던 매점은
어린 내 눈엔 꼭 알리바바의 보물 동굴처럼 보였다.
온갖 군것질거리가 주렁주렁 열려 있던 매점.
나는 늘 그 앞으로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한평 남짓한 공간의 선반 위엔
티나 크래커, 땅콩 그래, 맛동산 같은
익숙한 과자는 물론
듣도 보도 못한 알록달록한 과자들로 빼곡했다.
매점 언니가 석쇠에 오징어를 끼워
난로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나는 선망의 눈길로 쳐다보곤 했다.
‘저 언니는 학교도 안 가고 저렇게
맛있는 거 많은 매점 에서 일하니까 정말 좋겠다;;‘
오징어 타는 냄새와
화장실에서 풍겨오는 지린내와 나프탈렌 냄새,
대기실의 남자들이 피워대는 독한 담배냄새.
내게 그 고소하고 퀴퀴하며 축축한 냄새는
동시상영관 그 자체였다.
문 밖 바깥세상과 완전히 다른 신기한 세상의 냄새
아빠가 먹을 걸 고르라고 하면
나는 과자가 아니라
꼭 부라보콘만 샀다.
쭈쭈바나 아맛나와는 다르게
평소엔 잘 먹을 수 없는
비싼 아이스크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ㅎㅎ
남동생은 보름달 빵과 딸기우유를 샀다.
아빠는 나와 동생을 늘 앞자리에 앉혔다.
영화를 보려면 고개가 좀 아팠지만
뒤로 갈수록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은 심지어 영화가 시작돼도
줄곧 담배를 피워댔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브라보콘은 녹아 줄줄 흘러 내렸고
동생의 빵을 뺏어먹다 묻은
빵부스러기와 뒤섞여 손은 온통 끈적거렸지만
씻으러 나갈 엄두가 안나 그냥 참았다. ㅜ
대지 극장에서 나는 많은 영화를 봤다.
메인 영화는 ㅎㅎ
주로 쇼브라더스의 무협물들,
성룡이 한국에서 찍은 무협영화들이었고.
두 번째 영화는
한국 b급 멜로 영화가 주류였는데
어린이관람불가가 많아서 거의 못봤다 ㅋ
가장 기억나는 영화는 소권괴초이다.
화면에 성룡이 나왔다.
영화 속 성룡은 극장 안의 남자들처럼 가난해 보였고 영양상태가 불량해 보였다.
남자들과 다른 게 있다면
성룡은 정말 잘 웃었다는 거였다.
심지어 혼나도 웃고 맞아도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는 남자 어른을 본 적이
좀처럼 없던 나는 성룡하고 친해지고 싶었다.
영화를 보다 보면 화면 위로 비가 내리곤 했다.
소리와 동작이 안 맞을 때도 많았고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뜬금없이 귀청을 찢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는 이는 없었다.
남자들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수시로 바깥을 드나들었고,
가끔 시비가 붙어 큰 소리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성룡이 싸우거나 웃기는 장면에서는
모두 귀신같이 집중했고 분노하고 깔깔거렸다.
악당은 무섭게 성룡을 공격했다.
성룡은 공중으로 날아가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룡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이제 그만 도망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룡은 웃었다. 그리고 다시 싸웠다.
계속 공격하더니 결국 악당을 죽였다.
나는 곧 성룡이 대단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장군이나 부자….뭐 그런 …
누구나 떠받드는 사람말이다.
하지만 성룡은 여전히 누더기 차림이었고
잘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다 부서진 나무 수레에
부상을 입은 사부까지 태우고
정처없는 방랑길을 떠나며
뭐가 그리 좋은지
또 막 웃는 성룡의 마지막 엔딩
실망한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상했다. 아니 부당했다.
불이 켜졌고 남자들은 난리라도 난 듯
우르르 출입문으로 몰려들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한 나는
한 손으론 남동생의 손을 꽉 잡고
한 손으론 아빠의 점퍼자락을 붙잡은 채
엉금엉금 열린 문 사이로 비치는 빛을 향해 나아갔다.
문득 뒤 돌아본 불 꺼진 극장안의 까만 어둠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품은 채
저 혼자 남겨진 것처럼
음울해보였다.
군사독재의 반토막 저개발국…
일나간 아내 대신
어린 남매를 데리고
동시상영관으로 찾아든 중년의 사내와
성룡의 과장된 웃음으로
일상적인 엄마의 부재를 잠시나마
잊은 여자애가 움켜쥔 동생의 손,
녹은 아이스크림과 빵부스러기로 찐득이던 그 감각....
처절한 싸움 끝에 이렇다 할 이득도 없이
거지꼴로 방랑길을 나서면서도
사팔뜨기 눈을 해 보이며 헤벌죽 웃던 성룡...
그 모든 풍경은 애초부터 닮아있었다..
억압의 공기로 질식할 것 같던 시대
극장으로 피신한 ? ; 그 모든 사람들은..
부조리하고 비루한 삶을 향해
바보같은 웃음으로 응수하던
성룡을 닮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세월은 너무도 흘렀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동시상영관도 ,
남루한 복장의 장발 남자들도...
무협영화광이셨던 30대의 건장하셨던 아빠도
어느덧 팔순이 넘으셨고
몇 년 전에 큰 수술에 암투병을 하신 뒤로는
부쩍 여위셨다..
하지만 이따금씩 동시상영관이라고
발음해 보면..
나는 그때 맡았던 매점의 냄새 같은..
고소하고 축축하고 퀴퀴한 위로를 받는다..
ps 나의 작가명 장익은
그때 대지극장에서 봤던
소림사 18 동인,
흑매라는 영화에 출연했던
홍콩 배우 장익님의 이름이다.
홍콩 무협물 역사에서
배우 장익은
절대선 혹은 절대악 한 쪽의 역할만을 하던
다른 배우들과 달리
고고한 도인같은 선의 캐릭터,
비열하고 냉혹한 악의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던
멋진 배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