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라는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명언을 수상소감으로 남긴 봉준호 감독. 봉감독의 가장 개인적이며 한국적인 영화 기생충은 아카데미와 칸으로 대표되는 전세계의 공감을 얻어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인들은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 월드컵 4강 신화, 그리고 BTS의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아카데미 4관왕의 순간을 가슴에 새길 것이다. 과거 중화민족의 부흥을 상징하는 중국몽이 14억 중국 인민에게 지난 4-50년 동안의 가난, 치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이었다면, 우리에게 봉감독의 수상은 옐로우라는 인종차별의 낙인으로부터의 해방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아직 그들의 인정과 박수가 필요함을 인정하게 한 순간이기도 하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에 봉준호 감독 영화 중 아직 보지 않았던 설국열차를 찾아봤고, 그리고 조금 씁쓸해졌다.
설국열차의 결말이 좋았던 것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암시하는 봉감독의 메타포였다. 그 세계는 혁명의 폭력성과 기억을 내재한 혁명의 세대를 대표하는 커티스의 세계도, 기차 칸이 대표하는 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보안설계를 담당했던 남궁민수의 세계도 아니었다. 설국열차의 엔딩은 흑인 아이와 동양 여성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됨을 암시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는 결국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애굽에게는 혁명이었다. 이런 혁명의 주체적 리더는 모세였고, 모세 역시 그 혁명의 폭력성과 잔인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유대인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입성한 리더는 혁명이 아닌 새로운 질서를 암시하는 여호수아였다.
그런데,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새롭게 시작되지 않는 한, 가나안에 입성한 이들을 기존 세력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시도에 불과한 성공하지 못한 혼란에 불과하다.
봉준호 감독의 한국적이고 개인적인 시도도 결국 기존의 영화문법이 존재하고 주도하는 아니 그것이 지배하는 아카데미 수상을 통해 그 능력과 세계관이 인정되는 것처럼.
내가 어릴 적 헐리우드를 좋아했던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들의 개방된 문화와 기술로 대표되는 자본이 보여주는 화려함에 대한 동경이었던 것 같다. 주말의 명화를 보며, 베버리힐스 아이들과 맥가이버를 보며, 동질감이나 현실감에서 오는 공감은 없었다. 대저택에 잠시 놀러갔다 오는 기분이랄까. 미국 영화라면, 서양인 배우가 등장한다면, 별다른 이유없이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더 이상 그 영화의 제작사나 출신국가를 이유로 영화를 선택하는 일은 없다. 영화라는 세계가 보여주는 미국이나 유럽에 더 이상 동경할 것이 없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 곳도 그냥 이 곳 대한민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제. 편집증적인 우월감만 남아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꼰대처럼 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다면,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 영화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과연 어떨까? 기생충이 아카데미와 칸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이 느끼기에 새로웠기 때문일까. 시간이 흐른 뒤 평가될 이 사건(?)은 과연 어떤 시선에서 기인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