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곳에 왔을 때만해도, 5-10분 정도 짧은 단전이 하루에 서너차례 반복되곤 했다. 사실 5분 정도의 짧은 단전은 자주 반복되더라도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다. 전기가 나갔다 들어올때 전자제품에 해를 입혀 수명이 짧아질 수 있기 때문에 플러그를 뽑아놓는 정도의 수고면 충분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휴식할 여유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장시간혹은 수일 지속되는 정전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1) 온수기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찬물에 샤워를 하거나 혹은 전기가 돌아올 때까지 씻기를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 이 곳의 일교차는 상당히 크다. 이른 아침, 그리고 퇴근 후 즉 일몰 후 저녁 시간 기온은 10도 초반까지 떨어지기 때문에 업무중인 낮시간외에는냉수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기가 편치 않다. 그렇다고 근무중에 갑자기 샤워를 할 수도 없고. 그냥 떡진 머리로 가끔 등짝을 박박거리는 수밖에.
2) 단전이 10시간 이상 지속되던 어느 날, 주방에 들어가다 미끌어져 다친 일이 있다. 단전이 지속되다보니 냉동실 성에가 녹아 물이 되어 흘렀고, 이 곳 대리석 바닥에 물이 흥건해지면서 바닥이 미끄러워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헤프닝쯤이야 하루이틀 지나 모두 녹아버리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더 큰 걱정은 냉동식품 신선식품의 상태. 지난 달, 큰 도시에 나간 김에 돼지고기며, 새우며, 크림치즈며 이 곳에서는 감히 꿈도 못꿀 냉동&신선식품을 냉동고 가득 채워두고 흐뭇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 냉동고를 가득 채운 바로 그 다음 주, 집나간 전기가 돌아올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장기 단전이 지속되었고, 냉동식품의 상태를 확인해보려해도 혹시나 바깥 공기가 들어가 냉동고 온도만 더 높일까봐 전전긍긍. 결국 1주일 후 전기가 돌아왔고 충분히 냉동이 되었을 때쯤 냉동고를 열어 식품 상태를 확인해봤다. 다행히 일부 돼지고기는 살릴 수 있었지만, 새우며 오징어며 크림치즈는 이미 상해버려 역한 냄새가 난다. 눈물을 머금고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이제 거주 8개월 차에 접어든 카술루 우리집
3) 마지막으로 치안. 난민 호스트커뮤니티에 위치한 이 지역은 치안이 안정적인 지역은 아니다. 내가 사는 컴파운드 내에는 6채의 집이 있는데 24시간 시큐리티 가드가 경비를 본다. 그럼에도 해가 진 후 집의 정문과 후문에 안전등을 켜고 밤을 지낸다. 문제는 정전이 되면 이 안전등마저 켤 수 없다는 것. 새벽에 화장실을 가려고 잠이 깬 날이면 불이 없는 불편함보다 안전등이 없어 집 밖이 어두캄캄해서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날 때가 있다.단전의 불편함을 끄적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전기가 5분 들어왔다가 5분 나갔다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오늘도 안전등은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어야한다.
단전시에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핸폰 카메라로도 별이 포착될만큼 이 곳에서는 별을 잘 볼 수 있다.
이런 불편함이 있지만, 단전의 불편함은 단수의 불편에 비교할 수 없다. 단수가 되어버리면 샤워를 할 수 없고, 설거지를 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장실을 편히 이용할 수 없다. 더욱이 단전시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가 하나 있다. 동네 모든 전기가 다 나가버리고, 주변이 모두 캄캄해지는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면. 정말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언젠가 이 곳을 떠나면, 전기가 나가버린 저녁 대문을 열고 나가 고요함 속에 별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 가장 그리워질 것 같다.
+ 지난 2019년 12월, 에티오피아 1년 파견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아파트의 센서등이 꺼지는 것을 보고 순간 단전인가 의심했던 적이 있다. (많은 개도국 파견자들이 공감&공유하는 경험이다.) 이번 파견을 마치고 한국에 가면, 센서등이 꺼지는 순간 플러그를 찾고 오징어새우돼지고기가 떠오르지 않을까. 나의 냉동식품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