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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진 Mar 17. 2020

2월 4일. 내가 영국으로 떠난 이유.

무작정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먹은 지금이 아니면 준비를 하는 기간이라며 미적거리는 동안 금방 퇴색되어 결국엔 흐지부지 되어버릴 거란 걸 알았다.

 함께 미래를 꾸리려 모아두었던 적금을 몽땅 털어서 급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라나 도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물 안 작은 개구리인 내가 한 뼘은 더 커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해외로 가고 싶었다. 살아보고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보고 싶어 프랑스니 뭐니 불어도 배워가며 떠날 준비를 하던 중 함께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언니가 급작스레 영국행을 결정하면서 유학 준비는 시시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학교에 입학하고 나름 열심히 살아가다 만나게 된 그 사람. 나보다 여덟 살 많았던 남자 친구는 결혼을 원했고 그렇게 유학의 꿈은 다시 사그라들었다. 내겐 사랑이 전부였고, 원하던 큰 꿈은 이루지 않더라도 그 사람 옆이라면 행복할 것 같았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유학의 꿈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얻고, 결혼을 위해 적금을 모았다. 2년의 시간. 정말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문득문득 사랑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내 젊음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었지만 내 손을 잡아주는 그가 있기에 다시 저 아래로 누를 수 있었다.



영원할 것 같던 우리는 헤어졌다.

 그간 많은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몇 번이나 놓으려는 손을 붙들고 부득부득 이어가던 인연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다 잘될 것만 같았다.

 잠시 떨어져 생각의 시간을 갖고 있던 어느 날.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던 마음이 심해져 신경성 위경련으로 응급실에 갔다. 내 손을 잡고 글썽이는 그를 보는 내 마음이 철렁했다. 그렇게 절절하게 사랑하던 사람이건만 내 마음이 하나도 전 같지 않았다. 그간 내 마음은 몇 번이고 찢겨나가 결국엔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했던 마지막 데이트. 데이트를 하는 내내 심장이 갑갑하고 숨 한번 제대로 쉬질 못했다. 어딘가 잘못되고 어그러진 것 같다는 마음에 복잡했다.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빗방울이 창문에 떨어지는 걸 가만히 보다가 알았다. 

 이제 우리는 끝이 난 거구나. 아무리 애써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겠구나. 가슴이 뻐근한데 눈물은 나질 않았다.


상견례도 웨딩촬영도 전부 끝내고 정말 코앞이 결혼이었기에 도저히 가족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다 괜찮다 생각했는데 살이 자꾸만 빠져 한 달 새에 8kg가 빠졌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엄마. 나 유학 가고 싶어." 결국 식탁에 마주 앉은 어느 늦은 밤 애써 덤덤히 헤어짐을 말했다. 엄마는 많이 실망하셨지만 동시에 딸의 결정을 지지해주셨다.

 결혼 자금과 내가 모아두었던 돈, 결혼을 위했던 돈을 전부 영국 생활에 부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국으로 대뜸 나라를 정하고, 돈이 없어서 손가락을 물고 살더라도 도시를 경험해 보고 싶어 런던행 비행기표를 샀다.


Waterloo Bridge 워털루 브리지


그렇게 떠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커다란 캐리어에 하나 둘 짐 정리를 하다 서랍에서 예전 일기장을 발견했다. 스물한 살 첫사랑과 이별하고 풀어내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 적던 일기는 버릇이 되었다. 항상 적기만 했지 읽어본 적은 없었구나 싶어 맨 - 첫 장부터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항상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 생각했건만 일기 속의 내용은 전부 만나던 상대에 의해 휘둘리던 하루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 안의 조유진은 없고 죄다 누군가의 여자 친구만 있을 뿐이었다. 충격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뿌리를 알아야 해. 자기 자신을 아는 건 중요한 거야. 당당히 말했건만 사실 나야말로 자신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런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떤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지. 영어조차 할 줄 모르는 백지의 상태로 인천공항에 발을 들였다. 누군가에겐 미련해 보일 수 있겠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앞으로 경험하게 될 새로운 것들에 벌써부터 설레 왔다. 고작 몇 달새에 마음가짐이 참 많이도 달라졌다. 스물다섯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두 번째 인생이 다시 시작된 거다. 


 눈물 흘리며 손을 흔드는 엄마를 뒤로하고 게이트를 지나 꾹 참던 눈물을 쏟았다. 이제부터는 다신 내 미래를 남에게 맡기지 않겠다 다짐했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야겠다. 영국에서 보내는 내 1년은 누구보다 가득 차게 보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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