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말하다
그림 / 이종민
아무도 없이 쓸쓸한 목로에 앉아 보면, 마침내 고독이란 말이 추상에서 해제됨을 알게 된다. 일시에 온몸을 휘감아 오는 그것은 꽤 실체적이다. 큰 화보로 걸린 예쁜 탤런트의 묘한 미소는 아무 위안이 되지 못하고, 주인 모녀가 나누는 두런거리는 말과 웃음 또한 내가 빨리 떠나주기를 바라는 재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쯤 되면, 혼자 먹는 국밥의 맛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뜨거운 국물에서 나던 허연 김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식구들을 멀리 서울에 두고 홀로 집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집 앞의 목로에 앉아 뜬금없이 집이란 단어에 대하여 생각한다. 부리나케 달려온 집이란 무언가? 하물며 아무도 없는 집에 그토록 들어가고 싶은 이유는 있는가? 집이란 실체의 장소를 말함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의 추상명사인가? 방랑하던 유목민이 가족과 함께 나누던 한 그릇의 고깃국물과 차 한 잔이 떠오른다. 장소에 대하여 미련을 갖지 않았던 그들의 자유에 대하여. 그저 가족의 얼굴만 서로 바라보던 풍경을 나는 벌써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고독의 여러 형태에 대하여 이미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다. 그것이 실체라면 고독이란 가장 최종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아니며 시작 또한 아니다. 단지 그것은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늘 그것과의 투쟁을 모색한다. 문제는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 또는 그것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가령 과한 술로 마치 세상을 내가 다 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도 한 방법. 아니면 일상을 망각할 정도의 예술 세계에 빠져드는 일. 고독은 늘 결정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하곤 하였다.
기억된 숫자 몇 개로 문을 따고 빈집에 홀로 앉았다. 식탁, 텔레비전, 침대 따위는 내게 지금 별로 유용하지 않다. 먹고 자는 것이 대수일까? 내겐 그저 이 쓸쓸한 상황을 이기는 것 만이 최대의 관건이다. 이젤을 펴고 캔버스를 걸었다. 고독을 향한 도전인지, 상황을 견뎌내 보려는 얕은 술수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정은 단호했다.
어쩌면 늘 그려온 상황일지도 모른다. 설령 내가 가끔 이러한 고독을 갈구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지닌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독만이 유일하게 비일상적이며, 그것만이 온전한 자유를 지닌다. 따라서 고독은 늘 창조적 상황을 부른다. 아니 그 자체가 창조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나는 텅 빈 집에서 매우 예술적으로 변모하여, 열기에 차 조금 전의 고독한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그려 놓기로 하였다. 술병을 다시 꺼낸 것은 도움이 될까?
아~ 겨우 그림은 완성되었지만, 사태는 비몽사몽이다. 겨우 몸을 가누며 생각한다. 이와 같은 것이 내가 고독은 즐기는 방법이 될 터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은 꽤 사실적이다. 그것은 다행인가?
그림 / 이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