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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4] 그랜드 캐니언, 추위와 일출

by 잡다한

10인승 승합차에, 여덟 명이 탔다.

나와 프로도, 신혼부부 두 쌍, 4인가족 한 팀.

아, 물론 운전자와 가이드는 제외하고다.


10인승 - 8명. 2자리가 남는다.

나와 프로도는 나름 영리하게 그 두 자리를 가장 먼저 노렸고 결국 얻어냄에 이른다.

맨 뒷자리가 4인석인데, 나와 프로도가 각 방향 끝에 앉았고 가운데 두 자리는 우리의 하체 공간이었다.

비좁은 승합차이지만 나름의 공간을 확보했고

그로 인한 뒷자리의 덜컹거림과 소음을 그 대가로 감당했다.


그 전에

지난 3편의 마무리를 굉장히 큰 일이 벌어질 것처럼 써놨는데

사실 픽업이 조금 늦어진 것이었다.

승합차는 23시 17분에 도착하였고, 조금 늦어지긴 했어도 문제없이 출발하였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았겠지만, 어그로를 끌어 미안해요.


투어 일행을 전부 다 태우고 그랜드 캐니언 Grand Canyon 을 향해.

본격적으로 가기 전에 유명한 라스베가스 전광판 사인에서 사진을 찍었다.

성수기 낮에는 한참 줄을 서야 찍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거의 밤 12시가 되어가는 비성수기이다 보니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도 몇 팀의 사람들이 있었고, 오히려 명확한 줄이 없다보니

조금은 난잡한 느낌으로 사진을 찍으면 뒤에 다른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도, 라스베가스 스트립 Strip 거리의 상징이니, 나도 찍어야지.


두 시간을 달리다가, 차량이 멈춰 섰다.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 빛도 없는 시골 샛길에 있었다.

혹시 어디 팔려가는 것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아니지.

우리는 별을 보기 위해 내렸다.

우리의 눈높이는 새까만 공허였지만, 고개를 위로 젖히니 이곳이 천문대였다.

진짜 천문대에서는 돈 내고 자느라 못 본 별들을 이제야 보는구나.


군복무 중 강원도에서 KCTC 훈련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로, 진부한 표한이지만 별이 쏟아질 듯 했다.

가이드 님은 천문학 박사라도 되는 양, 눈에 보이는 모든 별들을

나름의 선으로 묶어 수많은 별자리를 설명해주고 계셨다.


누구나 알 만한 북두칠성, 카시오페아는 차치하고

게자리, 사자자리, 오리온자리, 그리고 이외에도 다양한 별자리를 설명해주셨다.

(기억이 안 나서 뭉뚱그리는 것이 맞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이지 너무 추웠다.

이가 딱딱 떨릴 만큼.

약 5분간의 '별빛이 내린다' 후, 황급히 차량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시 맨 뒷자리로 들어가, 더 구석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으, 추워.


그렇게 세 시간을 더 달렸다.

좁은 승합차에서 이리 저리 방향과 자세를 바꾸며 용을 썼지만

그래봐야 얼마나 편해지겠어.

온 몸이 찌뿌둥해진 채로 마지막 휴게소에 들렀다.

이곳에서는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휴게소 편의점과 더불어 서브웨이 매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모든 일행은 아직 한 마디도 서로 섞지 않았지만

어색하게 앞 뒤로 줄지어 서브웨이 주문을 마치고 나름의 간격을 가지고 일행끼리 앉았다.


나와 프로도는 메뉴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주문 직전에 카운터 앞에 붙여진 시즌 한정 특별 할인메뉴를 발견하고는

지금까지 고민한 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을 정도로 가차없이 그 메뉴로 주문했다.

여느 미국 음식이 그렇듯, 아낌없는 소스의 향연 덕분에

한국에 비해 짠맛이 강한 샌드위치를 얻었지만

그래도 나름 맛있었고, 추운 날씨에 속이라도 든든할 수 있었다.


가이드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침을 먹은 건 처음 보네요.

보통 몇 분은 그냥 주무시거나, 내려서 안 드시거든요.


가이드 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허허 웃었다.

그런가. 근데 앞 사람이 너무 맛있게 먹고 있었단 말이야.

아마 저 사람에게 37% 정도는 지분이 있을 거야.



이제 진짜 다 왔다.

삼십 분 남짓을 마저 보내고, 드디어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7시 정도. 이제 막 일출을 하려 한다.

이것을 보기 위해 그 새벽에 계속해서 바퀴는 굴렀던 것이다.

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가고, 일출 스팟으로 이동했다.


너무 추웠다. 정말로.

서부 중에서도 그랜드 캐니언이 속한 애리조나는 더욱 추웠다.

사막 기후이기 때문에 매우 건조하고 일교차가 컸다.

바람도 많이 불고 높은 곳이다 보니 뼛속까지 냉기가 들이쳤다.


내가 정말로 억울한 것은

사실 더 따뜻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경량패딩도 가져오고, 목도리도 챙겨왔다.

그런데 그 방한용품들은 모두 라스베가스 호텔의 어느 창고에서

5달러를 내고 22시간동안 유기해버린 못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들을 기다렸지.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날 그걸 까먹어서 두고 오다니.

하필이면,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날에.


일출 스팟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나도 모르게 '와' 소리가 나왔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잠시나마 추운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정말 잠시나마. 한 2초 정도.


이 드넓은 황야에 들어오는 오렌지색 빛줄기의 변화를 관찰하며

윗니와 아랫니를 10초에 여덟 번 마찰시키고

얼른 태양이 이 마찰을 멈추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성수기만큼은 아니어도, 최적의 1열에는 도달하기 힘들 정도로

적당히 사람이 많았고, 이들은 이 엄청나고 압도적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 지금 이곳에 모였다.


이제, 모든 빛의 근원이 조금씩 자기 존재를 보인다.

스타워즈나 듄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 무비의 배경으로 쓰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직무유기로 잡혀가도 마땅치 않을 정도의 광경이였다.


이는 그저 일출보다는, 오늘의 탄생에 가깝다.

당장이라도 아기 사자를 두 손 높이 들어야 할 것 같다.


해가 그림자를 몰아내며, 분명 아까보다는 덜 추워졌지만

그럼에도 춥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영하 5도에서 영하 3도가 되어도, 춥지 않은 건 아니니까.

(물론 미국은 화씨를 쓴다. 계산 방법은 알지만 굳이 계산하지 않는다.)


일출을 보고 쭉 걸어서 다시 접선지로 갔다.

처음에 살짝 길을 잃고 헤맸는데, 이내 제대로 가서 꼴찌는 면했다.


이 다음에는 다시 두 시간을 이동하여

그 유명한 홀스슈 밴드 Horseshoe Band 에 도착했다.

여전히 추웠지만 이제는 버틸 만 하다.


프로도는 이상한 포즈를 자연스럽게 잡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굉장히 어색할 것 같은 괴이한 포즈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Vogue 화보처럼 찍고는 했다.

뭔가 신박한 포즈가 나름 괜찮아보여 따라서 찍으면

애석하게도 어색한 내 포즈에서는 프로도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진은 내가 프로도를 찍어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인물 사진의 구도를 조금 더 잘 잡기 때문에

내가 프로도를 찍어준 다음에, 그대로 나를 찍어달라고 하곤 했다.

(생각보다 그 '그대로'라는게 어려운지, 생각보다 한참 걸린다.)


홀스슈 밴드의 끝자락에 걸터 앉아, 두 손으로 말 Horse 포즈를 취했다.

프로도의 포즈를 보고 그 근처에서 사진을 찍으려 기다리는 다른 관광객들이 웃음이 터졌다.

이런 경험은 꽤 자주 있었다.


프로도를 찍고 나서, 그대로 자리만 바꿨다.

나도 같은 포즈를 취했고, 같은 구도로 찍었다.

역시나 뭔가 개운치 않았지만, 나름의 인증샷이 완성되었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동안 옆에서는 드론을 날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역시 이곳은 드론 금지구역이었다.

초입에 표지판으로 NO DRONE ZONE 이라고 분명 써있는데

하여튼 말 드럽게 안 들어요.

솔직히 왱왱거리는 소음을 내며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쪼매난 드론이 괘씸해서

방향을 잃거나 예기치 못한 일로 고장나기를 바랬지만

내 못된 마음을 진정이라도 시키듯, 그런 일은 없었다.


이제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됐다.

점심 메뉴는 한식과 중식 중 선택할 수 있었고

전날 판다 익스프레스를 먹었기 때문에 한식을 선택했지만

하필이면 그날 한식당이 문을 닫은 바람에

껍데기뿐인 선택권을 뒤로 하고 열 명은 다시 한 가게에 모였다.

6시간 전, 휴게소의 서브웨이 모습과는 달리

다들 옹기종기 모여 앉았으며 옆 일행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와 프로도는 그냥 음식에 집중했고 다행히 딱히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중식당은 간단한 중식 뷔페였는데,

인당 25,000원을 내면 몇 가지 간단한 중식 요리들을 먹을 수 있었다.

맛있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름 먹을 만 했다.

몽골리안 비프가 그 중 가장 나았다.


이제 열량을 채웠으니 다시 소비하러 가볼까.

마지막 목적지는 윈도우 배경화면 있는 곳으로.




앤텔롭 캐니언 Antelope Canyon 은 '그랜드 캐니언' 하면 떠오르는 그 풍경이 있는 곳이다.

갈라진 땅 틈새로 한참을 내려가면 펼쳐지는 갈색 딱딱한 구조물들은

이를 보고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하는 것처럼 매 구간이 그저 놀라웠다.


사실, 나는 앤텔롭 캐니언이 땅 위로 솟은 산맥 같은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땅 아래로 갈라진 협곡 같은 것이었다.



예상보다 규모가 커서 놀랐는데, 특정 구간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느낌이 반복되기는 한다.

그래도 지루하지 않으며 조금씩 다른 그 미묘한 차이와 사진찍기 좋은 스팟을 찾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시간도 목적지도 끝에 다다른다.

다만, 주의할 점은 길이 좁고 가느다란 한 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겠다고 오래 시간을 끌다가는 귀경길 고속도로처럼

꽉 막힌 교통체증이 유발되며 '맨 앞 차는 뭘 하는거야'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한 두 장 찍고 맘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한 장도 못 건졌다.

아오.


나와 프로도 뒤를 따르던 신혼부부도 나와 같은 고민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람을 여기에서 자르면 어떡해'라고 말하며

언뜻 듣기에는 살벌한 문장을 뱉었지만

그 본질은 결국 '사진을 왜 이렇게 찍는거야'였다.


프로도, 네 얘기를 하는데?


아니, 나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 너 그 정도 맞아.


그 여자분에게 '그거 못고쳐요. 안타깝지만 포기하면 편합니다. 저처럼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성별이 반대였다면 모를까, 괜한 새신부에게 새신랑에 대한 불만을 거들었다가

무슨 불똥이 튈 지 모르니 그냥 죽 닥치고 내 사진이나 찍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현지 가이드가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건네줬더니

하늘 사진을 찍어서 다시 돌려줬다.

확인해보니, 엄청난 사진이 찍혀 있었다.

협곡의 모양과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마치 '해마(海馬)' 같았다.

가이드는 역시나 Sea Horse 라며 설명했다.


아이고, 오늘 참 Horse 많네.


가이드에게 돌려받은 핸드폰으로, 그 해마를 완벽하게 다시 찍었다.

가이드가 찍은 것보다, 내가 찍은게 훨씬 나았다.

나 여기 취직해야 하나?

솔직히 진짜 잘 찍었지?


해마 파트가 끝나면, 이제 앤텔롭 캐니언 탐험도 끝난다.

한참을 사다리 계단으로 올라가고 나면

그 좁은 틈 아래로 그런 곳이 있었다는게

방금 거기서 나왔어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게 자연이 만든 것이라는 걸 어떻게 믿으라고.

근데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더더욱 믿기지 않긴 하네.


이제 모든 일정은 끝났고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가이드 님이 혹시 여기서 '후버 댐 Hoover Dam'을 못 본 사람이 있냐고 하여

당연히 못 봤다고 답했다.

나와 프로도 말고도 몇 명이 더 있었다.


근처에 후버 댐 축소판이 있다고, 크기는 좀 작지만 구조가 비슷하니

아쉬운대로 이곳이라도 가보자고 하고 데려가주셨다.

후버 댐이 어마무시하게 크다는 걸 생각하면

축소판이라고 해도 정말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이어서, 그 근처에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가이드 님이 모든 팀의 사진을 찍어 주셨는데 단골 포즈가 있었다.

양 팔을 벌리고 찍고,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고, 타이밍 맞추어 점프를 하는 사진들.

가이드님이 나이가 좀 있으시다보니, 90~00년대 유행하던 스타일을 즐기시나봐.

앞서 신혼부부 커플도 예외없이 고리타분한 포즈들을 행하던 중에

일행 중 아주머니가, 90년대 제주도 신혼여행 패키지를 보는 것 같다 며 웃었다.


문제는 타이밍 맞춰 점프하는 사진을

흔들거리는 돌덩이 위에서 찍으라고 하신다는 것.

무서워서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가이드님이 찍기로 했다면 찍어야 되는거다.


당연히 나랑 프로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흔들거리는 돌덩이에서 점프는 고사하고 균형을 잡는 것도 힘든데.

그래도 어찌어찌 점프는 했고 아슬아슬 착지도 했다.

좀 애매하긴 해도, 나름 신기한 사진이 나왔다.

괜히 가이드는 아니란 말인가.


햐안 꽈배기 두 명


다시 다섯 시간을 내리 달렸다.

이번에는 우리 자리가 맨 앞으로 바뀌었다.

맨 뒤에서 찌그러져 가던 우리를 나름 배려해준답시고 바꿔주신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숨은 공간이 많은 맨 뒷자리가 좋았어요.


아니면, 이를 눈치채고 배려라는 명목 하에

꿀자리 맛보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이러나 저러나, 어쨌든 우리는 앞자리로 배정되어

조금은 더 불편하게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드디어 돌아왔다.

길고 길었던 버스 감옥을 탈출하고 이제 누울 수 있다.


내리자마자 체크인부터 하고 객실에 짐을 내려놓고

곧바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번 메뉴는 미국 서부의 상징과도 같은

인앤아웃 햄버거 In-N-Out

호텔에서 5분 거리에 있었기에 금세 도착했고

사람은 꽤 있었지만 패스트푸드답게 나름 금방 나왔다.


인앤아웃의 가격은 정말 착했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지만

미국 물가에 비하면, 비슷한 미국 3대 버거인

쉑쉑버거와 파이브 가이즈에 비하면 정말 저렴했다.


심지어 당연히 맛도 훌륭했다.

뭔가 딱 군더더기 없는 맛. 햄버거의 정석.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한국사람 취향의 그것.


전 세계에서 '미국 서부'에만 있는 인앤아웃을 경험하다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데 착한 가격에 훌륭한 맛까지.

제발 한국에 들어와줘.


이제 길었던 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다시 생존물품과 다음날 아침식사 바나나를 사고 잠에 들었다.

내일은, 여행의 이유 스피어 sphere를 드디어 관람하는 날이다.


재활은 꽤나 순조로웠다.

36시간 중에 18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지만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그 모든 것이

그것마저 재활의 과정이었다.


이제 재활은 벌써 사흘이 지났다.

아직은 남은 시간이 더 길다.

힘들지만 분명 가치는 있다.


나는, 다시 일어나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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