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b n Wrestle Jul 05. 2020

아침마다 여행 가는 방법

매일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기

당신의 7월, 발 붙이고 살아가는 곳은 지구의 어디쯤인가? 그곳에서 당신은 어떤 의미인가?




지금 걷는 이 귀갓길이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아, 내가 저 앞에 있는 건물 어디쯤에서 머리를 누이고 있다니, 무한한 무(無) 소속감이 느껴진다. 지구 밖의 생명체는 도대체 몇 번의 zoom in(+)을 해야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감각을 잃어버린 느낌. 눈 뜨면 사람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면 그곳에서 비집고 나와 지친 몸을 이끌고 어두운 어딘가로 스르르 들어가는 게 대부분의 삶이다.


서핑 용어 중 보드 앞부분(노즈)이 물에 걸려 앞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것을 와이프 아웃(wipe-out)이라 한다. 와이프 아웃을 당한 후 물 밖으로 나와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수초 간 얼마나 떠밀렸을까. 작년까지 내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그간 얼마나 달려왔는지. 내 일상이 더 이상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며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니 하루하루가 와이프 아웃이다. 하지만 이 와이프 아웃을 당해야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정상일까?


큰 파고 없는 잔잔한 일상에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들이 하나씩 나를 세게 덮치면 그때부터 트라우마들을 겪는다. 그게 슬럼프가 될 수도 있고 깊은 우울증일 수도 있다.


지난 5월과 6월이 내게 그랬다. 스무스 세일링을 하던 내 작은 조각배가 파도를 만나 여러 번 엎어질뻔했다. 그러다 보니 내게 자연스레 생긴 생각이 있다. 난 지금 사실 긴 여행을 즐기고 있는 중이라면? 그리고 그곳이 우연하게 서울인 것뿐이라면? 그래서 내가 여행을 사랑하고 고대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랬더니 네 가지로 추려졌다.


16년 여름 암스테르담


1) 우선 여기를 뜨자. (무책임과 책임 사이)


내가 짊어진 책임감과 의무는 도무지 가벼워지지 않는다. 이 놈의 일상은 아주 조금씩, 쉼 없이 나를 조금씩 조그만 유리병 안에 압축하는 거 같다. 괜찮아, 이제 다 던지고 갈 거니까. 우선 서울만 뜨고 보자. 서울만 벗어나도 숨통이 조금 틀 것 같다. 이놈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그들의 인생 스팩트럼 중 어딘가에 내가 소속되어 있는 것 같다.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별로 유쾌하지 않다. 어딜 가든 낯선 자들과 군중으로 섞여야 한다. 자연스레 비슷한 책임을 공유하게 되는 것 같다.


회사에서 휴가를 낸다는 것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쉰다는 표면적 의미보다, '이제  당분간 없으니까  찾지 말고 너네가 알아서 잘해~'라는 속 의미가 더 와 닿는다. 왜냐면 꽤 많은 것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 크게 상관없이 책임에 맞는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퇴사도 비슷하겠지. 지금의 회사를 나가는 건 여기서 힘들었던 것들과 함께 내가 진 책임감을 훌훌 벗어던진다는 것. 말 그대로 이제 남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제발 아름답게 떠나 주시길.


우리가 여행을 원하는 것은 아마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무거운 짐이 든 가방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충동적이지 않은 당당한 무책임. 여행은 이것을 눈감아준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왔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움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유목사회에서 봉건제로, 제조 산업의 역군에서 디지털 노마드까지, 지금 우리가 가진 떠남 본능이 생긴 원인은 어쩌면 책임감 때문이었을 수 있겠다. 책임감이라는 건 정착한다는 것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YDG(양동근)도 <고해성사>라는 곡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이란 이름의 유부남. 가정이란 선택 앞에 no more 우유부단. 치기 어린 방황은 곤란해, 아빠가 된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 sh*t, 허리띠 졸라매. 책임져 책임 huh 책임져.


17년 모로코에서, 사하라 사막 가는 길


2) 익숙한 것은 이제 지겨워. (내가 원해서 움직이는가?)


오늘 점심도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백반집에 갔다. 하지만 나는 때로 새소리 지저귀는 공원 벤치에 앉아 에어팟을 꼽고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으며 맛있는 반미 샌드위치를 먹고 싶다. 우선 새롭잖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회사 주변에 조용한 공원과 반미집이 없다.


어느 날 아침의 장면이 강렬하다. 회사로 향하는 아침 버스 안, 신호에 정지한 내가 탄 버스 옆에 노란색의 리라 유치원 버스가 정차해있었다. 안에는 꼬마들이 노란색 유치원 유니폼을 입고 얌전히 앉아있다. 좌석 목 받침은 자기 앉은키보다 높다. 창문 두 장을 사이로 나와 그 조그만 아이들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우리는 100% 원해서 이동하는 삶일까, 아니면 운반당하는 일까? 그 아이들도 좀 더 크면 지금의 내가 보는 것을 보겠지.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버스의 색깔만 알록달록 해질 뿐이다.


아침저녁마다 항상 타던 정류장에서 그놈의 똑같은 번호의 버스를 기다린다. 변하는 건 승객들과 기사님뿐, 나를 실어 나른다는 사실은 같다. 난 1711번 버스를 타는 것이 아니다, 서울특별시 버스운송사업조합에서 나라는 시민 한 명을 값싸게 실어다 주는 거다. 나는 이 짧은 이동을 의미 있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일찍 집을 나선다. 한산한 버스를 타면 이제 아침의 나에게 정식으로 인사할 여유가 생긴다. ‘오늘 시합도 잘 부탁해.’ 내가 발걸음을 옮기는 방향마다 깊게 관여하려 한다. 이건 내가 가고 싶기 때문에 내디는 발걸음이라고. 그럼 같은 길도 매번 다르다, 내가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16년 네덜란드 네이메헌의 여름, The Waal


3) 이제 나와도 ,  안의 다른 페르소나.


내가 살고 있는 해방촌-후암동 동네의 주말 풍경은 항상 신선하다. 과감한 옷차림, 평소보다 조금 더 과장된 웃음소리 나 인사치레도 해방촌에서는 멋지다. 까치가 집을 진 부스스한 머리에도 멋진 선글라스 하나만 걸쳐도 해방촌은 당신에게 큰 관심 없다. 이 곳에서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일 뿐, 그 거울들엔 다른 이의 모습이 없다.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특히 한국에서 이런 부분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나를 재단하고 조각하니 말이다. 다르면 틀렸다고 배운 우리는 크면서 남몰래 제2의, 제3의 나를 조금씩 키우고 있다.


월화수목금의 나보다 토요일의 내가 얼마나 평소와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똑같이 한국에서의 '나'와 외국에서의 내 모습도 마찬가지다. 어느 환경에 있던 나의 어떤 모습이 나와도 스스로 편안해야 한다. 조금의 용기를 더 내도 괜찮다. 오늘의 당신과 내일의 당신이 다른 사람 같아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익숙한 하루지만 오늘 난 매우 섬세한 건축가가 되어본다. 내일의 나는 아마추어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내가 지향하는 페르소나를 입어보는 것만으로도 몸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 그 페르소나는 계속해서 내게 말을 걸 것이다.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나였고 오늘은 새로운 나다. 지금의 나는 잠시 쉬어도 좋다. 이 곳에서 나는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16년 파리의 밤


4) 철저한 관찰자의 시선에서. (멈출 수 없는 비교 본능)


여행 중 우린 속도를 줄이고 멋진 카페에 앉아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넋 놓고 구경한다. 아예 그 나라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만을 보고 싶어 여행하는 분도 계시다. 한국에서는 누구의 누나, 재밌는 동생, 나만의 세계가 있는 친구, 과묵한 동료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안경을 쓰고 주변 세상을 봐 왔다. 하지만 낯선 곳에 선 우리는 철저히 제 3자가 될 수 있다. 마치 한 장의 큰 도화지가 되어 그곳의 풍경과 그 풍경을 수놓는 사람들을 빠르게 크로키하는 것이다.


우린 이때 꽤 큰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익숙한 곳에서는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비교 대상이었다. 멋진 것을 봐도 그렇고 불행한 것을 목격해도 그렇다. 시선이 바깥으로 쏠린 만큼 매일 바쁘게 눈이 돌아간다.


그런 경험을 한 적 있는가? 여러 주제로 대화가 오가는 모임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일어나게 되었다. 곧 이 자리를 떠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더 이상 이 곳에 있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화에 열심히 참여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로 들린. 내가 발언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감동을 준 부분만 남는다.


모든 여행에는 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방점(.)을 찍는 결심은 타이밍이다. 흘러가는 문장에 온점을 찍는 것은 용기다. 그리고 그 점을 찍는 순간 우리의 시선은 넓어진다. 이 상황을 조망하게 되며 한 두 발짝 뒤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매일을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면 이런 여유를 자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더 과감해지고 적당히 충동적으로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닌데, 한 살씩 더 먹을수록 내 존재감의 엉덩이도 무거워진다. 살면서 마음 편하게 무언가를 관망한 적이 있었나. 그게 내 깊은 내면인 적이 있었나.


17년 아이슬란드




여행 에세이와 여행 인플루언서가 많다. 나는 아직까진 여행 정보지 외엔 여행 수필을 읽지 않는다, 대부분 비슷한 주제다. 여행 중 스스로에게 집중하니 느꼈던 감정선을 독자인 당신과 공유한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6월부터 하루하루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마음가짐이라기보다 심리적인 전략에 가깝다. 나의 슬픔, 나의 번뇌, 나의 존재감이 부담스러워질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이고 나를 더 집중 관찰하고 싶다. 그럼 내가 내린 결정에 내가 더욱 자유로워지겠지. 그럼 물리적으론 이곳에 있으면서 다른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


내가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을 처음 들은 건 2011년 여름 아버지와 뉴욕 맨하탄을 여행할 때였다. 그땐 뉴욕 바이브를 느끼기 위해 들었지만 지금 와서 갑자기 이 노래가 왜 그렇게 히트를 쳤을까 고민해봤다. 뉴욕에 간 영국인 이야기인 이 곡의 주제는 아마 후렴 마지막에 있지 않을까?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essay by. junwoo

photo by. Andrew Neel, junwoo


작가의 이전글 불안하고 흔들릴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