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돈과 민간의 돈이 공존하는 법

by 심준규 Jace Shim

화폐의 역사는 언제나 공적 권위와 민간의 창의성이 충돌하고 타협해온 과정이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가 있어도 상업은행의 예금이 존재하고, 국가 통화가 있어도 기업의 포인트와 상품권이 유통되어 왔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와 민간 스테이블 코인의 공존도 이 오래된 구도의 디지털 버전이다. 위협이 아니라 역할 분담의 문제다.


2026년 현재 글로벌 금융 시장은 CBDC와 스테이블 코인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기능하는 이중 구조(Two-tier System)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도매용(Wholesale) CBDC는 중앙은행과 시중은행 사이의 거액 정산, 국가 간 자본 이동처럼 금융 인프라의 근간을 담당한다. 안정성이 최우선인 영역이다. 반면 스테이블 코인은 유통, 커머스, 로열티 프로그램처럼 실생활 결제와 프로그래머블 금융 서비스에서 민간의 창의성을 발휘하는 층위를 맡는다. 두 화폐는 경쟁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영역에서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실무적으로 이 공존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준비금 포트폴리오다. 고도화된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들은 기존의 국채 중심 준비금에 도매용 CBDC를 추가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상업은행 예금은 해당 은행이 파산할 경우 준비금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 Circle이 2023년 SVB 사태에서 33억 달러의 USDC 준비금이 일시적으로 묶인 것이 대표적 사례다. 반면 CBDC는 중앙은행의 직접 부채이므로 이론적으로 신용 리스크가 제로에 수렴한다.


정산 효율 측면에서도 CBDC 기반 준비금은 뚜렷한 강점을 갖는다. 국채를 현금화하려면 시장에서 매각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여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도매 CBDC를 준비금으로 보유하면 스테이블 코인의 발행과 상환을 즉각적으로 처리하는 T+0 정산이 가능해진다. 사용자가 코인을 법정화폐로 돌려달라고 요청하는 순간, 준비금에서 실시간으로 이체가 완료되는 구조다.


그렇다면 CBDC가 있는데 왜 유통사가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따로 운용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전략의 핵심이다. CBDC는 국가 정책의 틀 안에서 설계된 화폐다. 유통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마케팅 로직을 심기 어렵다.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 이자를 추가로 지급하거나, 특정 협력사에서만 사용 가능한 인센티브를 설계하거나, 계절 수요에 맞춰 리워드 비율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것은 공적 화폐의 구조 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데이터 주권도 결정적인 차이다. 고객의 결제 패턴, 구매 빈도, 선호 상품군 같은 데이터는 유통사의 핵심 자산이다. CBDC 기반 결제에서 이 데이터를 유통사가 자유롭게 활용하는 데는 개인정보 보호 규제가 개입할 수 있다. 자체 스테이블 코인 생태계 안에서의 거래는 유통사가 그 데이터의 설계자이자 관리자가 된다. 어제와 그제 다룬 프로그래머블 로열티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이 데이터 주권이 전제되어야 한다.


유효한 전략은 CBDC와 자체 스테이블 코인을 계층적으로 활용하는 하이브리드 설계다. 결제 인프라의 근간, 즉 준비금 운용과 최종 정산 레이어에서는 CBDC의 신뢰성과 효율을 활용하고, 고객과 직접 맞닿는 프런트엔드에서는 자체 브랜드 스테이블 코인을 전면에 내세운다. CBDC는 보이지 않는 배관이고, 스테이블 코인은 고객이 매일 쥐고 사용하는 수도꼭지다.


더 먼 미래를 보면 이 구조는 한 단계 더 진화한다. 별도의 블록체인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고, 국가가 운영하는 CBDC 네트워크 위에서 유통사가 스테이블 코인을 스마트 토큰 형태로 직접 발행하는 시나리오다. 규제 준수 비용은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민간의 프로그래머블 설계 자유도는 그대로 유지된다. 공적 인프라 위에서 민간이 혁신을 쌓아 올리는 가장 효율적인 공존 형태다.


CBDC는 스테이블 코인의 위협이 아니다. 오히려 민간 스테이블 코인의 신뢰 기반을 두텁게 만들어주는 디지털 기축 자산으로 기능한다. 유통사에게 남겨진 질문은 단순하다. 이 거대한 공적 인프라를 어떻게 자기 비즈니스에 유리하게 설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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