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플 USD, 스위프트를 대체할 송금 인프라의 등장

by 심준규 Jace Shim

리플사가 이미 XRP라는 자체 암호화폐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24년 말 RLUSD(리플 USD)를 출시한 배경에는 명확한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10년 이상 전 세계 은행들과 구축해온 리플넷이라는 거대한 송금 네트워크가 존재했지만, 정작 XRP의 가격 변동성 때문에 보수적인 금융 기관들은 도입을 망설였다. 가치가 달러에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을 최종 결제 수단으로 제시함으로써, 리플은 기존 송금 인프라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려 했다.


2026년 1월 현재 시가총액은 약 15억 달러 수준으로, 테더나 USDC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단순 시총 비교는 본질을 놓치는 셈이다. 개인 간 거래보다는 은행 간 자금 정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실제 네트워크를 흐르는 자금의 밀도는 매우 높다.


리플사는 매달 준비금에 대한 외부 감사 보고서를 공개하며 투명성을 강화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규제 준수와 투명성 확보는 기관 고객 유치의 핵심 요소가 된다. 뉴욕 금융서비스국의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충족하는 신탁 라이선스를 보유했다는 점은 가장 강력한 경쟁 우위다.


기존 국제 송금 방식인 스위프트(SWIFT)를 이해하면 왜 금융 기관들이 주목하는지 명확해진다. 한국 은행에서 미국 은행으로 송금할 때, 자금은 여러 중개 은행을 거쳐야 한다. 송금 은행이 수취 은행과 직접 거래 관계가 없으면, 관계가 있는 제3의 은행을 찾아 경유해야 하는 구조다. 각 단계마다 수수료가 발생하고, 영업일 기준 2~5일이 소요되며, 중간에 어디서 막혔는지 추적도 어렵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한다. 송금 은행이 자국 화폐를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해 블록체인에 전송하면, 수취 은행은 이를 받아 즉시 현지 화폐로 환전한다. 중개 은행 없이 직접 연결되고, 실시간 처리가 가능하며, 모든 거래 내역이 투명하게 기록된다. 수수료는 기존 방식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지고, 처리 시간은 몇 분으로 단축된다.


글로벌 은행과 결제 업체들이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수출입 기업 입장에서는 무역 대금 결제 시 환율 변동 리스크를 피하면서도 블록체인의 속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한국 기업이 유럽 거래처에 대금을 지불할 때, 기존에는 며칠이 걸리고 환율이 그 사이 변동할 위험이 있었다.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면 몇 분 안에 정산이 완료되고, 달러 가치로 고정되어 있어 환율 변동 걱정이 없다.


리플 생태계 내부에서 확대되는 양상도 소비자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XRP 레저 위에서 작동하는 디파이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사용자들은 암호화폐 가격 변동성 때문에 곤란을 겪곤 했다. 예를 들어 대출 서비스에서 담보로 XRP를 맡겼는데 가격이 급락하면 추가 담보를 넣어야 하고, 예금 서비스에서 XRP로 이자를 받아도 가격이 떨어지면 실질 수익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달러 연동 코인이 있으면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디파이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변동성 있는 암호화폐만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금융 서비스들이 생겨난다. 월급을 암호화폐로 받고 싶어도 가치가 계속 변하면 생활비 계획을 세울 수 없지만, 달러 가치로 고정된 코인이라면 가능하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상품 가격을 표시할 때도 변동성 있는 코인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가치가 안정적이면 일반 화폐처럼 사용할 수 있다.


주요 활용 레이어는 XRP 레저와 이더리움이다. XRP 레저는 애초에 결제를 위해 설계된 블록체인으로 속도가 매우 빠르고 수수료가 저렴하다. 내장된 탈중앙화 거래소를 통해 다른 자산과의 교환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구조다. 사용자는 별도 거래소에 가입하지 않고도 XRP 레저 내에서 바로 자산을 교환할 수 있어 편리하다.


이더리움에서는 ERC-20 표준으로 발행되어 더 넓은 디파이 생태계와 연결된다. 기관들이 이더리움 기반의 다양한 금융 상품에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리플 생태계에 국한되지 않는 범용성을 확보했다. 블록체인 간 상호운용성이 중요해지는 시점에서, 멀티체인 전략은 필수적인 선택이다.


2026년 하반기 미국의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법제화되면 상황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이미 뉴욕 신탁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규제를 준수하고 있는 발행사는 기업 간 거래 시장에서 USDC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규제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순간, 준비된 플레이어들이 시장을 선점하게 될 것이다.


전통 금융과 암호화폐 금융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의 역할이다. 리플이 지난 10년간 쌓아온 은행 네트워크와 블록체인 기술을 결합한 결과물이 바로 리플 USD다. XRP의 변동성 때문에 망설이던 기관들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면서도, 블록체인의 효율성은 그대로 유지한다.


국경 간 송금 시장은 여전히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높다. 중개 은행을 여러 단계 거치면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수수료도 과도하다. 블록체인 기술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바로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실시간 정산이 가능하고, 투명하며, 비용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승자를 가르는 기준은 단순히 시가총액이 아니다. 어떤 사용자층을 확보했는지, 어떤 인프라 위에서 작동하는지, 규제 준수 수준은 어떠한지가 더 중요하다. 기관용 시장이라는 명확한 타겟과 리플넷이라는 기존 인프라, 그리고 뉴욕 신탁 라이선스라는 규제 우위를 갖춘 점이 경쟁력이다.


앞으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히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거래 쌍으로 사용되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다. 실물 경제와 디지털 경제를 연결하는 결제 인프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은행 간 정산에 집중하는 전략은 바로 이런 미래를 겨냥한 포석이다. 리플은 개인 사용자보다 기관 고객을 우선시하며, 대규모 자금 흐름이 일어나는 B2B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결국 성패는 리플이 얼마나 많은 금융 기관을 설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기술적 우수성만으로는 부족하고, 규제 대응력과 네트워크 효과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 기존 은행들과의 관계, 규제 당국과의 협력, 그리고 개발자 커뮤니티의 지원이 모두 필요하다. 리플 USD는 지난 10년간 쌓아온 자산을 스테이블코인 형태로 구현한 결과물이며, 국경 없는 금융 인프라를 향한 리플의 장기 비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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