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 없는 금융, 코드만 남은 스테이블코인의 실험

by 심준규 Jace Shim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LUSD만큼 극단적인 탈중앙화를 추구하는 사례는 드물다. 2021년 4월 리퀴티(Liquity) 프로토콜이 배포한 순간부터 단 한 명의 운영자도, 그 어떤 관리 권한도 남겨두지 않았다. 코드가 배포된 이후에는 창립자조차 시스템을 멈추거나 수정할 수 없는 불변성(Immutability)을 핵심 설계 원칙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디파이(DeFi) 프로젝트가 '긴급 상황'을 대비해 관리자 키를 보유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백도어는 해킹이나 시장 급변 시 유연한 대응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검열과 통제의 여지를 남긴다. 리퀴티는 처음부터 그런 선택지를 포기했다.


2022년 테라-루나 붕괴 당시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들이 연쇄 디페깅을 일으켰고,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때는 중앙화된 법정화폐 담보 코인들이 신뢰 위기를 겪었다. 그 혼란 속에서 이 프로토콜은 단 한 차례의 시스템 중단도 없이 1달러 페깅을 유지했다. 시장은 '최후의 보루'라는 별명을 붙였다.


시가총액은 2026년 2월 현재 약 8억 달러 수준이다. USDT(테더)나 USDC(USD코인) 같은 거대 스테이블코인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의도된 결과다. 리퀴티는 오직 이더리움(ETH, Ethereum)만을 담보 자산으로 인정하는 극도로 보수적인 정책을 고수한다.


다른 프로토콜들이 더 많은 사용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암호화폐를 담보로 받아들이는 동안, 이 시스템은 가장 검증된 단일 자산에만 의존하는 전략을 택했다. 규모의 경제보다 신뢰의 밀도를 우선순위에 둔 선택이다. 하락장에서 여러 담보 자산을 관리하는 프로토콜들이 복잡한 청산 과정에서 혼란을 겪을 때, 단순한 구조는 완벽하게 작동했다.


프로토콜을 선택하는 사용자 층은 명확하다. 첫째는 익명성을 중시하는 집단이다. 리퀴티는 자체적으로 프론트엔드 웹사이트를 운영하지 않고, 여러 제3자가 독립적으로 접근 경로를 제공하도록 설계했다. 특정 도메인이 차단되거나 검열당해도 프로토콜 자체는 영향받지 않는 구조다.


영지식 증명(ZKP, Zero-Knowledge Proof) 기술과 결합하면 사용자는 자신의 신원이나 자산 규모를 드러내지 않고도 대출을 실행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이나 금융 감시가 강한 환경에서 자산을 보호하려는 수요가 있다. 두 번째 주요 사용자는 장기 이더리움 보유자들이다.


이더리움을 매도하지 않고 유동성을 확보하고 싶은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다. 일반적인 디파이 대출 프로토콜이 연간 이자율을 부과하는 반면, 리퀴티는 0%의 지속 이자와 단 한 번의 소액 수수료만 요구한다. 이더리움 가격 상승을 기대하면서도 당장의 현금 흐름이 필요한 실속파 투자자들이 선호하는 이유다.


세 번째는 거버넌스(Governance) 리스크를 혐오하는 디파이 사용자들이다. 메이커다오(MakerDAO)의 DAI(다이)처럼 토큰 홀더의 투표로 담보 비율이나 이자율이 변경되는 구조를 신뢰하지 않는 집단이다. 정치적 협상이나 대형 보유자의 영향력이 아닌, 오직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해서만 자산이 관리되길 원한다.


청산 메커니즘은 독특하다. 일반적인 담보 대출 프로토콜은 담보 가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외부 청산자가 담보를 경매로 처분한다. 리퀴티는 '안정성 풀(Stability Pool)' 시스템을 운영한다. 보유자들이 자발적으로 코인을 풀에 예치하면, 청산 발생 시 해당 코인이 소각되는 대신 청산된 이더리움을 할인가에 받아간다.


청산 과정이 프로토콜 내부에서 자동으로 완결되며, 외부 시장 상황이나 청산자의 유동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2022년 극심한 시장 변동성 속에서도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한 핵심 이유다. 안정성 풀 참여자들은 청산 보상으로 추가 수익을 얻으면서 동시에 프로토콜의 건전성을 지키는 인센티브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기술적 기반은 전적으로 이더리움 메인넷이다. 가장 탈중앙화되고 검증된 블록체인 위에서만 핵심 로직을 실행한다는 원칙을 지킨다. 담보 예치, 대출 발행, 청산 메커니즘 모두 이더리움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로 구현되어 있다. 높은 가스비를 감수하더라도 최고 수준의 보안과 불변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다.


실제 사용 단계에서는 레이어 2(L2, Layer 2) 네트워크가 활용된다. 옵티미즘(Optimism), 아비트럼(Arbitrum) 같은 이더리움 확장 솔루션에서 송금과 거래가 활발히 일어난다. 발행은 보안이 최우선인 메인넷에서, 유통은 효율성이 중요한 레이어 2에서 이루어지는 이원화 전략이다.


특히 영지식 증명 기반 레이어 2 네트워크들이 프라이버시 강화 송금 서비스의 기본 통화로 채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거래 내역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검증 가능한 가치 이전을 구현하는 데 리퀴티의 철학이 부합하기 때문이다. 운영자 없는 시스템과 익명성 보장 기술의 결합은 금융 프라이버시를 추구하는 사용자들에게 강력한 조합이다.


리퀴티 V2 출시가 앞으로의 중요한 변곡점이다. 기존의 불변성과 단순성을 유지하면서도 담보로 예치된 이더리움의 스테이킹(Staking) 수익을 활용해 사용자에게 더 높은 자본 효율을 제공할 계획이다. 현재 시스템에서는 담보로 잠긴 이더리움이 아무런 수익을 내지 못하지만, V2에서는 검증자 보상을 받으면서도 담보 기능을 유지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규제 환경의 변화도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유럽에서 스테이블코인 규제가 강화되면서 중앙화된 발행 주체를 가진 코인들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부담이 커지고 있다. 반면 이 프로토콜은 규제 대상이 될 '주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코드만 있고 운영자가 없는 시스템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는 여전히 법적 회색지대다.


역설적이게도 규제가 강화될수록 '규제 불가능한' 특성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전통 금융 시스템에서 접근이 제한된 사용자들, 국경 간 송금에서 높은 수수료와 긴 처리 시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안이 된다. 중세 이슬람 상인들이 사용하던 하왈라(Hawala) 시스템처럼, 신뢰할 수 있는 네트워크 하나만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가치를 이동시키는 인프라로 자리 잡을 잠재력이 있다.


한계도 명확하다. 이더리움 단일 담보 정책은 안정성을 보장하지만 확장성에는 제약이다. 이더리움 가격이 급락하는 극단적 상황에서는 대규모 청산이 발생할 수 있고, 안정성 풀의 자금이 부족하면 시스템 전체의 담보 비율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질 위험이 있다. 불변성은 양날의 검이다. 예상치 못한 취약점이 발견돼도 코드를 수정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리퀴티가 제시하는 비전은 명확하다. 금융 시스템에서 신뢰는 반드시 사람이나 기관에서 나올 필요가 없다. 투명하게 공개된 코드, 검증 가능한 알고리즘,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만으로도 충분히 작동하는 화폐를 만들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가졌는지 일일이 증명하지 않아도, 수학이 보증하는 담보가 있다면 누구나 평등하게 달러를 쓸 수 있다는 철학이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중앙화된 거대 발행자들과 복합적인 거버넌스 구조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가는 동안, 리퀴티는 가장 극단적인 지점에서 실험을 계속한다. 규모는 작지만 신념은 확고하다. 운영자 없는 금융이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임을 매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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