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GHO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어제 다룬 LUSD(LUSD)가 운영자 없는 불변의 코드를 강조했다면, GHO는 세계 최대 온체인 은행인 에이브(Aave)가 직접 발행하여 강력한 유동성과 플랫폼 파워를 등에 업은 모델이다. 금융 인프라가 스스로 화폐를 만들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2023년 7월 에이브 다오(Aave DAO)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출시되었다. 거버넌스 투표에서 99%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에이브 프로토콜은 이미 수십억 달러의 자산이 예치된 거대 플랫폼이었지만, 그동안 테더(USDT)나 USD코인(USDC) 같은 타사 스테이블코인을 빌려주는 중개자 역할에 머물렀다.
GHO 출시는 에이브가 "우리가 직접 화폐를 발행하여 수익을 내고 생태계를 장악하겠다"고 선언한 전략적 전환점이다. 플랫폼 사용자들이 담보를 맡기고 돈을 빌릴 때, 이제 제3자 발행 화폐가 아닌 에이브 자체 통화를 빌려가는 구조다. 대출 이자 수익이 외부로 새나가지 않고 프로토콜 내부에 축적된다.
시가총액은 2026년 2월 현재 약 3억 200만 달러(한화 약 4,000억 원) 수준이다. 작년 한 해 동안 공급량이 10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26년 말까지 10억 달러 달성을 목표로 순항 중이다. 에이브 전체 매출의 약 10% 이상이 이미 발행 이자에서 발생할 정도로 플랫폼 내 핵심 수익원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 은행이 예금을 받아 대출을 실행하며 이자 마진을 챙기듯, 에이브는 암호화폐 담보를 받아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대출하며 수익을 창출한다. 차이점은 모든 과정이 블록체인 위에서 투명하게 실행되고, 중간 관료 조직 없이 스마트 컨트랙트가 자동으로 처리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의 중앙은행 모델이 민간 프로토콜 차원에서 구현된 형태다.
주요 사용자 층은 명확하다. 첫째는 에이브에 자산을 예치한 기존 사용자들이다. 플랫폼에 담보를 맡긴 사용자는 GHO를 빌릴 때 이자 할인을 받는다. 특히 AAVE 토큰(Aave프로토콜의 거버넌스 토큰)을 스테이킹(Staking)한 사용자는 더 큰 할인 혜택을 받아 가장 저렴하게 달러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로열티 프로그램과 유사한 구조다. 플랫폼에 더 깊이 참여하고 거버넌스 토큰을 보유할수록 금융 서비스 이용 비용이 낮아진다. 에이브 생태계 내부 순환을 강화하는 인센티브 설계다. 외부 스테이블코인을 빌리면 표준 이자율을 내야 하지만, 자체 발행 화폐를 선택하면 할인받는 구조는 사용자를 플랫폼에 묶어두는 효과가 있다.
두 번째 사용자 층은 디파이(DeFi) 트레이더들이다. GHO는 '플래시 민트(Flash Mint)' 기능을 지원한다. 담보 없이 한 트랜잭션 내에서 거액을 빌렸다가 같은 블록 안에서 갚을 수 있다. 차익 거래(Arbitrage)를 노리는 트레이더들에게 필수 도구다.
서로 다른 거래소에서 같은 자산의 가격 차이가 발생하면, 플래시 민트로 순간적으로 자금을 조달해 저가 매수 후 고가 매도로 차익을 남기고 즉시 상환한다. 전통 금융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무담보 초단기 대출이지만, 블록체인의 원자성(Atomicity) 덕분에 가능하다. 거래가 실패하면 전체 트랜잭션이 롤백되므로 대출자 입장에서도 리스크가 없다.
세 번째는 웹3(Web3) 서비스 이용자들이다. 최근 렌즈 프로토콜(Lens Protocol) 같은 소셜 미디어 블록체인에서 가스(Gas) 수수료 결제 수단으로 채택되면서 일상적인 결제 수단으로서의 쓰임새가 늘고 있다. 탈중앙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콘텐츠를 올리거나 상호작용할 때 드는 비용을 GHO로 지불한다.
기술적 기반은 다층 구조다. 이더리움(Ethereum)이 발행의 원천이다. 가장 깊은 담보 자산이 쌓여 있는 메인 레이어다. 에이브 프로토콜의 핵심 유동성이 이더리움 메인넷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발행 메커니즘도 여기 위치한다.
실질적인 사용처는 레이어 2(L2) 네트워크들이다. 아비트럼(Arbitrum)과 베이스(Base)에서 활발하게 거래된다. 체인링크(Chainlink)의 CCIP(Cross-Chain Interoperability Protocol) 기술을 활용해 레이어 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특히 베이스에서는 0.01달러 미만의 낮은 수수료로 결제가 가능하여 개인 사용자 비중이 높다.
최근에는 아발란체(Avalanche)로까지 확장했다. 이더리움 생태계 밖의 유동성까지 흡수하기 시작한 신호다. 단일 블록체인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네트워크에서 작동하는 범용 스테이블코인으로 진화하고 있다. 각 체인의 장점을 활용하는 전략이다. 이더리움의 보안, 레이어 2의 속도와 저렴함, 아발란체의 확장성을 모두 취한다.
에이브 V4 업그레이드가 향후 전망의 핵심이다. 2026년 로드맵을 통해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 구조를 도입한다. 중심 허브가 있고 주변에 여러 스포크(바퀴살)가 연결된 형태다. GHO는 구조의 중심축이 되어 수많은 레이어 2 사이를 잇는 범용 기축 통화 역할을 맡는다.
여러 블록체인을 가로지르는 가치 이동의 매개체가 되는 전략이다. 각 체인에서 발생하는 경제 활동이 GHO를 통해 연결된다. 마치 국제 무역에서 달러가 결제 통화로 쓰이듯, 체인 간 거래에서 표준 단위가 되는 목표다. 플랫폼이 성장할수록 자체 화폐의 네트워크 효과도 커지는 선순환 구조다.
제도권 진입도 가시화되고 있다. 2025년 11월 유럽의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를 준수하는 법정화폐 게이트웨이를 확보했다. 유럽 내에서 수수료 없는 결제망이 확산되고 있다. 규제 준수형 온램프와 오프램프가 확보되면서 기관 자금이 온체인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 금융 기관들이 암호화폐 시장에 진입할 때 가장 큰 장벽은 규제 불확실성이다. MiCA 인증을 받은 스테이블코인은 유럽연합 전역에서 합법적으로 사용 가능한 디지털 자산이다. 은행이나 자산운용사가 고객 자금을 온체인으로 이동시킬 때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없이 활용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긴 셈이다.
GHO의 전략은 명확하다. 거대 플랫폼이 쌓아온 신뢰와 유동성을 화폐 발행 권한으로 전환한다. 사용자들은 이미 에이브를 신뢰하고 자산을 맡겼기 때문에, 같은 플랫폼이 발행하는 화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프로토콜들도 GHO를 기본 통화로 채택하게 된다.
리퀴티(Liquity)가 제시한 '운영자 없는 순수 코드' 접근법과 정반대 지점에 있다. GHO는 강력한 거버넌스와 중앙화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프로토콜이 발행한다. 에이브 다오가 투표로 정책을 바꿀 수 있고, 담보 비율이나 이자율을 조정할 권한이 있다. 유연성과 적응력을 택한 대신 불변성을 포기했다.
두 모델 중 어느 쪽이 더 성공할지는 아직 결론나지 않았다. 리퀴티의 LUSD는 규모는 작지만 위기 상황에서 흔들림 없는 신뢰를 증명했다. GHO는 빠른 성장과 제도권 진입으로 주류 시장 공략에 나섰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다양한 전략들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에이브 V4와 결합된 미래 모습은 '디지털 경제의 국책 은행' 같은 형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 수많은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중심 결제 인프라, 각국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와 경쟁하는 민간 화폐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플랫폼이 화폐를 만들었을 때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위험도 존재한다. 에이브 프로토콜 자체에 기술적 취약점이 발견되거나 거버넌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GHO의 신뢰도 함께 흔들린다. 플랫폼 종속성이 강한 만큼 단일 실패 지점(Single Point of Failure)의 리스크를 안고 있다. 중앙화된 힘의 이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럼에도 시장은 GHO에 주목하고 있다. 이미 검증된 대형 플랫폼이 자체 화폐 발행으로 얻는 전략적 우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기반, 유동성, 기술 인프라, 제도권 연결 고리까지 모두 갖춘 상태에서 출발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판도를 바꿀 잠재력을 지닌 프로젝트다.
핵심 키워드: GHO, 에이브, 네이티브 스테이블코인, 플래시 민트, 허브 앤 스포크, MiCA 규제, CCIP, 에이브 V4, 레이어 2 확장, 디파이 수익 모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