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 역사에서 FRAX(프랙스)만큼 독창적인 기술 실험을 이어온 사례는 드물다. 앞서 살펴본 USDC(USD코인)나 PYUSD(페이팔USD)처럼 100% 법정화폐 담보를 요구하지도 않고, 테라-루나처럼 담보 없이 알고리즘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으려는 '하이브리드' 접근법이 핵심이다.
2020년 12월 샘 카제미안(Sam Kazemian)이 "세계 최초의 분수 예비(Fractional-Algorithmic) 스테이블코인"으로 출시했다. 발행량의 일부는 실물 자산으로 뒷받침하고, 나머지는 알고리즘과 시장 메커니즘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구조다. 담보 비율(CR, Collateral Ratio)이 고정되지 않고 시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절된다.
전통적인 100% 담보 모델은 안정적이지만 자본 효율이 낮다. 1달러를 발행하려면 정확히 1달러 상당의 자산을 묶어둬야 한다. 반대로 알고리즘 방식은 자본 효율은 높지만 시장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연쇄 붕괴 위험이 있다. FRAX는 양쪽의 장점만 취하겠다는 야심찬 설계로 출발했다.
2026년 1월 중순 대대적인 전환이 있었다. 기존 거버넌스 토큰이었던 FXS를 FRAX 생태계 토큰으로 통합하는 리브랜딩과 스왑을 단행했다. 단순한 프로토콜을 넘어 하나의 '스테이블코인 운영체제(OS)'로 진화하겠다는 선언이다. 발행 메커니즘, 블록체인 인프라, 금융 서비스 플랫폼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유통량은 2026년 2월 현재 약 6억 달러 이상이다. 시가총액 순위는 20위권으로 거대 스테이블코인들에 비하면 작지만, 최근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블랙록(BlackRock)의 BUIDL 펀드 및 슈퍼스테이트(Superstate)와 파트너십을 맺고 미국 국채로 뒷받침되는 frxUSD를 출시했다. 실물 자산(RWA, Real World Asset) 기반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블랙록 같은 전통 금융 거물과의 협력은 단순한 제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인정하는 온체인 자산 관리 구조를 갖췄다는 신호다. frxUSD는 형식적으로는 암호화폐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국채 수익률을 추적하는 토큰화된 채권 상품에 가깝다. 규제 당국이 선호하는 '실물 뒷받침'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블록체인의 효율성을 활용한다.
주요 사용자 층은 세 그룹으로 나뉜다.
첫째는 자본 효율성을 중시하는 투자자들이다. 담보 비율이 시장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조절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담보로도 안정적인 달러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완전 담보 모델보다 같은 자본으로 더 많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수익률 사냥꾼들이다. sFRAX(스테이킹된 FRAX)를 통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실물 금리에 연동된 수익을 온체인에서 바로 얻는다. 전통 금융에서 국채를 사거나 머니마켓펀드에 가입해야 얻을 수 있는 무위험 수익률을, 지갑에서 클릭 몇 번으로 확보한다. 개인 및 기관 투자자 모두에게 매력적인 옵션이다.
세 번째는 개발자와 빌더들이다. 최근 바이낸스가 지원하기 시작한 프락스탈(Fraxtal) 네트워크 위에서 고성능 디파이(DeFi) 앱을 구축하려는 개발 진영의 참여가 활발하다. 자체 블록체인을 보유한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는 흔하지 않다. 인프라를 직접 통제하면서 생태계 전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술 구조는 다층적이다. 프락스탈은 FRAX 파이낸스가 직접 구축한 이더리움 레이어 2(L2) 네트워크다. 가장 큰 특징은 FRAX를 네트워크 수수료(가스)로 직접 사용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레이어 2가 이더(ETH)를 가스로 쓰는 것과 차별화된다. 프락스탈에서 거래할 때마다 FRAX 수요가 발생하는 구조다.
모듈러 블록체인 아키텍처를 채택했다. 실행, 합의, 데이터 가용성 등 각 기능을 분리해 독립적으로 최적화한다. 보안은 이더리움 메인넷에 의존하면서도 확장성은 자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2026년 4월 예정된 '노스 스타(North Star)' 하드포크를 통해 리얼타임 블록 생성과 10만 TPS(초당 거래 처리량)를 목표로 한다.
이더리움 메인넷은 여전히 신뢰의 뿌리다. 핵심 스마트 컨트랙트와 거대한 유동성 풀이 위치한 기반 레이어다. 담보 자산 관리, 발행 및 소각 메커니즘, 거버넌스 투표 같은 중요한 기능은 가장 검증된 블록체인에서 실행된다. 프락스탈은 확장과 실험의 공간이고, 이더리움은 최종 정산의 장소다.
유동성 관리에서는 커브(Curve)와 컨벡스(Convex) 같은 디파이 프로토콜이 핵심 역할을 한다. FRAX의 페깅(가치 고정)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깊은 유동성이 공급되는 인프라들이다. 스테이블코인 간 교환에 특화된 커브 풀에 막대한 규모의 FRAX-USDC 페어가 존재한다. 시장에서 FRAX 가격이 1달러에서 벗어나려 하면 차익거래자들이 즉시 개입해 균형을 맞춘다.
향후 전망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규제 대응이다. 2026년 로드맵의 핵심으로 '미국 지불용 스테이블코인 헌장(Charter)' 확보를 내걸었다. 단순히 코인을 발행하는 것을 넘어 제도권 내에서 공식적인 '디지털 달러 발행사' 지위를 얻으려는 행보다. 은행이나 머니트랜스미터처럼 명확한 법적 지위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미국에서 스테이블코인 규제 법안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선제적으로 컴플라이언스 체계를 갖추려는 시도다.
테라-루나 붕괴 이후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당국의 시선이 곱지 않다. FRAX는 하이브리드 모델과 실물 자산 뒷받침을 강조하며 '안전한' 범주에 들어가려 노력한다. 블랙록과의 파트너십도 같은 맥락이다.
인프라 확장도 가속화된다. 노스 스타 하드포크가 성공하면 프락스탈은 결제 인프라로서의 경쟁력이 크게 강화된다. 10만 TPS면 비자(Visa) 같은 전통 결제 네트워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실시간 블록 생성은 거래 확정 시간을 대폭 줄여 실생활 결제에 적합한 사용자 경험을 제공한다.
FRAX는 이제 단순한 코인이 아니다. 블록체인(프락스탈) + 스테이블코인(frxUSD) + 핀테크 플랫폼(FraxNet)이 결합된 거대한 생태계로 거듭나고 있다. 각 구성 요소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다. 프락스탈에서 활동이 늘면 FRAX 수요가 증가하고, frxUSD가 제도권에 안착하면 전체 생태계의 신뢰도가 올라간다.
물론 위험도 존재한다. 하이브리드 모델은 복잡성이 높다. 담보 비율을 조정하는 알고리즘이 시장 급변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페깅이 깨질 수 있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 당시 FRAX도 일시적으로 0.88달러까지 하락한 적이 있다. 시스템이 스트레스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극단적 상황에서의 안정성은 여전히 검증 과정에 있다.
프락스탈 네트워크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도 양날의 검이다. 자체 인프라를 통제하면 생태계 최적화가 가능하지만, 레이어 2 시장에서 옵티미즘(Optimism)이나 아비트럼(Arbitrum) 같은 거대 네트워크와 경쟁해야 한다. 개발자와 사용자를 끌어들이는 네트워크 효과 싸움에서 밀리면 전체 전략이 흔들릴 수 있다.
그럼에도 FRAX의 실험은 계속된다. 100% 담보와 무담보 알고리즘 사이 어딘가에 최적점이 있다는 가설을 실제로 검증하는 중이다. 자본 효율성과 안정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면,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 블랙록과의 협력이 보여주듯 전통 금융과 암호화폐의 가교 역할도 수행한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가치 저장 수단을 넘어 금융 인프라 전체로 진화하는 과정을 FRAX는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폐 발행, 블록체인 운영, 규제 준수, 제도권 협력까지 모든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인다. 성공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시도 자체가 업계 전체에 중요한 학습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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