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의 지갑 전쟁, 카드 없는 결제 시대가 온다

by 심준규 Jace Shim

애플페이나 구글페이는 편리하지만 여전히 기존 신용카드 네트워크에 의존한다. 비자(Visa)나 마스터카드(Mastercard) 같은 결제망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2~3%의 수수료와 T+2일(이틀 뒤 정산) 시차를 감수해왔다. 빅테크 기업들에게 이는 늘 해결하고 싶은 숙제였다.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지갑에 직접 이식한다면 기존 금융망을 거치지 않는 'P2P(개인간) 결제 고속도로'가 열린다.


결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과 시간은 디지털 경제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온라인 쇼핑몰이 물건을 팔아도 대금은 며칠 뒤에 들어온다. 중간에 카드사, 매입사(VAN), 결제대행사(PG)가 각자 수수료를 떼어간다. 소액 결제일수록 수수료 비중이 커져 사업성이 악화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력이 있다.


애플과 구글은 스마트폰 운영체제(OS) 레벨에서 스테이블코인 전용 칩을 활성화할 수 있다. 시큐어 엘리먼트(Secure Element) 같은 하드웨어 보안 모듈에 암호화폐 지갑 기능을 내장하는 방식이다. 사용자가 상점에서 QR코드나 NFC(근거리 무선통신)로 결제하는 순간 판매자 지갑으로 스테이블코인이 즉시 전송된다.


즉시 정산(Instant Settlement)이 가능해진다. 카드 결제처럼 며칠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블록체인 네트워크에서 거래가 확정되는 몇 초 내지 몇 분이면 끝난다. 수수료는 0.1% 수준으로 낮아진다. 기존 카드 수수료의 수십분의 1이다. 절감된 비용은 가맹점의 마케팅 재원이나 소비자 할인으로 돌아간다.


메타(Meta)는 소셜 미디어를 결제 인프라로 전환할 수 있다. 왓츠앱(WhatsApp)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 안에서 채팅하듯 스테이블코인을 보낸다. 인스타그램에서 인플루언서의 제품을 보고 구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중간 결제 대행사 없이 판매자에게 직접 대금이 전달된다. 소셜 커머스와 금융 서비스의 경계가 사라진다.


메타는 이미 디엠(Diem, 구 리브라) 프로젝트로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규제 압박으로 프로젝트는 중단됐지만 기술과 경험은 축적됐다. 이제는 직접 발행하는 대신 기존 스테이블코인(PYUSD, USDC 등)을 플랫폼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규제 리스크는 줄이면서 결제 혁신은 달성하는 전략이다.


비즈니스 혁신의 핵심은 폐쇄형 루프(Closed-loop) 생태계 구축이다. 플랫폼 안에서만 통용되는 스테이블코인을 쓰게 함으로써 사용자들을 락인(Lock-in)시킨다. 페이팔(PayPal)의 PYUSD(페이팔USD)가 대표적 사례다. 페이팔 계정 간 송금은 수수료가 없거나 매우 낮지만, 외부로 출금하면 비용이 발생한다. 플랫폼 내부 순환을 유도하는 구조다.


사용자가 플랫폼을 떠나기 어렵게 만드는 전략이다. 잔고가 쌓이고, 거래 내역이 누적되고, 혜택이 주어지면 다른 서비스로 옮기는 전환 비용(Switching Cost)이 높아진다. 전통적인 은행 계좌와 비슷한 끈끈함을 디지털 지갑에 구현한다. 네트워크 효과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선순환이 가속화된다.


데이터의 가치도 중요하다. 결제 데이터가 기존 은행망에 분산되지 않고 빅테크 기업에 온전히 쌓인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샀는지 완전한 그림이 그려진다. 더 정교한 디지털 마케팅과 인공지능(AI) 기반 개인화 추천으로 이어진다. 광고 타겟팅 정확도가 올라가고, 신용 평가 모델을 자체적으로 구축할 수도 있다.


아마존(Amazon)은 이미 자체 신용카드와 결제 서비스를 운영하며 고객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추가되면 데이터 수집 범위가 플랫폼 밖 오프라인 결제까지 확장된다. 사용자의 소비 패턴 전체를 파악하는 빅브라더가 될 수 있다. 프라이버시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빅테크의 진입은 스테이블코인 대중화(Mass Adoption)를 이끌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수억 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플랫폼이 결제 수단으로 채택하는 순간 보급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진다. 암호화폐 지갑을 따로 설치하거나 복잡한 개인키 관리를 할 필요 없이 익숙한 앱 안에서 모든 게 해결된다.


사용자 경험(UX) 장벽이 크게 낮아진다.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에 대한 이해 없이도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하게 된다. 마치 이메일을 쓰면서 SMTP 프로토콜을 몰라도 되는 것처럼, 기술은 백엔드에 숨고 편리함만 전면에 드러난다. 페이팔이 PYUSD를 도입하면서 "암호화폐가 아니라 디지털 달러"라고 홍보한 이유다.


과제도 만만치 않다. 각국 정부의 반독점 규제가 첫 번째 장애물이다.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시장 지배력 남용 문제로 규제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 결제 시장까지 장악하려는 시도는 추가적인 규제 압박을 불러온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시장법(DMA)으로 게이트키퍼 플랫폼의 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통화 주권 침해 논란도 뜨겁다. 민간 기업이 발행하고 통제하는 화폐가 국가 통화를 대체하기 시작하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효과가 약화된다. 금리 조정이나 통화량 조절 같은 정책 도구가 무력화될 수 있다. 중국이 빅테크 기업의 금융 사업을 강력히 규제하는 배경이다. 알리페이나 위챗페이의 영향력이 커지자 정부가 개입해 통제권을 회복했다.

2026년 하반기 애플이 자체 월렛에 USDC(USD코인)나 RLUSD(리플USD) 같은 주요 스테이블코인을 공식 탑재하는 시점이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의 글로벌 사용자 기반과 브랜드 신뢰도를 고려하면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사건이다.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연쇄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규제 당국과 빅테크 간 줄다리기가 계속될 것이다. 기업들은 혁신과 효율성을 앞세우고, 정부는 금융 안정성과 소비자 보호를 강조한다.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새로운 규칙들이 만들어진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라이선스, 준비금 요건, 소비자 보호 기준 같은 제도적 틀이 구체화될 것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더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기존 금융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일수록 새로운 디지털 결제 시스템이 자리 잡기 쉽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모바일 머니가 은행 계좌를 건너뛰고 보급된 것처럼, 스테이블코인도 유사한 경로를 밟을 수 있다. 빅테크 플랫폼들은 이미 이 시장에 깊숙이 진출해 있다.


지갑 전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 단순히 기술력이나 자본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규제 대응 능력, 사용자 신뢰 확보, 생태계 구축 속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먼저 움직이는 기업이 선점 효과를 누리지만, 규제 리스크도 가장 먼저 떠안는다. 신중하게 기다리는 기업은 안전하지만 시장을 놓칠 수 있다.


결제 인프라의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경제 권력의 재편을 의미한다. 누가 화폐 흐름을 통제하느냐가 누가 경제를 지배하느냐를 결정한다. 신용카드 네트워크가 20세기 후반 금융 패권을 쥐었듯,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장악하는 플랫폼이 21세기 디지털 경제의 중심이 될 것이다. 빅테크의 지갑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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