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경제 시대, 암호화폐 시장이 직면한 가장 큰 아이러니는 '화폐'라 부르면서도 정작 결제 수단으로 쓰기 어렵다는 점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하루 10% 이상 요동치는 상황에서 커피 한 잔 값을 암호화폐로 지불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기업 재무담당자 입장에서 보면 더욱 심각한데, 오늘 받은 대금이 내일이면 20% 가치가 증발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회계 시스템도 정상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스테이블 코인이 등장한다. 비트코인이 기존 금융 시스템에 대한 철학적 도전이었다면, 스테이블 코인은 블록체인 기술과 전통 금융의 실용적 결합이다. 가격 변동성을 제거하면서도 암호화폐의 장점인 즉시 송금, 국경 없는 거래, 투명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이 설계 원리다.
가장 직관적인 방식은 법정화폐 담보 모델이다. 발행사가 사용자로부터 1달러를 받으면 정확히 1개의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고, 받은 달러는 안전한 금융자산에 보관한다. 테더(USDT)나 USD코인(USDC) 같은 주요 스테이블 코인이 채택한 방식인데, 발행된 모든 코인만큼 실물 자산이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은행의 예금증서와 유사하다.
담보 자산의 구성은 단순한 현금 보유를 넘어선다. 미국 단기 국채, 회사채, 예금증서 등 유동성 높은 금융상품 포트폴리오로 운영되며, 일부 발행사는 이자 수익을 사용자에게 환원하기도 한다. 테더의 경우 2024년 기준 약 1,30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 중인데, 이는 웬만한 중견 국가의 외환보유액 규모다.
하지만 이 모델의 약점은 명확하다. 발행사가 정말 약속한 만큼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지 누가 검증하는가? 2021년 테더가 뉴욕 검찰로부터 자산 구성의 투명성 문제로 제재받은 사례는 중앙화된 신뢰 구조의 취약점을 드러냈다. 규제당국의 감독 없이 민간 기업이 수천억 달러 규모의 화폐를 발행한다는 구조 자체가 금융 시스템 관점에서는 리스크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암호화폐 담보형 모델이다. 달러 대신 이더리움 같은 암호화폐를 담보로 잡아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는 방식인데, 메이커다오(MakerDAO)의 다이(DAI)가 대표적이다. 블록체인상에서 모든 담보와 발행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므로 중앙 발행사에 대한 신뢰가 불필요하다.
담보 암호화폐의 가격 변동성을 상쇄하기 위해 과담보 방식을 채택한다. 100달러 상당의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려면 150달러 이상의 이더리움을 예치해야 하는 식이다. 담보 가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스마트 계약이 자동으로 담보를 청산해 스테이블 코인 가치를 유지한다.
세 번째 방식은 알고리즘형으로, 담보 자산 없이 수요와 공급을 자동 조절하며 가격을 유지한다. 가격이 1달러를 넘으면 코인을 추가 발행해 공급을 늘리고, 1달러 밑으로 떨어지면 시장에서 코인을 회수해 공급을 줄이는 메커니즘이다. 2022년 테라-루나 사태로 이 모델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지만, 최근 에테나(Ethena)의 USDe는 파생상품 헤지 전략을 결합한 새로운 합성 달러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기술적 관점에서 스테이블 코인의 진정한 혁신은 프로그래머블 머니(programmable money) 개념이다. 전통적인 송금은 은행 시스템을 거쳐야 하지만, 스테이블 코인은 스마트 계약과 결합해 조건부 지급, 자동 정산, 즉시 결제가 가능하다. 국제 무역에서 신용장 없이도 대금 지급과 물품 인도를 자동 연계할 수 있고, 급여 지급부터 구독 서비스 결제까지 자동화할 수 있다.
실물 경제와의 접점도 확대되고 있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 코인 결제 지원을 발표했고,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 코인 PYUSD를 출시했다. 리플의 RLUSD는 국제 송금 시장을 겨냥하며, 싱가포르와 홍콩 같은 금융 허브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스테이블 코인 실험을 적극 지원한다.
규제 환경도 변화 중이다. 유럽연합의 MiCA(암호자산시장규제) 법안은 스테이블 코인 발행사에 은행 수준의 자본 요건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미국은 주별로 접근 방식이 다르지만, 연방 차원의 스테이블 코인 법안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규제 명확성 확보는 기관 투자자와 전통 금융사의 참여를 이끄는 핵심 요소다.
스테이블 코인의 경제적 의미는 화폐 주권의 재편으로까지 확장된다. 자국 통화가 불안정한 신흥국에서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이 사실상 대체 통화로 기능한다. 아르헨티나나 터키처럼 인플레이션이 심한 국가에서 시민들이 자산 보호 수단으로 스테이블 코인을 선택하는 현상은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효과를 약화시킬 수 있다.
반대로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서두르는 계기가 됐다. 민간 스테이블 코인이 결제 인프라를 장악하기 전에 공공 부문이 디지털 화폐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이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유럽중앙은행의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는 모두 스테이블 코인 확산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다.
기업 재무 관점에서 스테이블 코인은 자금 관리 효율성을 높인다. 국제 거래 시 환전 수수료와 송금 시간을 줄이고, 24시간 즉시 결제가 가능해 자금 회전율이 개선된다. 일부 기업은 유휴 자금을 스테이블 코인으로 보유하며 수익을 창출하는데, 디파이(DeFi) 플랫폼에서 연 5~10%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리스크도 존재한다. 발행사 파산 위험, 규제 변화, 기술적 취약점, 해킹 등이 대표적이다. 2023년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당시 USDC 가격이 일시적으로 급락한 사례는 스테이블 코인도 전통 금융 시스템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담보 자산이 안전한 은행에 예치돼 있어도 해당 은행이 무너지면 연쇄 효과가 발생한다.
향후 스테이블 코인 시장의 방향성은 규제와 혁신의 균형에 달려 있다. 과도한 규제는 기술 혁신을 저해하지만, 규제 공백은 시스템 리스크를 키운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의 접근법처럼 명확한 가이드라인 하에서 실험을 허용하는 방식이 참고할 만하다.
결국 스테이블 코인은 디지털 경제의 결제 레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암호화폐 거래소 내부에서만 쓰이던 도구가 이제 실물 경제 거래의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가치 저장'의 실험이었다면, 스테이블 코인은 '교환 수단'으로서 화폐 본연의 기능에 더 가깝다. 변동성이라는 암호화폐의 치명적 약점을 제거하면서도 블록체인의 장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자산 시장이 주류 금융으로 편입되는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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