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첫 균열

by J이렌


다니엘은 회계 시스템에서 추출한 엑셀 파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VLOOKUP, INDEX-MATCH, PIVOT. 이건 더 이상 단순한 데이터 분석이 아니었다.

그녀는 숫자라는 언어로 말하고 있었고, 그 숫자들이 지금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Altavia... Syntellis... 왜 두 회사 이름이 같은 프로젝트 코드에 묶여 있지?”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 회사는 전혀 다른 분야의 벤더였고, 하나는 위성 부품 공급업체, 다른 하나는 회계 소프트웨어 컨설팅 기업이었다.

이 둘이 같은 비용 코드 아래 연결돼 있다는 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실수일 수도 있겠지... 아니, 실수라기엔 너무 정교해.”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 문을 닫고, 엑셀 파일을 다시 열었다.

‘접근 제한된 감사 파일’이라는 이름의 폴더를 떠올렸다.

그 폴더는 지난달, 외부 감사팀에게 제공된 파일 목록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감사에 직접적으로 제출된 자료는 아니지만, 참고용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정리해 놓은 문서들. 그 안에서 그녀는 하나의 서류를 찾았다.

InQComm 계약 검토서

작성자: Daniel Han

검토 일자: 2024년 12월 21일

참고: Palantella 공동 개발 건 포함


“이거였어... 잊고 있었네.”

그 서류는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감사팀과 연락한 날에 정리했던 문서였다.

하지만 이후 Vicky가 직접 나서서 ‘기밀 사안’이라며 더 이상 제출하지 않도록 지시했고, 다니엘도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파일을 들여다보니, 의문이 생겼다.

InQComm이라는 회사의 프로젝트 예산 배정 내역에 이상하게 반복되는 숫자들. 총액의 17.25%가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청구되고 있었다.

그 순간, 다니엘의 뇌리를 스친 단어 — “Stock manipulation.”


만약 그 돈이 실제로는 Palantella 혹은 Otterlim과 연결된 페이퍼 컴퍼니로 흘러갔다면?

단순한 예산 전용이 아니라, 내부자 거래를 위한 준비금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화면을 캡처하고, 파일을 암호화해 외장 하드에 저장했다.

이건 아직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퍼즐의 조각 하나였다.


그날 오후, 감사팀에서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보낸 사람: Auditors@EYpartners.com

제목: InQComm 관련 문서 추가 요청

내용:


다니엘 한님,

지난 회의에서 논의된 InQComm 계약 관련하여, 검토 서류 및 연결 프로젝트 파일 일체를 재요청드립니다.

특히, Palantella와의 교차 프로젝트 관련 내용 포함 바랍니다.

— EY 감사팀


다니엘은 숨을 멈췄다.

“왜 지금 다시 요청하지...? 분명 Vicky가 거절했는데...”

그녀는 조용히 문을 잠그고, 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감사팀이 뭔가를 ‘눈치챘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내부에서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었다.

다니엘은 그대로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Vicky는 지금 이 문서가 다시 떠오른다는 걸 모를 거야. Johnny도 아닐 거고...

하지만 감사팀이 Palantella와 InQComm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이건 기회야.

그녀는 메일 회신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요청하신 문서 중 일부는 현재 보안등급 문제로 직접 제출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다만 참고용 분석 파일은 비공식 경로로 전달 가능합니다.

파일을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Daniel Han


그녀는 ‘공식 제출’ 대신 ‘참고용 분석’이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리고, ‘비공식 경로.’ 이는 직접적인 내부 고발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유출의 형태였다.

답장은 빨랐다.


다니엘 님,

아래 링크는 암호화된 외부 파일 업로드 포털입니다.

저희는 출처를 묻지 않겠습니다.

— EY


그녀는 천천히 웃었다. 그리고 다시 엑셀 파일을 열었다. 고요한 화면 위, 셀들이 새하얗게 반짝였다. 숫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진실은 점점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처음으로 다니엘은 확신했다.

이 싸움, 해볼 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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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권이라는 이름의 칼날


“회의실은 비워둘게요. 다음 주까지 쓰지 말아 주세요.”

비키는 그렇게 말하고는 회계팀의 공유 캘린더를 일방적으로 차단했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만, 곧 알게 됐다.

그녀는 말없이 사람들을 들였다.

샌프란시스코 본사로 올라온 이력서에는 모두 같은 코드가 적혀 있었다. ‘PNT 추천’. Palantella 출신.

회계팀 안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회계 스텝과 AP 스텝 자리에 하나둘 새 얼굴이 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존 구성원 누구도 의견을 낼 기회를 받지 못했다.

다니엘은 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카운팅 팀 리더는 당신이지만,” 비키는 회의 도중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최종 결정권은 나와 CFO님에게 있어요.”

“그럼 제가 인터뷰는···?”

“필요 없어요. 이미 결론 난 거니까요.”

그 말투, 그 표정. 마치 ‘네가 뭘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비키는 자신이 Harvard 출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든 행동에 그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경력도 없는 그녀가 HR 책임자가 된 건 순전히 팔란텔라 라인이라는 이유였다.

그녀는 Otterlim CFO가 데려온 ‘내부 인사’였고, 따라서 그에 맞춰 새로운 조직을 구축하는 것이 곧 자신의 권력의 증명이었다.

문제는, 그 권력의 첫 타깃이 회계팀이었다.

[도대체 왜! 하필 우리 회계 팀만. 파이낸스 팀은 건드리지도 않고..]

답은 간단했다. 어카운팅만 다 공교 롭게도 동양인들이었다.

실리콘 밸리 지역에서 그건 정말 흔한 일이었다. 지저분한 회계 정리를 하려는 백인은 거의 없으니까.


“회계팀 채용 건은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Vicky의 말은 공손했지만, 그 안엔 단호함과 무시가 섞여 있었다.

평소처럼 얇게 바른 립글로스, 날카롭게 정리된 손톱, 하버드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업은 그녀는, 정작 재무나 회계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도 인사 권한은 그녀 손에 있었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Lily와 Daniel의 손에서 그 권한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 AP 쪽은 Lily가 직접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게 효율적인데요, " Daniel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에요. Bill이 더 적합해요. 젊고 똘똘하고, 우리에겐 지금 젊은 피가 필요해요. 지금 팀 분위기에도 잘 맞을 거예요.”

Bill. Finance 팀의 애널리스트, 하얀 셔츠에 늘 깔끔한 복장을 한 그는, 회계 경험도 없고 AP 프로세스도 모른다.

하지만 백인이고, 하버드 출신 Vicky의 '이상적인 인재상'에 들어맞았다.

무엇보다 Vicky는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줄 젊은 남자 후배를 원했다. Bill은 그런 존재였다.


Lily는 말없이 커피잔을 들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표정은 굳었고, 눈빛은 싸늘했다.

지역 대학을 파트타임 잡을 뛰며, 직장 다니면서 간신히 졸업한 그녀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Daniel은 Lily를 쳐다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키는 Lily의 뒷모습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그 친구들, 요즘 세대 애들... 자기 목소리도 있고, 회사 문화랑도 잘 맞고,” Vicky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Accounting 팀도 좀 바뀌어야 하지 않겠어요?”

Daniel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회사에서 경력과 실력은 ‘기준’이 아니었다.

누구와 가까운가, 누가 누구를 추천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말을 잘 듣는가’가 중요했다.

그런 기준에서 Vicky는 절대 권력자였다.

며칠 후, 새로운 AP 스태프와 회계 스태프가 출근했다.

둘 다 백인이었고, 한 명은 Bill이 직접 인터뷰한 인물이었다.

Lily는 아무 말 없이 시스템 접근 권한만 넘겼다. 이전이라면 직접 온보딩을 주도했을 Lily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자신의 팀에 들어온 직원에게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Daniel은 이 상황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녀는 이 조직에서 점점 자신과 비슷한 아시아계 관리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지워지고 있었다.

Vicky는 자신이 데려온 백인 중심의 네트워크를 구축해가고 있었고, Otterlim은 그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Daniel은 회계 시스템을 점검하다가 Bill이 AP 승인권한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통상적으로는 관리자급에게만 주어지는 권한이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그녀는 조용히 중얼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Lily는 침묵했고, Danny는 점점 거리를 두었다.

팀의 결속력은 무너지고 있었고, Daniel은 그것이 의도된 결과라는 걸 직감했다.


“왜 하필 Bill이지? 왜 Lily는 완전히 배제됐지?”

Daniel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러다 그녀는 알게 되었다.

이건 단순한 인사 전략이 아니라, 의도된 배제였다.

그들은 점차 백인이 아닌 관리자들을 조직에서 밀어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손쉽고 조용한 방법이 바로 ‘인사권’이었다.

“인사권은 칼보다 날카로워.”

Daniel은 노트에 그렇게 적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젠 숫자의 영역에서 반격할 시간이었다.

장부 속에 남겨진 흔적들, 권한 변경 로그, 승인 프로세스, 예산 이체 내역···

그녀는 하나하나 파일을 열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사무실을 떠나는 저녁, Daniel은 혼자 남아 회계 시스템과 인사 로그를 비교하며 엑셀을 정리했다.

그녀의 손은 바빴지만, 표정은 차분했다.

마치 오래된 퍼즐을 맞추는 사람처럼, 모든 조각을 정확히 꿰어가고 있었다.

Vicky는 칼을 들었지만, Daniel은 숫자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AP팀 매니저 릴리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니엘의 책상 앞에 왔다.

“Daniel, 나 이 일 계속해야 하나 모르겠어. 나 없이 AP 직원 뽑겠대.”

“너한테도 인터뷰 기회 안 줬어?”

“Bill이 담당한대.”

“빌? 그 저기, 인턴에서 막 올라온 애?”

“응. Finance Analyst 1년 차짜리. 걔가 AP Clerk이랑 Accounting Staff를 인터뷰한대. 웃기지 않아?”

웃기지 않았다. 불쾌했다.


다음화 예고

어쩌면 의도된 침묵〉


릴리는 떠났고, 다니엘은 남겨졌다.

하지만 장부 속 숫자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몰아냈는지,

누가 어떤 권한을 탈취했는지,

그리고··· 누가 곧 다음 타깃이 될 것인지.


다니엘은 이제, 침묵을 버릴 준비를 한다.

증거를 모으고, 흐름을 읽고,

가장 회계사다운 방식으로 — 복수를 시작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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