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이 모든 변화가 단순한 ‘인사 조정’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숫자에는 사람의 흔적이 남는다.
비키와 Otterlim은 구조를 바꾸는 데 집중했지만, 다니엘은 그들이 그 구조를 통해 무엇을 숨기려는지에 주목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상했던 건, 예산 승인 구조였다.
예전엔 릴리, 다니엘, 그 위의 Controller가 공동으로 예산 조정과 인사 결정을 도맡았다.
지금은 비키와 Otterlim,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새로운 리쿠루 터 하나가 전권을 쥐고 있었다.
이상했다. 너무 빨랐다. 조직 개편도 아닌데, 시스템 접근권한까지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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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다니엘은 본사의 시스템 접근 로그를 하나하나 조회했다.
그녀는 ‘HR-ADMIN’, ‘Finance-Admin’ 권한을 가진 사용자들의 접근시간을 대조했다.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Accounting 시스템상에서 승인된 신규 인사 요청이, 실제 HR 시스템에서 비키 혼자만의 로그인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 승인 서명이 위조되어 있었다.
“이건 릴리 싸인인데··· 릴리는 그런 승인 한 적 없다고 했는데?”
서명이 복사되어 붙여진 흔적. 해상도가 다르고, 날짜도 어긋난다. 다니엘은 그 파일을 따로 저장하며, 조용히 중얼였다.
“시작했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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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릴리는 조용히 병가 휴직을 통보했다. 당장 관두고 싶었으나 새 직장을 구할 때까지 삼 개월만 휴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니엘은 회사 회계 장부 시스템에 접속했다.
이제부터는 장부 위에서 이름 없는 사람들을 되살리는 싸움이다.
비키가 조종한 인사권, Otterlim이 숨긴 연결 계정, 그리고 PNT 라벨을 단 이름들.
그 모든 걸 수면 위로 끌어올릴 것이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는다.
숫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릴리가 떠난 지 며칠 후 다니엘은 릴리가 남긴 로컬 폴더 백업 파일과 감사 로그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하나의 이름에 멈췄다.
Altavia.
그리고 그 아래에 병렬로 걸린 이름, Syntellis.
“왜 이 두 회사가 엮여 있지?” 다니엘은 중얼이며 해당 전표들을 호출했다.
ERP 시스템에서 특정 키워드만 넣으면 되도록 매크로가 걸려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수동으로 하나하나 클릭해 가며 들여다보았다.
숫자는 반복되고 있었다. 전표, 날짜, 금액은 다르게 보였지만, 묘하게 일치하는 비율이 있었다.
단 1센트의 차이로 조정된 환율, 두 회사 간의 미세한 시간차 거래.
“이건... 시뮬레이션한 것처럼 움직이네.”
다니엘은 릴리가 마지막까지 관리했던 프로젝트 코드를 따라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릴리의 ID 대신 또 다른 이름이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Bill.
AP팀도 Accounting팀도 아닌, Finance Planning팀의 Analyst였다.
“아니, 얘가 왜 여기에 들어와?”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키는 릴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떤 공식적인 절차도 없이, Bill에게 시스템 접근 권한을 줬다.
심지어 이건 ‘사용자 요청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IT팀 로그에 요청은 있었지만, 그것도 '구두 요청'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시점에서 다니엘은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인사상의 우연이 아니었다. 의도된 이탈과 침투였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비키였다.
•
몇 주 전을 돌이켜보면, 비키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회계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Accounting Staff 채용은 원래 다니엘과 릴리가 최종 인터뷰를 진행하는 구조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느 날 아침, 다니엘이 이메일을 열자 ‘Offer Letter Sent’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그 후보자를 인터뷰하지 않았다.
“누구지? 회계팀인데?”
그녀가 확인하자, 비키의 메일이 있었다.
"We moved fast on this. Bill helped screen. Young and hungry – just what we need."
그 문장에서 ‘we’는 ‘me’였다.
그리고 ‘young and hungry’라는 말속엔 다니엘과 릴리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포함되지 않았다.
릴리는 그 이후 급격히 침묵했고, 병가 일주일 전부터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를 감지했지만, 묻지 못했다.
이제 와서야 그녀가 남긴 흔적들이, 숫자들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
그날 밤, 다니엘은 평소보다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
Altavia와 Syntellis, 그리고 Bill의 이름이 얽힌 전표를 모두 출력해 벽에 붙였다.
“숫자는 사람보다 오래 기억해.”
“사람은 거짓말하지만, 숫자는 끝내 기억해.”
한 줄, 한 줄, 고리처럼 연결되는 전표 흐름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숨겼는지를 찾으려 했다.
아니, 이미 릴리는 숫자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릴리의 마지막 업로드 시간과 파일 생성 기록을 대조하며, 그날 릴리가 병가를 떠나기 직전까지 붙잡고 있던 문서를 찾아냈다.
‘Q3 Altavia Internal Funding Memo’
그 파일을 열자, 수치의 정렬이 어긋난 두 셀 사이에서 문득, 그녀는 전혀 다른 조직의 손길을 느꼈다.
“이건 그냥 비용 조정이 아니라... 자금 흐름 왜곡이야.”
•
그리고 다니엘은 처음으로 확신했다.
이것은 회계 장난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의적 범죄였다.
누군가는 릴리를 밀어냈고,
누군가는 릴리가 마지막까지 막으려 했던 것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날, 다니엘은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는 릴리의 마지막 날, 무표정하게 인사도 없이 멘붕인체 퇴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다니엘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차례였다.
장부 위의 전쟁.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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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그날도 어김없이 Sunnyvale역에서 8시 5분 Caltrain에 올랐다.
커피는 식었고, 창밖은 희뿌연 안개에 덮여 있었다.
이어폰은 귀에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즘 그녀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그저,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자기만의 침묵 속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 침묵은 산산이 부서졌다.
"어, 다니엘! 그거 들었어요? 비키가 또 인사팀 단독으로 결정했대요. 이번엔 AP 스텝이래."
리셉션 데스크 옆에서 만난 동료가 수군댔다.
다니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주, AP 매니저 릴리가 제출한 신입 후보 추천 리스트는 HR 쪽에서 '부적절'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대신, 재무팀 신입 채용을 담당하게 된 인물은 — 고작 1년 차 화이트 애널리스트, 빌이었다.
빌은 능력도,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비키가 직접 "젊고, 에너지가 넘친다"라고 추천한 인물이었다.
빌은 얼굴도 어리고, 늘 비키 옆에서 “네, 비키. 맞아요, 비키.”만 반복했다.
그런 빌에게 회계팀 스텝 채용 전권을 맡긴다는 것은 — 결국 릴리와 다니엘을 우회해 직접 인사권을 휘두르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다니엘은 릴리와 회사 근처 Embarcadero 앞 벤치에서 조용히 마주 앉았다. 바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빌한테 넘긴 건 나도 들었어."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냥 넘기지 말자. 우리가 이렇게까지 무시당할 이유 없어."
릴리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엔 지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걘 우리가 필요 없대요. 내가 없어도 돌아가는 회사니까 조용히 있으래요.
근데 진짜 화나는 건 뭔지 아세요? 난 아직도 그 인간한테 '릴리' 소리조차 못 들었어요. ‘그 여자’라고 부른다니까요."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키는 누군가를 호명할 때 그 사람을 '사람'이 아닌 ‘역할’로 부르곤 했다. "회계 쪽 여자애", "AP 매니저", "재무팀 그 여자".
그녀가 진짜로 무서운 건, 그런 무례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상냥한 말투로 행한다는 점이었다.
며칠 후, 회의실에서의 첫 정식 인사 평가 회의가 열렸다.
비키는 발표자료를 넘기며 말했다.
"우린 이제 강한 팀이 필요해요. 책임지고 숫자 낼 수 있는, 그런 인재들이요. 경력보다는 에너지와 문화 적합성에 집중할 겁니다."
'문화 적합성'.
그 단어는 다니엘에겐 일종의 검열처럼 들렸다.
백인 중심의 문화, 팔란텔라식 사고방식, 하버드식 ‘자기 확신’ — 그 틀에 들어맞지 않으면 도태되는 구조.
릴리도, 다니엘도, 그 틀에 끼워 넣기엔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오터림 CFO는 회의 내내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렸고, 비키의 말은 그 결정에 힘을 실어주는 도구일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다니엘은 자료 정리를 마친 후 오터림에게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이번 채용 관련해서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저희 팀 입장에서 보면···"
"Daniel, 당신은 충분히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전체적인 구조 개편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이해해 주리라 믿어요."
그 말은 다니엘이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신호였다.
그날 밤, 다니엘은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았다.
모니터엔 연결 계정 로그와 최근 AP 승인 내역이 뜨고 있었다.
이상하게 반복되는 승인 시간대, 결재 루트를 우회한 트랜잭션, 그리고···
“여깄 다···”
하나의 문장이, 차갑게 그녀를 때렸다.
‘Prepared by: Bill G. | Approved by: Vicky R. | Final Review: Johnny K.’
그건 명백한 승인 루트 위반이었다.
게다가 이체 내역이 연결된 프로젝트는 'Sharon Palantella' — 명목상 존재하는 전략기술 투자 법인.
하지만 그 실체는 누구도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손을 떼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무실의 불빛은 거의 꺼져 있었고,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우린 숫자로 살고, 숫자로 죽는 거야···”
그녀는 조용히 중얼이며 화면을 캡처했다. 증거는 이제 하나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가 침묵했던 이유는 순응이 아니라, 준비였음을.
그리고 다음 스텝은, 누구보다 조용하고도 치명적인 반격이었다.
다음화 예고 — 〈감춰진 명단〉
회사의 시스템 안에서 사라지는 사람들.
출입기록, 계정 삭제, 이름 없는 자리들.
그리고 남겨진 숫자 하나.
다니엘은 이제, 사라진 자들의 흔적을 숫자 위에서 다시 호출한다.
“우린 아무 말 없이 사라졌지만,
숫자는 우리가 있었음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