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감춰진 명단

by J이렌

퇴근 후에도 다니엘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무실 근처의 조용한 코워킹 스페이스에 자리를 잡았다.

USB에 저장해 둔 지난 3년 치 회계 데이터를 하나씩 불러오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회사 서버에서 직접 추출한 데이터는 아니었지만, 감사 준비를 위해 사본으로 만들어두었던 백업 파일들이었다.

다니엘은 그중 일부를 외부 감사에 대비한 연습용 분석이라며 자신이 직접 복사해 둔 자료였고, 지금은 그 어떤 회의록보다 더 값진 증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거래처별 지출 내역을 시간순으로 정렬했다.

특정 프로젝트명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Altavia’와 ‘Syntellis’. 눈에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외주 컨설팅 명목으로 자주 등장하던 업체였지만, 금액 규모나 반복 주기를 보면 단순히 외부 자문으로 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이전에 Lily가 툭 던지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상하지 않아? 저 업체는 이름만 다르고, 인보이스 템플릿도 똑같더라니까?”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Lily의 의심은 일리가 있었다.

다니엘은 ‘Altavia’와 ‘Syntellis’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인보이스 내역을 한 줄씩 검토했다. 날짜, 금액, 설명, 결재권자. 그리고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인보이스는 분기 마지막 주에 몰려 있었고, 그중 일부는 실제 서비스 제공일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금액은 소수점까지 동일했고, 설명은 복사해서 붙여 넣은 듯 중복되었다.

“Altavia··· 왜 항상 분기 마지막 주에만 청구서를 보낼까.”

다니엘은 또 하나의 엑셀 시트를 열어, 결제 승인권자의 이니셜을 정리했다.

이상하게도, Altavia의 모든 청구서에는 Otterlim의 이니셜이 마지막 열에 반복되고 있었다.

다른 벤더들은 부서 책임자가 결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건 달랐다.

마치 CFO가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될 ‘특별한 거래’처럼 보였다.

반복되는 인보이스 금액, 동일한 날짜, 동일한 결재자. 이건 분명한 패턴이었다.

그녀는 과거 감사인으로부터 받은 피드백 메일을 다시 열어 보았다. '

거래가 정상적일 경우, 정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청구 주기와 합리적인 서비스 설명이 포함되어야 한다.'

Altavia의 인보이스는 이 조건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다니엘은 자신이 더 이상 단순한 ‘회계 관리자’가 아니란 걸 자각했다.

그녀는 숫자를 이용해 무언가를 발견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무시하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풀며 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그날 밤, 그녀는 Caltrain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통근 열차의 진동 속에서 수백 개의 셀과 숫자가 머릿속에서 얽히고 풀렸다.

그 속에는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이 회사의 진짜 모습, Otterlim과 Vicky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권력 구조,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하나둘 사라져 가는 사람들.

Vicky는 최근 한 달 사이 회계팀과 AP팀의 인사권을 사실상 장악했다.

Lily가 채용하려던 AP Staff 후보가 거절당한 일도, 자신이 직접 검토하고 있던 Junior Accountant 포지션에

갑자기 'Bill'이라는 백인 남성 애널리스트가 개입된 것도 모두 Vicky의 결정이었다.

공식적인 채용 프로세스는 HR팀을 통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모든 후보자를 사전에 검열하고 있었다.

Lily는 몇 번이나 불만을 표출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메일 한 줄 뿐이었다.

“다양성과 조직문화 강화를 위해 젊고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합니다.”

다니엘은 그 문장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창의적인 인재’는 젊은 백인 남성이거나, 팔란텔라 출신이거나, 혹은 둘 다였다.

그리고 그 ‘창의적인’ 사람들 사이에 그녀처럼 나이 든 동양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 엑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숫자들이 자신의 유일한 무기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폭로는 아직 이르다. 증거가 필요했고, 흐름이 필요했다. 이건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을 숫자로 무너뜨릴 수 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아.”

그녀는 그 말을 중얼이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인보이스 번호의 패턴을 분석했다. 의외로 Altavia와 Syntellis의 인보이스는 연번이 아니었다.

숫자는 무작위처럼 보였지만, 다니엘은 그 안에서 미세한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특정 숫자가 반복되었고, 접미사에 사용된 알파벳 조합이 일정한 주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별도의 탭을 만들어 그 패턴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이 '복수의 열쇠'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다니엘은 느꼈다. 이건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계획이었다.

그리고, 복수는 — 조용히, 정확히, 그리고 아름답게 이뤄질 것이다.

바로 이 장부 위에서."}]}


그날 밤, 다니엘은 퇴근길에 릴리로 부터문자를 받았다.


“다니엘, 나 사실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나와서 미안해.

병가가 거의 다 끝나서 노티스 줬는데 더 이상 출근 안 할 거야. 필요한 일 있으면 문자 해”

“나 평생직장 다니면서 이렇게 모멸감 느껴본 건 처음이야. 비키랑 쟈니 얼굴도, 목소리도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 Bill? 솔직히 역겨웠어.”

“다행히 새 직장 구했어. 연봉은 삼만이나 깎였지만··· 그만큼 여기가 싫었다는 거겠지.”

“근데 진짜, 나 여기서 이렇게 버틴 건 다 다니엘 덕분이야. 같이 있어서 덜 외로웠어. 고마웠어. 진심으로.”

“다니엘도 제발 이 꼴 저 꼴 다 보기 전에··· 잡 빨리 구해서 나가. 그냥 워크 어웨이 해. 그게 답이야.”

다니엘은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맴돌았다.

“같이 싸우던 전우 하나가 빠져나갔구나··· 그래도, 연락은 남았어.”


---------------------------------------------

퇴근 후 식탁 위

퇴근하자마자, 신발을 벗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주방엔 밥 냄새가 없었고, 현관은 조용했다.

나는 가방을 내려두고 다시 일어섰다.

엄마의 시간은, 회계 마감보다도 늦게 끝난다.

거실엔 아들이 앉아 있었다.

헤드폰을 낀 채, 농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었다.

"엄마 왔어."

"응. 오늘 경기 봤어?"

"못 봤지."

"르브론 진짜 미쳤어. 37 득점, 3 쿼터에 덩크 두 개!"

나는 그 얘기를 다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고, "대박이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손은 쌀을 씻고 있었고, 눈은 반찬이 뭔지 냉장고를 스캔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든 상관없었다. 따뜻하기만 하면 됐다.

식탁에 남편이 앉아 있었다.

말이 없었다.

요즘은 더 그렇다. 치료가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 미소 하나면, 하루치 고통은 덜어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통증을 나눌 수 없었다.

"내일 스캔 있는데··· 그냥 다음 주로 미루면 안 될까?"

"응. 미뤄. 피곤하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고개에 담긴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다'는 말은, '두렵다'는 말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린 셋이 앉아, 저녁을 먹었다.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접시는 깨끗이 비워졌다.

숫자로는 측정할 수 없는 밥상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숙제를 확인하고, 남편 약을 챙긴다.

그리고 그다음—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마감이 남았으니까.

사람들이 몰라주는 숫자들을,

나는 다시 하나씩 맞춰야 한다.

회사에선 내가 회계사고,

집에선 내가 어머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도 울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



**

다음날, 저녁 7시 18분.

다니엘은 병원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남편의 진료 차트를 출력한 종이, 옆에는 그녀의 가방. 노트북과 USB, 그리고 캡처 파일이 든 작은 외장하드가 들어 있었다.

“다음 스캔은 금요일 아침 8시. 조영제 포함, 총 소요시간은 1시간 반 정도예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다니엘은 고개만 끄덕였다.

남편은 안쪽에서 치료 준비 중이었다.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Vicky R.]

“이번 금요일 회식, 재무팀 전원 참석 바랍니다. 팀워크는 요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니까요 ”

다니엘은 메시지를 닫았다. 금요일 오전 스캔, 오후 회식. 그리고 예산 마감.

회계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여유'의 날들이 겹쳐 있었다.

“엄마··· 오늘은 오랜만에 영화 볼래?”

아들의 문자. 다니엘은 손가락을 멈췄다.

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미안.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아. 내일 보자.”

타이핑 후, 전송하지 못했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11분.

남편은 식탁에 앉아 약봉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회사 괜찮아?”

그 물음엔 항상 같은 대답.

“그냥, 숫자들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갔어.”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웃었고, 그 미소가 다니엘에게 남은 유일한 위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의 침묵도, 회사의 회식도, 인사 메일도 — 모두 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지우고 있었다.

그날 밤, 그녀는 Judgment_004.xlsx라는 이름의 파일을 새로 만들었다.

탭 이름은 단 하나.

[Loss Projection] — For Personal Use Only







다음화 예고 — 〈비키의 명단〉

비키의 노트북 속 숨겨진 엑셀 파일.

기준 없는 채용, 서명 없는 승인, 그리고 ‘누락된’ 리스트.

다니엘은 그 안에서 '명단'을 발견한다.

누가 들어오고, 누가 나가는지.

그리고 누가 결정했는지를.

“비키는 칼을 들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의 이름을 지웠다.”


이전 05화외전 - Hidden En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