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홀로 Embarcadero 피어로 나왔다. 바람은 차가웠고, 도시의 소음은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손에는 어제 작업한 프린트 몇 장과, 펜 하나. 그녀는 자신이 모은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 누군가의 손끝을 들여다봐야 할 시간이었다.
오전 10시 42분.
ERP 시스템 관리 페이지에 접속한 그녀는 최근 30일간의 계정 로그인을 조회했다.
정규 시간 외, 예외 권한을 사용한 로그인 7건. 그중 하나는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 ID였다. ‘usr_a34T1’
“이건 누구지···?”
그 계정은 정식 사용자 목록에 없었다. 관리자가 부여한 임시 계정도 아니었다.
이상한 건 이 계정이 주로 사용된 시간대였다.
새벽 2시, 오전 5시 30분, 주말 오후. 정상적인 업무 시간과는 전혀 맞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다니엘은 감사 로그에 접속해 해당 ID의 행동 내역을 추적했다.
Altavia, Syntellis, 그리고 — 새롭게 등장한 이름, “NexaFront Technologies.”
“또 하나의 유령회사···”
그녀는 'NexaFront'라는 이름으로 된 PO 발행 내역을 추적했다.
예산코드는 InQComm 프로젝트와 동일했다. 결재 승인은 — Otterlim.
그 순간, 화면 한쪽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NexaFront 신규 계약 요청, 승인 대기 — Requested by: Bill G.”
“빌··· 네가 이걸 요청했다고?”
그녀는 숨을 삼켰다. 빌은 AP도, 회계도 담당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주니어 파이낸셜 애널리스트였다.
그런데 어떻게 새로 생성된 공급업체의 계약 요청을 진행할 수 있었던 걸까? 시스템상으로는 불가능한 구조였다.
“... 아니야. 그 권한을 누군가 줬어.”
다니엘은 다시 시스템 로그를 열었다. 'usr_a34T1'은 빌의 계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로그인 환경과 MAC 주소가 동일했다. 빌은 이중 계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 아니, Vicky 혹은 Otterlim — 그에게 이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녀는 파일을 저장하고, 별도의 USB에 암호화했다. 그리고 외장 하드 한쪽에 백업 파일을 숨겼다.
‘Judgment_002.xlsx’
"숫자에 피가 묻진 않아. 하지만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어."
그날 오후, Daniel은 오랜만에 Danny를 불렀다. 회의실 대신 조용한 복도 끝, 창문이 큰 카페테리아 쪽 테이블에 앉았다.
“Danny, 시스템 접근 권한 관련해서... 너 혹시 Bill이 무슨 일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어?”
Danny는 잠시 머뭇이다가 말했다. “몰랐다고는 못 해요. 근데, 아시잖아요. 그쪽 건 손대지 말라는 암묵적인 분위기 있었어요.”
“누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Otterlim이 처음에 그랬어요.
‘재무팀은 비즈니스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한다. 테크니컬 한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 말 듣고, 다들 손 떼기 시작했죠.”
“그럼 우리 팀은 뭐지, 그냥 숫자만 입력하는 부속품이야?”
Danny는 눈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우린··· 기록만 남기는 쪽이잖아요. 결정은 저쪽에서 하는 거고.”
그 순간 다니엘은 느꼈다. 이것이 그들이 만든 시스템의 진짜 목적이었다.
백인 중심의 의사결정권자들, 그 아래 침묵하는 실무자들. 그리고 그 침묵을 지켜보는 동양 여성 관리자 하나.
“Danny, 앞으로 내 부탁을 몇 가지 들어줄 수 있어?”
“가능한 선에서는 도와드릴게요. 근데... 위험한 거 아니죠?”
“데이터 정리뿐이야. 내 말대로 정리만 해줘. 네 이름은 어디에도 안 들어가.”
Danny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아요.”
그날 밤, 다니엘은 다시 사무실에 남아 데이터 흐름을 분석했다.
Altavia → NexaFront → Cayman Account → InQComm 프로젝트 환입.
그리고 그 마지막엔 — Otterlim의 승인.
이제 퍼즐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각은, 바로 Vicky였다.
오전 8시 17분.
릴리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커피는 없었다.
그녀가 먼저 들어와 책상 밑으로 발을 꼬고 앉아 “나 오늘 엑셀 보기 싫어”라고 투덜대던 그 목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가 부팅되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커서가 깜빡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잠시 잊었다.
8시 22분.
첫 메일 알림이 떴다. ‘Reminder: Weekly Cash Flow Review’.
릴리가 정리하던 파일이었다.
나는 자동으로 폴더를 열었지만, 그 안은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파일도, 기록도, 그녀도.
누군가 내 옆을 지나쳤다. 아무 말도 없었다.
이 회사는 말을 아끼는 곳이다.
침묵은 존중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을 지우는 방식으로 쓰인다.
나는 사무실 한가운데 앉아 있지만,
존재감은 없다.
책상 위 이름표는 그대로인데, 내가 하는 일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저 숫자만 정확하면 된다.
0.01이 틀리면 회의가 소집되고, 10명이 모여 원인을 묻는다.
하지만 그 숫자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릴리는 그런 숫자를 잘 만들었다.
그녀의 수치는 정확했고, 조용했고, 잔인할 만큼 명확했다.
그런 릴리가 떠났다는 건,
이곳에서 정확한 사람도 떠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화면을 닫고, 엑셀을 열었다.
오늘은 어떤 숫자를 써야 할까.
누굴 살리고, 누굴 없애야 할까.
릴리는 사직서를 한 줄로 적었다.
“더는 숫자 뒤에 숨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숨는 중이다.
그러나 오래 숨지는 않을 거다.
커피가 식었다.
숫자가 식기엔 아직 이르다.
***
다니엘은 HR 시스템에 접속하기 전, 손끝을 살짝 털어냈다.
이제까지는 숫자였지만, 지금부터는 사람이다. 이름, 출신 학교, 추천자, 그리고 배제된 이력서들. 모든 게 로그에 남아 있었다.
‘V_HIRE_ADMIN’
비키가 가진 시스템 권한이었다.
통상적으로는 HR 총괄도 가지지 않는 최고 권한이었다.
전형 계획부터 평가 항목, 추천서 열람, 인터뷰 피드백 편집, 최종 Offer 승인까지 — 그녀는 모든 것을 직접 조작할 수 있었다.
“이건... 전능한 신이네.”
다니엘은 속으로 중얼이며 '최근 6개월간 신규 채용 로그'를 불러왔다.
AP팀, Accounting팀, Finance팀.
32건의 채용 기록.
그중 추천자에 ‘Bill’ 또는 ‘PNT’가 표기된 인원 27명.
나머지 5건은 모두 탈락.
공통점은?
다양성 후보(Diversity Applicant), 특히 아시아계 여성.
“이게 우연이라고?”
다니엘은 그 데이터를 ‘Diversity Status’ 기준으로 필터링했다.
탈락률 100%
‘면접 대상자 중 백인 외의 후보 전원 불합격.’
그녀는 이메일 로그로 넘어갔다. 비키가 지난 3개월간 내부 채용 담당자들과 주고받은 메일 중,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We need cultural fit. Young, agile, and preferably familiar with PNT culture. You know what I mean.”
You know what I mean.
그 말 안에 다 들어 있었다.
그녀는 다시 시스템 권한 목록을 정리했다.
Bill에게 부여된 ‘AP_APPROVER’ 권한.
원래 릴리만 갖고 있던 승인 권한이었다.
Lily가 퇴사하자마자, 3일 뒤 Bill이 그 자리를 채웠다.
단 한 줄의 공지도 없이.
요청 양식도 없이.
“인사권은 칼이었고, 이건 그 칼의 흔적이야.”
다니엘은 파일을 새로 저장했다.
Vicky_PNT_HireLog_Encoded.xlsx
암호: hernumberiszero
—
그날 오후, 다니엘은 다시 Embarcadero 피어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햇빛은 부드러웠고, 해안가는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그녀는 커피를 홀짝이며 스마트폰을 켰다.
릴리에게 텍스트를 보냈다.
“혹시 예전에 PNT에서 온 인재 리스트 받은 적 있어?”
한참 뒤, 답장이 왔다.
“응. 그런데 공식 파일은 아니었어. Vicky가 비공식 채널로 줬고, HR에는 기록 안 남았을 거야.”
“혹시 갖고 있어?”
“남아있으면··· Dropbox에 백업해 뒀을 거야. 확인해 볼게.”
몇 시간 후,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제목: V_list_final_draft.pdf
보낸 사람: lily_truong.71@protonmail.com
내용 없음.
그 PDF에는 이름, 학교, 추천자, 코드, 예상 직책이 정리된 2페이지짜리 표가 있었다.
마지막 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추가 후보: Daniel Han — 보류 권장. 고경력, 고연봉, Cultural Fit 불확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자신도 그 명단에 있었다.
단, 보류 대상자였다.
“보류라... 결국, 이미 정해졌던 거였네.”
그 순간,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조직 재편이 아님을 확신했다.
명단은 있었다. 기준도 있었다. 그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관계였다.
—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꺼냈다.
Altavia, Syntellis, NexaFront의 자금 흐름.
모두 PNT 출신이 승인하고, Vicky가 추천한 직원들이 관리했으며, Otterlim이 결재했다.
이제 장부는 증언하고 있었다.
누가 그 판을 짰는지,
누가 칼을 휘둘렀는지,
그리고 누가 ‘보류’되어야 했는지.
다니엘은 캘린더를 열어 감사팀과의 다음 미팅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메모 파일들을 정리해 폴더에 담았다.
Folder name: Judgment
파일 수: 17
암호: 없음
다니엘은 이제 결심했다.
“이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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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고 — 〈잔금 처리일의 그림자〉
분기 말.
가장 많은 돈이 움직이고, 가장 많은 숫자가 흐려지는 시기.
다니엘은 우연히 확인한 마지막 송금 내역에서
'허공으로 사라진 잔금'을 포착한다.
그림자는 숫자에 숨어 있었고,
진실은 그 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잔금은 남지 않았다. 대신, 이름 없는 계좌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