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의 기억, 돈의 냄새

조용히 사직서를 끓여낸 어느 직장인의 기록

by J이렌

매일 똑같은 아주 하찮은 페니 차이,
파일 저장 방식 하나로 시작되는 30분 설교,
그리고 가장 바쁜 분기중에 유럽 휴가 떠난 내 밑 직원,

보스의 미니미, 리틀 보스. 참다 참다,

나는 청국장을 끓이며 퇴사를 결심했다.

조용히, 구수하게.

이 글은 된장보다 진한 회사 생활을 겪은 당신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모든 샐러리 맨들에게.


Ep.1 청국장 냄새만큼 진한 컨트롤 프릭인 보스


청국장은 끓일수록 구수해지지만,
우리 보스는 말할수록 진해진다.
향이 아니라 강박이.
페니 차이 하나로 눈빛이 흔들리고,
파일 저장 방식이 다르다고 30분 강의가 시작된다.
마치 세상 모든 하드디스크가 자기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듯.

“왜 이렇게 저장했죠?”
“여기 소수점이 왜 둘째 자리까지밖에 안 나오죠?”
“이건 제가 못 찾아요.”

안 쓰잖아요, 보스.

전자레인지에 데운 청국장을 꺼내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끓이는 건 된장이 아니라, 인내심이다.


Ep.2 구수하게 복수하는 법


복수는 차갑게 먹는다고들 하지만,
난 구수하게 끓였다.
된장 한 국자, 그리고 계획 한 스푼.

오늘도 나의 보스는 페니 차이에 눈을 부릅뜬다.
“왜 이게 $0.01이 안 맞죠?”

차라리 청국장 냄새를 맡고 있지,
그 한마디에 피곤이 훅 몰려온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보스가 못 찾는 파일 하나를 보스 방식으로 저장해 뒀다.

‘Q1_Close_final_FINAL(4).xlsx’

그리고 서브 폴더 속에, 서브 폴더 속에, 또 서브 폴더 속에—
보스의 기준대로,
그러나 절대 못 찾을 방식으로.

“이 파일 어디 있죠?”
“저장 방식 다 정해드렸잖아요. 제 방식 말고.”

“아… 그러네요. 한번 찾아볼게요.”

구수하게 끓던 청국장이 방 안 가득 퍼지는 동안,
나도 몰래 웃었다.
이게 바로 내 방식의 복수다.


Ep.3 리틀 보스의 휴가, 내 복수의 시작


회사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진짜 보스, 그리고 리틀 보스.

진짜 보스는 나를 30분씩 설교하고,
리틀 보스는… 그걸 옆에서 보고 배운다.

내 밑에 있지만,
지가 나를 매니지먼트하는 줄 아는 직원 하나.
울보스한테는 알랑방귀,
나한텐 “이건 이렇게 해야죠”
“그건 저한테 넘기시면 안 되죠”
업무는 1도 안 도와주면서, 목소리는 주임급.

그러더니 갑자기 휴가를 냈다.
분기 마감 이주 전, 유럽 휴가.
겉으론 말했지.
“와~ 좋겠다. 잘 다녀와요~”

속으론 이미 다짐했다.
“네가 돌아오기 전에 난 떠날 거다.
인수인계? 없던 걸로.”

복수는 청국장처럼.
지금은 끓이고 있지만,
향이 퍼질 즈음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Ep.4 구글 캘린더에 남긴 마지막 한 줄


분기 마감은 다가오고,
리틀 보스는 유럽으로 떠났다.
인수인계?
그녀는 "저 돌아오면 바로 처리할게요~"
라며 환하게 웃었다.

웃음이 너무 밝아서,
내가 대답을 잊을 뻔했다.
“네~ 잘 다녀와요.”

그날 밤,
나는 조용히 구글 캘린더를 열었다.
그리고
7월 8일 오전 9시.
‘Janet: Resignation effective.’

설명도, 사유도, 메모도 없이.
딱 그 한 줄.

다음 날, 보스는 페니 차이를 잡고 있었고
리틀 보스는 이탈리아에서 와인을 들고 있었지만,
나는… 자유였다.

인수인계는 청국장과 같다.
냄새는 오래 남지만,
다 식으면 아무도 먹지 않는다.


Ep.5 사라진 폴더, 사라진 나는 어디에?


회사 시스템 안에 내가 만든 폴더는 수십 개,
그 안엔 수백 개의 파일이 들어 있다.

울보스가 말했던 그 ‘스타일’,
리틀 보스가 요구한 그 ‘정리 기준’—
다 맞춰줬다.

그러다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Q2_Closing_Summary’.
그다음은 ‘Audit_Ready_Folder’.
마지막엔 ‘TEMPLATE_FINAL’까지.

아무도 몰랐다.
그냥, 어느 날 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사라졌다.

“Janet 어디 갔어?”
“몰라요… 캘린더에 사직만 쓰여 있었던데요.”
“인수인계는?”
“폴더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 폴더가 안 보여요.”

화면 속, 조용한 서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파일 목록 맨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을 뿐이었다.

‘Janet_Farewell.zip’ – 암호화됨.


Ep.6 그녀가 복귀하던 날, 서버는 조용했다


유럽은 뜨겁고 화창했지만,
그녀가 돌아온 사무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모니터를 켜고, 메일을 열고,
구글 드라이브를 열었을 때—
뭔가 빠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너무 깔끔했다.’

폴더엔 설명서가 없었고,
엑셀 파일엔 연결된 시트가 끊겨 있었으며,
백업 폴더는… 삭제되어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캘린더 속 그 한 줄을 다시 떠올렸다.

‘Janet: Resignation effective 4/10/25.’

쪼잔한 보스는 여전히 페니를 찾고 있었고,
팀장은 혼잣말로 “누가 정리했지…?” 중얼거렸고,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Janet은 퇴사한 게 아니라,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절대 해독되지 않을 암호로 남았다.


Ep.7 마지막 메일 – 그리고 아무도 Janet을 잡을 수 없었다


두 통의 오퍼가 동시에 들어왔다.
하나는 연봉 20% 인상,
다른 하나는 유럽 HQ 연결 포지션.

나는 고민하다가 더 까다로운 쪽을 골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긴 나를 진짜 ‘프로’로 대하니까.”

마지막 날, 아무 말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대신,
오전 9시 01분.
CEO와 CFO 앞으로 메일을 보냈다.

[RE: 조직 인프라 개선 필요 건]

안녕하세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이 회사가 앞으로 확장하고 지속 성장하려면,
지금과 같은 리더십 구조 아래서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늘 ‘존재하는 시스템을 땜질만 하며’
인프라를 미루었고,
결국 위로부터의 실질적 변화 없이
현장 직원들에게만 부담이 전가됐습니다.

터질 일만 남았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걱정되는 마음에,
한 마디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Janet 드림.

메일을 보낸 후,
나는 알림을 모두 끄고,
슬리퍼를 신고 청국장을 끓였다.

오늘은 좀 짜도 괜찮았다.
어차피, 인생이 이긴 맛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