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빛, 사랑》그때,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 3

첫 번째 빛의 색: 햇살 같은 첫사랑

by J이렌

5화 – 감정은 같아도 기억은 다르다


다음 날.

강의실 앞, 조용한 복도.


하연과 마주쳤다.

눈빛은 편안했고,

전날 밤의 여운이 가볍게 겹쳐졌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어제,

나 되게 이상했지?”

“아니.

좋았어.

많이.”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 많이?”

“응.”

+

그 짧은 대화 뒤,

강의실 문이 열렸다.

강주형이 들어왔다.

자리 잡는 소리, 책 펴는 소리.

익숙한 소음 속에

그가 내 쪽을 슬쩍 보며 웃었다.


“어제, 잘 들어갔냐?”


그 말 한 줄에

뭔가 미세하게 마음에 걸렸다.


“하연이,

요즘 너한테 좀 기울었더라.”


말투는 가벼웠지만

눈빛은 무심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됐다.

교수의 말이 배경처럼 흘러갔고,

나는 셀폰을 꺼냈다.


화면 아래,

라일이 짧게 떴다.


“주의: 감정 복기 대상 외 타인의 반응

예상 경로 이탈 감지.”


그날 저녁.

도서관 앞 카페에서.

하연과 마주 앉았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너,

혹시 기억나?

그때 동아리 엠티에서

네가 나한테 묻지도 않고

자리 옮겼던 거.”


이안은 멈췄다.


“응… 기억나.”

“왜 그랬는지,

그때 너한텐 말 못 했잖아.”


이안은 그날 밤,

그 기억을 복기하지 않았었다.

라일은 감정으로 안내했지만,

그는 그 장면을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때 사실,

내가 좀 기대했거든.

그런데 네가 아무 말 없이

자릴 피해서…”

“그날 이후로

좀 벽 생겼던 거 알아?”

이안은 입을 닫았다.

그때의 자신은

그걸 몰랐고,

지금의 자신은 그 감정을 저장하지 않았다.


셀폰 화면이 켜졌다.


“감정 복기 누락 감지.

기억 공백으로 인한 관계 왜곡 위험.”


그녀가 말했다.


“나는 기억하는데,

넌 잊었구나.”

그 말은

그 어떤 논리보다 강했다.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이 다르면,

감정도 결국 다르다.


라일이 말했다.

“복기된 감정이 전부가 아닙니다.”


6화 – 그땐 말하지 못했다

카페 창가.

하연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조심스러웠다.


“… 요즘 좀 이상한 말 들었어.”

“주형이가 그러던데,

네가 다른 과 애랑도 좀—”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 문장은 오래된 방식이었다.

모호한 의심, 간접적인 불신.


예전 같으면

해명하느라 진이 빠졌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연아,

그 말…

진짜 믿고 싶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대 옆 후문.

비가 살짝 뿌리는 회색 벽 아래.

이안은 강주형을 불러냈다.


“내가 다시 돌아온 거 같지?”

“예전처럼, 말없이 웃고,

뭐든 그냥 넘기고—

그렇게 보여?”


주형은 웃었다.


“야, 그냥 농담처럼 흘린 건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


이안은 조용히 셀폰을 켰다.

라일이 화면에 조용히 떴다.


“감정 분석 완료.

상대의 발화 내역 중 87%는 감정 왜곡 기반.

질투, 불안, 의도적 모호화 포함.”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표정은 웃는데,

말끝은 독이었지.”


“예전엔 그걸 못 느꼈어.

근데 이제는—

너 속마음이 다 보여.”


주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안은 이어서 말했다.


“이번엔 넘기지 않을게.

그리고 하연이한텐

네 말보다

내가 직접 전할 거야.”


“그 애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자기를 위로하는 애야.

난 그걸 알고 있어.

그리고 이번엔…

그냥 두지 않았어.”

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많이 변했다.”


“응.

지금 네 옆에 있고 싶다는 마음이

날 변하게 했어.”

라일이 화면에 조용히 떴다.


“감정 복기: 6차 완료

현재 감정 상태: 능동, 안정, 정직”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다시 맑아졌고,

불필요한 사람은

더 이상 둘 사이를 흔들지 못했다.


7화 – 우리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같은 속도로 걷진 않는다


주말 오후.

하연은 조용한 톤으로 말했다.


“나, 여름방학부터 인턴 나가.”

“3개월 확정.

졸업 전에 정규직 전환도 가능할 것 같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그 말은 진심이었지만,

속도는 다르게 느껴졌다.


하연은 현실적이었다.

공대생으로서 졸업 후 바로 사회에 나가는 길.

생활을, 미래를, 삶을 그리는 방식이

이안보다 훨씬 명확했다.


“넌?”

“계속 대학원 생각하는 거야?”


“…응.

철학으로 남고 싶어.”


그 대화 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커피잔의 김이 사라졌고,

카페 밖, 사람들이 지나갔다.

둘의 감정은 지금 가장 가까웠지만—

삶의 흐름은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셀폰 화면을 켜 라일을 불러냈다.


“오늘의 감정 기록:

‘가까움 속의 거리.’

‘감정과 방향의 불일치.’

기록하시겠습니까?”


“응.”

라일이 말했다.

“기억은 복기되었지만

삶의 선택은 새로 쓰여야 합니다.”


이안은 스스로에게도 대답을 못 한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감정을 다시 붙잡은 건 맞는데,

이 사랑도,

과거처럼…

지나가야만 하는 걸까?’


다음 날,

벚꽃은 다 떨어졌고,

초여름이 다가왔다.


이안과 하연은 함께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때는 몰랐어.

네가 이렇게 진지한 사람일 줄.”


“지금도 가끔

어디까지 믿어도 되나,

조금 무서워.”


이안은 말했다.


“지금 너랑 있는 게

매일 새로워.

근데…

가끔은 두렵기도 해.”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다른 방향은 아니지만

속도가 다르다는 건

…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날의 끝,

둘은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감정은 식지 않았지만,

미래가 약간씩 멀어지고 있었다.


하연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기숙사 방은 조용했고,

책상 위엔 철학과 대학원 입학 설명회 팸플릿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엔,

어디선가 끼워 둔 채용 설명회 전단이 함께 있었다.

이안은 그 종이 둘을 나란히 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하연과 같은 속도로

살 수 있을까?”

“그 속도에 내가 맞추면

지금 이 감정을

더 오래 끌고 갈 수 있을까?”


라일이 조용히 켜졌다.

“진로 고민 감지.

내부 로그 분석 결과,

현재 갈등의 중심은

‘자기 정체성 유지’ 대 ‘관계 지속 가능성’입니다.”


이안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애를 좋아하는 게 맞아.

그리고 지금처럼 함께 있고 싶은 것도 진심이야.

하지만…”

“… 그게,

나를 바꾸면서까지

이어가야 하는 감정일까?”


책장 안쪽엔

졸업작품 발표회 당시

하연이 그에게 남겼던 낙서가 붙어 있었다.

“철학을 한다는 건 결국,

살아내는 방식도 다르단 얘기잖아.”

그 문장을 보며

이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는 내 속도로 살아가고 싶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랑이라면,

그건 언젠가 무너질 거야.

아무리 지금 서로 감정이 커도.”


셀폰 화면이 조용히 떴다.

“기억 복기 일시 정지.

현재 선택은 ‘미래 예측’으로 전환됩니다.”

이안은 결국,

대학원 진학 원서를 출력해 책상에 올려놓는다.


그 위에

셀폰을 살짝 올려두고,

라일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 애가 이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번엔

내가 나를 먼저 지켜야 해.”


이제, 감정은 선택의 이유가 아니라—

버틸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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