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빛, 사랑》그때,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 2

첫 번째 빛의 색: 햇살 같은 첫사랑

by J이렌

2화 – 감정은 복기되지만, 사람은 예전 그대로


교정 한복판,

붉은 벽돌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분다.


그녀와 나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그런데 이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설게 편했다.


그 시절,

우리는 이 거리에서 수없이 마주쳤다.

때론 인사도 없이,

때론 의미 없는 농담만 나누고 흩어졌다.


그땐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들이

지금은 전부 의미로 붙잡혔다.


“오늘 무슨 날이야?”

하연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왜?”


“네가 이상해서.”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나 해서.”

“보통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잖아.”

그녀는 날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읽고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나를 모른 채 반응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건 고백도, 설명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미소를 받아줬다.


늦은 밤,

기숙사 방에서 셀폰을 꺼냈다.

라일이 자동으로 켜졌다.


“감정 복기 기록 분석 중입니다.”

“오늘 복기된 감정:

망설임, 눈치, 짧은 후회.

그러나 현재 선택된 반응은 ‘직진’.

비교 감정 없음. 새로운 경로 생성 중.”


나는 화면을 보며 웃었다.


“그냥,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어서.”


라일은 조용히 대답했다.


“기억은 복기되었고,

감정은 반응 중입니다.”


“이 흐름, 유지하시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만—

이번엔 끝까지 가볼래.”


우리는 공대 옆 조형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림자들은 길게 늘어졌고

창문 밖으로 누군가 실기 과제를 말없이 들고 나왔다.


“요즘도 조형 수업 많아?”

내가 물었다.


하연이 고개를 돌렸다.


“응. 이번엔 설치 미술.

의미 없는 오브제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의미 없는 게 뭔지부터 고민 중.”


나는 웃었다.


“그건 이미 의미 있는 고민이네.”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 넌 확실히 요즘 좀 다르다.”


나는 문과대 소속, 철학 전공.

‘이과를 못 간 문과생’처럼

감정의 뿌리는 계산하려 들고,

사랑도 원인을 찾으려 했던 시절.


하연은 조형예술학과.

감정은 먼저 손이 움직이고,

이해보다 먼저 창작이 있었다.


우리는 너무 다른 결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때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녀를 처음 봤던 순간은 아주 사소했다.

도서관 2층 복도,

화장실 앞 커피 자판기 앞에서

하얀 슬리퍼를 신고

커피를 뽑던 뒷모습.


긴 머리, 헐렁한 회색 후드,

그리고

커피를 받자마자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던 동작.


그건 뭐랄까,

몸이 감정을 먼저 느끼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게 좋았다.

그때는 이유도 없이,

지금은 이유를 정확히 알고.


“너,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도서관 자판기 앞에서 커피 마시던 뒷모습.

그때 처음 봤어.”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 진짜?”


“응.

그게 시작이었어.”

그녀는 나를 빤히 봤다.

눈빛에 흐림은 없었고,

말은 없었지만 감정이 복기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일은 말하지 않았다.

이건 감정이 아니라

상대의 기억 안으로 들어간 순간이었으니까.


그날 밤,

셀폰 화면엔 이렇게 떴다.


감정 복기 완료.

연동 대상 반응 수신 중.


현재: ‘상호 인지 시작.’

나는 화면을 껐다.

그 문장은

어떤 고백보다 따뜻했다.


3화 – 기억은 흐리지만 감정은 또렷하다


점심시간,

학생식당은 언제나처럼 시끄러웠다.

덥고, 웅성거리고, 사람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 혼잡 속에서 나는 기억 하나를 복기 중이었다.


강주형.


내 동기였고,

그 시절의 내 거울 같은 친구였다.


“야, 서이안!”

식판을 든 그가 나를 불렀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

그런데

나는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이상했다.

머리로는 그와 친했다는 걸 아는데,

감정이 반응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연락 안 되냐? 어제 MT는 왜 안 왔고.”


나는 애써 웃었다.


“잠깐 어디 다녀왔어.”


“하, 또 혼자만 튀는 거냐?”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깔린 묘한 거리감.


라일이 진동했다.

나는 셀폰을 들지 않았지만,

귀에서 짧은 멘트가 울렸다.


“기억과 감정의 싱크율 저하.

이 관계는 복기된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를 기억하지만,

그를 다시 좋아하진 않았다.


하연과의 감정은

예전보다 더 조용히 깊어졌지만,

과거의 다른 관계들은,

기억보다 빨리 흐려지고 있었다.


강주형은 계속 떠들었다.

학과 교수 얘기, 수업 팀플 얘기,

누가 누구랑 썸 타는 얘기.


나는,

그 모든 걸 듣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 흐름에 속해 있지 않았다.


“서이안, 너 요즘 왜 이렇게 멀어졌냐?”

그가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을 감정이었으니까.


식당을 나오며

라일이 물었다.


“과거의 사람들과

지금의 당신 사이에 생긴 거리,

그건 감정의 진화일까요,

아니면 감정의 소멸일까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건…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복기는 관계도 필터링한다.

지금 나는,

그때보다 덜 어울리고,

더 정확하게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식당에서 나오는 길.

강주형은 계속 웃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이 조금 달랐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이 웃지 않았다.

그 시절엔 몰랐다.

그게 단지 내 무심함 때문인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그건 ‘질투’를 감추는 방식이었다.


정하연.

그녀가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말을 걸고,

누구보다 가볍게 다가가던 사람이 강주형이었다.


그땐

그게 그의 성격이라 생각했다.


“하연이랑도 얘기 좀 해봤다며?”

그가 가볍게 물었다.

나는 잠시 멈췄다.

“…응.”

“걔가 말은 없는데,

되게 조용히 잘 따르더라.”


그 말,

그 뉘앙스,

그 시선.


예전 같으면 그냥 흘려들었을 말이,

지금은 의도가 선명하게 읽혔다.

라일이 조용히 진동했다.

“감정 복기: 미확인 질투.

기억과 감정의 불일치 발생.”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회식 자리에서

하연 옆에 앉았던 밤.


하연이 슬쩍 자리를 바꾸려 했고,

그가 웃으며 막았던 장면.


그땐 그냥

‘활발한 애’라고 넘겼다.

지금은 안다.


그는 조용히 선을 넘어 있었다.

더 이상은 복기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 기억을 복기할 필요 없이

정확히 해석할 수 있었다.

강주형은 두 얼굴이었다.

밖으로는

“야, 이안. 너 진짜 감성 묘하다”

라며 웃었고,

뒤로는

“걘 좀 특이해서

하연이 금방 질릴걸”

이라고 말하던 사람.

그는 언제나

조금 더 먼저 움직였고,

조금 더 먼저 뭔가를 차지하려 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다.


라일의 텍스트가 다시 떴다.


“기억의 흐름보다 감정의 판단이 앞선 상태입니다.

복기를 종료하시겠습니까?”


나는 화면을 껐다.


“이건 복기가 아니라,

그냥…

진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하연에게 먼저 연락했다.


“오늘,

시간 괜찮으면

조금만 더 걷자.”


4화 – 감정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


밤늦게.

캠퍼스 뒤편, 오래된 테니스장 근처의 산책로.


이안은 하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깐, 걸을래?”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셀폰 화면엔 ‘읽음’ 표시조차 없었지만

이안은 기다리지 않았다.


걸었다.

혼자였지만,

감정은 이미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다.


20분쯤 흘렀을 때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 이안.”


하연이었다.


“나 이런 거

잘 안 하는 거 알지?”


“응.

근데 네가 와줘서 고마워.”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달빛이 약했고,

오래된 가로등이 깜빡였다.


“강주형이 너 얘기 좀 했어.”

하연이 말했다.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했는데?”


“요즘 너 많이 변했다고.

예전엔 좀…

무심했는데

지금은 뭔가,

… 선이 달라졌다고.”


이안은 짧게 웃었다.

“그 애가 예전에도

그런 말 자주 했어.

내가 ‘좀 느려 터졌다’고.”


하연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느꼈었거든.

그땐.

너한테 뭔가 물어보면

항상 한 박자 늦게 대답했잖아.”


“그건…

내가 감정을

제때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던 거야.”


하연이 멈춰 섰다.

그리고 이안을 바라봤다.

눈빛에 담긴 건

의심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확신이었다.

“그럼,

지금은 이해해?”


“…응.

지금은,

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금은 알아.”


그 말 뒤로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이,

고백보다 더 강한 반응이었다.

셀폰은 진동하지 않았다.

라일도 말하지 않았다.


이건 복기가 아닌

지금 만들어진 감정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걷던 길 끝에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땐

너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

지금은,

네가 말하지 않아도 곁에 있고 싶어.”


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이안의 옆에 머물렀다.

감정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였다.

그날 밤,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10시 반에 문을 닫았지만,

서고 뒤쪽 작은 열람 공간은

누구도 찾지 않았다.


책을 들고 있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발자국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만 가능한 대화가 있었다.


“여기 왜 데려온 거야?”

하연이 묻는다.


나는 말없이

책장 끝 가장자리 창가 쪽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서

한 번 널 봤었거든.

아무 말도 없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게…

되게 인상적이었어.”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반대편에 앉았다.

말이 없었다.


책도 펴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한 기류가

우리 둘 사이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땐

네가 이런 말 할 줄 몰랐어.”

하연이 중얼거렸다.


“나도 몰랐어.

그땐 나도,

내 감정이 뭔지 잘 몰랐으니까.”

그녀가 조용히 책 하나를 꺼냈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

누군가 반납하지 않고 오래 꽂아두었던 책이었다.


“이 책 아는 척 많이 하더라, 다들.

근데…

정작 읽은 사람은 몇 안 돼.”


“너는?”


“오늘 읽어보려고.”

그녀는 책을 펴고

몇 줄 읽다가 말했다.

“이런 구절 있어.

‘우리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을 영원히 붙잡을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는 그 문장을 조용히 곱씹었다.

그리고 속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난 지금,

이 감정에 이름 붙이지 않고

그냥 옆에 있고 싶다.”


창밖엔 바람이 불었다.

벚꽃은 거의 떨어졌지만

서고 유리창 바깥,

몇 송이의 잎이 유리창을 스치듯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봄을 눈으로 읽었다.


[감정 복기 없음.

새로운 기록 생성 중.]


라일의 멘트가 셀폰 화면 구석에 뜨고,

조용히 사라졌다.


말보다 조용했던 데이트,

그 속에서

서로의 감정은 완전히 현재형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가 책을 덮었다.

책장 너머로 창밖의 어둠이 번졌다.


“이안.”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오래,

말없이.


그 순간,

셀폰 화면은 꺼졌고

라일의 멘트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책상 위,

내 손 위에 그녀의 손등이

잠깐 닿았다.

움직임은 없었다.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 건 조용한 입맞춤과 같았다.


그녀가 손을 거두지 않아서

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 복기 없음

기록되지 않는 감정 흐름 탐지 중]


화면 아래 아주 희미하게

그 문장이 떴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내가 비쳤고,

내 눈에도

그녀가 머물렀다.

우리는 책도, 시계도, 말도 잊은 채

그 조용한 공간 안에서

서로에게 아주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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