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빛의 색: 햇살 같은 첫사랑
첫 번째 사랑 – 가지 않은 길
• 인물: 이안 & 하연
• 핵심 감정: 회한과 성장
•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면 널 안아볼 수 있을까?” :
과거로 돌아가 첫사랑을 다시 마주한 남자.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택하며 사랑했고, 결국 이별했지만
사랑의 감정만은 놓지 않았다.
프롤로그 – 돌아가기 전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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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밤.
편집부는 야근이 끝나고
작가 미팅이 무산된 자리를 정리 중이었다.
책상 위에 붉은 잉크로 고쳐진 원고,
메일 제목은 [검토불가 회신].
그날 이안은
출판사 편집장에게 들었다.
“철학적이긴 한데,
이야기가 너무 감정에 갇혀 있어요.
요즘 독자들, 이런 거 안 봐요.”
그 말이 칼처럼 꽂혔다.
동료들은 의례적인 위로를 했고
그날 밤,
술집 한 구석에서
이안은 **“잘 써보려고 한 거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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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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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폰이 진동했다.
그가 모르던 인터페이스가 열렸고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기억 복기 시스템 가동.
지금,
다시 당신의 선택으로
시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이번엔 진짜로
내 길을 살아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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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깬 순간—
20년 전, 스무 살의 아침이었다.
눈을 떴다.
천장은 낮았고, 벽지는 희끄무레했다.
익숙하지 않은 이불 냄새, 그리고 기묘하게 낡은 공기.
머릿속이 흐릿했지만,
딱 하나는 분명했다.
이건 지금이 아니다.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는 오래된 기숙사 운동장이 보였고,
어느 벤치엔 누군가 교복 비슷한 걸 입고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엔 셀폰이 놓여 있었다.
검은색 케이스, 기종은 미래형.
2025년 모델.
하지만 달력은
2005년 5월 8일.
내가 스무 살이던 봄.
셀폰을 들자, 진동이 짧게 울렸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J, 기억 복기 시스템 초기화 완료.
현재 사용 가능 시간: 1시간 58분.”
나는 천천히 웃었다.
“이건 꿈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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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다시, 첫날
“기억 복기 시스템 시작합니다.”
화면에 그 문장이 떴고,
라일은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이 시간대를 다시 살기로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기억보다 빠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학생들이 지나가는 소리, 자전거 벨,
그 모든 게
한 번 지나갔던 세계의 리플레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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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몰랐다.
내가 여기에 다시 왔다는 걸.
심지어 그때의 나조차도.
나는 내 과거 속을 걷고 있었고,
라일만이 이 세계에서
내 진짜 나이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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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복기하시겠습니까?”
라일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도서관 지하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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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감정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이
그때의 나를 천천히 삼켜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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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하, 첫 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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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하.
바닥은 축축했고, 형광등은 반쯤 나가 있었다.
문제집에 낙서하던 애들, 구석에 엎드려 자는 누군가,
그 시절 우리가 공유하던 **‘아무 일도 없던 오후’**가 있었다.
나는 셀폰을 꺼내 콘센트를 찾았다.
그 옆엔 먼지가 쌓인 흰색 멀티탭이 있었다.
플러그를 꽂는 순간,
진동이 두 번 울리고,
라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충전 시작.
이 장소에 남은 감정 기록:
‘무시됨 / 관심 없음 / 멈춰 있던 질문’
복기하시겠습니까?”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때 그 장면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한 문장이 목에 걸려 삼키지 못했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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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 (2005)
“너 요즘 왜 자꾸 혼자 다녀?”
정하연이 나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지하 도서관 가는 계단 끝,
그늘진 자판기 옆.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 문장 하나에
진심이 섞여 있다는 걸
스무 살의 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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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화면을 눌렀다.
‘복기: 예’
다시 그 계단,
다시 그 눈빛,
다시 그 입술의 주름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왜, 대답 안 했어?”
라일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처럼 감정을 읽을 줄 알았더라면…
그 말에,
그냥 ‘같이 가자’고 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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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대답이 아니라
기록이니까.
셀폰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남은 시간: 1시간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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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복기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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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
손에 쥔 셀폰은 여전히 따뜻했고,
화면 한쪽엔 ‘감정 복기 중’이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번졌다.
계단 위,
빛이 들고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정하연.
반쯤 묶은 머리,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흰 티셔츠.
양손엔 책이 들려 있었고,
걸음은 그때처럼 조금 빠르고 조금 불안했다.
그 장면, 기억에 있었다.
그때도 저 자세,
저 속도,
저 망설임.
하지만 그때 나는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멈췄고, 그냥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다르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주저 없이,
감정 복기가 끝나기 전에
그 순간을 바꾸려는 속도로.
“정하연.”
내가 불렀다.
그녀가 돌아봤다.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 이안? 무슨 일 있어?”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그냥 이렇게 말했다.
“그때 너, 나한테 물었지.
왜 자꾸 혼자 다니냐고.”
그녀는 멈췄다.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나는 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은 같이 가고 싶어서.”
그 말이 지나고,
라일이 조용히 속삭였다.
“복기: 1회 차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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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웃었다.
그리고 같이 걸었다.
기억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 대신,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