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미스 슬로운
직업윤리(Professional Ethnics)란 사회에서 직업인에게 요구하는 직업적 양심이자 사회적 규범이다. 한마디로 ‘직업인이 지켜야하는 것’이다. 모든 직업에는 각자의 직업윤리가 있다. 상담가는 환자와의 민감한 상담기록을 공개해서는 안 되고, 시공업자들은 건축에 있어 부실공사를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특정 직업이 추구하는 고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이 직업윤리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로비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직업윤리라는 것이 참으로 애매해진다. 직업 자체가 갖는 신념은 물론이고 개인의 신념마저도 유지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이 로비스트라는 직업이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로비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상당히 활성화되어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로비 활동을 진행하고 법안에 영향을 준다. 의뢰를 받은 후 여러 공작을 거쳐 법안 찬성표를 늘이거나 반대표를 늘여 국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실력 있는 로비스트다. 그녀는 명석한 두뇌와 냉철함을 무기로 높은 승률을 자랑한다. 그런 그녀에게 총기규제 강화 법안을 둘러싸고 찬반 양측에서 모두 손을 내민다. 슬로운은 고민 끝에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슈미트를 선택한다. 그리고 총기규제 강화를 반대하는 집단과 손을 잡은 자신의 회사를 뛰쳐나온다.
영화가 그려내는 로비스트의 업무는 그야말로 살벌하다. 특히나 실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로비스트들은 더하다. 토론회나 이익집단과의 접촉을 통해 의원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업무는 일상적이다. 하지만 도청에 협박, 밀정에 불법 자금까지 오가며 싸움은 점점 진흙탕처럼 번져간다.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결국 이들의 작전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쫓기에 바쁘다. 개인의 신념보다는 아들의 정치 생명, 자신의 후원금 확보가 더 중요하다. 그들에겐 신념이 없다.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이익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무서운 점은 이익이 아닌 본인의 승리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이용해가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향해 달린다. 매일 각성제를 먹으며 잠까지 줄이고 남성을 돈으로 사 성욕을 해소한다. 일상생활을 모두 버릴 정도로 그녀는 자신만의 승리를 쫓고있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와는 상관없다. 다만 자신이 이기느냐 지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를 위해 그녀는 모든 것들을 계획한다. 가까운 인물부터 주어진 상황, 자신의 행동까지 모든 것이 계획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다. 모든 것을 손바닥에서 쥐락펴락한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모두에게서 신뢰를 잃는다. 슬로운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그 점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가 신념 있는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행동과 입에서 뱉는 말 하나하나가 승리를 위한 짠 계획이라고 믿게 된다. 극 중 인물들을 넘어 관객들마저도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다. 결국 그녀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뒤 자신의 한계에 부닥친다. “신념 있는 로비스트는 자신의 승리만을 믿지 않아요.” 법정에서 슈미트에게 건내진 쪽지의 내용이다. 그녀는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을 위해, 본인 스스로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신념이 결여될 수밖에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직업 자체의 신념이든, 혹은 개인의 신념이 작용하는 방식이든 말이다. 다만 그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행동하느냐가 문제를 결정짓는다. 총기규제강화를 지지하던 에스미부터 슬로운의 변호사였던 다니엘을 걸쳐 그녀를 에스코트했던 포드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위치는 다르지만 각자의 신념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반면 수많은 정치인들과 그들을 협박하던 조지 듀퐁의 모습은 어떤가. 슬로운은 선을 넘었지만 결단을 내렸다. 신념을 지키는 것은 큰 대가를 요구하지만 신념을 잃었을 때 넘게 될 선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 승리를 하더라도 상처뿐인 승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며, 동시에 자신의 미래를 이끌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결국 그 선택을 하는 것은 개개인의 몫이다. 극 중 등장한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PS1.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가 대단하다. 엄청난 양의 대사를 소화했음은 물론이고 엘리자베스 슬로운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을 살려 훌륭히 연기해냈다. 연기상 후보에도 못 오른 게 미스터리다.
PS2. 극 전개에 다소 헐거운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엄청난 대사량과 정보량이 관객들을 몰아붙이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들을 쳐내는 것이 더 영리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PS3. <미스 슬로운>은 실화 영화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묵직함은 다소 약할 수 있다. 하지만 법안을 둘러싸고 로비스트들이 벌이는 수 싸움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꾸준히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132분이라는 러닝타임을 타이트하게 끌고 가는 그 힘이 <미스 슬로운>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싶다.
※ 이 글은 <디아티스트매거진>에 칼럼으로 기고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