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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30. 2016

2016 홍진아어워즈

올 한 해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

2009년부터인가. 매년 이맘때 '홍진아어워즈'를 개최했다. 물론, 나만 아는, 나만의, 내 마음대로의 시상식. 남들 안하는 싸이월드를 한창 열심히 하던 때였어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데 일년 중 가장 심혈을 기울여 포스팅을 작성했다.

 

매일 아침 '이래도 괜찮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던 시절, 많은 것을 하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아니어서 자고 일어나 한참을 누워있어도 되었던 시절, 그 시절에 '올해의 드라마'나 '올해의 문장들'을 뽑고 그걸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 <홍진아어워즈>. 그래서 '홍진아어워즈'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일 년 동안 내가 먹고, 자고, 쓰고, 만나고, 사고, 입고, 듣고, 보고 한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아 보면서 그것들을 해 낸 나를 칭찬하는 일.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더 많은 일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옆에 있어준 사람들, 책들, 공간들, 작품들에 감사하는 일. 이렇게 일년을 잘 지냈으니 내년 일년도 올해만큼 괜찮을 거야, 라고 얘기해보는 일.


<홍진아어워즈>는 어떤 해에는 짧은 인사말로 끝나기도, 어떤 해에는 그냥 지나가기도, 또 어떤 해에는 끝없이 번호를 매겨가며 소소한 것들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올 해는 잘 정리해보고 싶다. 브런치를 계속 하는 한, 매년 잘 정리해서 10년 쯤 뒤에는 출판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10년치를 모아놓으면 한 사람을 성장시키고 살게 하는 것이 맛있는 커피와 떡볶이, 의도하지 않은 격려, 방바닥을 뒹굴거리던 순간,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의 곁이 되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지 않을까.


시작해볼까.


/


*총평


올 해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해였다. 단순히 일을 많이 했다기 보다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어떤 것을 잘하고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해. 유능감이 생긴 부분도 있고, 또 일에 관한 호불호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관련한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었고, 일의 풍경에 관해 또래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했던 대화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래서인지 영화도, 연극도, 뮤지컬도, 전시도 예년처럼 보지 못했고, 책도 많이 읽지 못했다. 작년엔 공연을 38편 정도 봤는데 올 해는 꼽아보니 열 다섯 편 정도. 책도 완독한 것만 세면 열 두권 읽었다. 주로 '보는' 것을 통해서 인풋도 얻고, 스트레스도 해소하는데 이런 것들이 부족해서인지 연말쯤엔 소진된다는 느낌이 다른 해보다 더 들었던 것 같다. 일의 풍경과 퇴근 후 삶, 적당한 쉼과 인풋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2017년이 되었으면. 말이 좋아 조화지 올 해보다 좀 더 놀아보겠다는 말이랄까...음?

'재밌는 건 다해요'가 삶의 모토인데 그래도 재밌는 것들을 소소하게 하면서 잘 지냈던 것 같다. 특히 맛있는 것을 먹고 편히 쉬는데 시간과 자본을 아끼지 않은 나를 칭찬한다.


1. 올해의 책

1) 소설 : 최은영, '신짜오, 신짜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 길에서 나 또한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나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 안에 들어있는 소설. 개인적으론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보다 다른 소설들이 더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정은도, 김애란도, 정세랑도 가지지 않은 지점을 가지고 있다. 박솔뫼와 비슷한데 좀 더 다정하고 따뜻하다. 절대 쉽지 않은 내용들, 그러니까 한일 관계랄지, 베트남 전쟁이랄지, 80년 대 서울과 광주의 청춘들의 이야기랄지, 그런 내용들을 철저한 개인의 관점에서 문학적으로 풀어냈다. 굉장히 마음이 아픈 순간들이 있는데, 상처받은 주인공들이 그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 탓을 하면 좋겠는데 아픔을 삭히면서 뜨개질을 하거나('신짜오, 신짜오') 아무렇지 않은 척 옛 친구를 맞이하거나('언니, 나의 작은 순애언니'), 관계 안에서 내 잘못이 무엇이었을지를 끊임없이 복기한다(한지와 영주).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인 사람들의 편에 서고 싶다는 것이 최은영의 작가로서의 바람이라면 잘 이루어 가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다음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황정은의 <아무도 없는>,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과 <희랍어 시간>도 좋았다.


2) 비소설 :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 인정받으면서 기꺼이 일을 놀이처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혼자 이뤄낼 수 없는 목표다. 행복하게 일하려면 '행복한 일'의 정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무리를 이뤄 스스로 주인이 된다면 온전히 행복한 일에 훨씬 가까워질 것이다.
- 제현주,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내가 하는 일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일을 하는 환경에 민감한 나. 평생 직장이라거나 안정된 직장에 대한 로망이 하나도 없는 나. 오히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답답해 지는 나. 과연 이런 내가 일하기에 적합한 인간일까, 고민이었던 적이 있다. 이 고민은 오래된 것이지만 해결되지는 않았고, 여러 환경들을 거치며 더 깊고 세밀해졌다. 대주제에 대한 세부 주제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던 중 청년청에서 열린 제현주님의 강의 <달라지는 일의 풍경, 여성의 일>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고, 세분화된 질문들 중 몇 가지에 답을 얻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취업이 더욱 요원해지는 앞으로는 일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포트폴리오 안에 담긴 나의 서사를 스스로 만들고 해석해 내는 것이 더 중요해 진다'는 것. 어떤 일을 하느냐만큼 그 일들을 어떻게 모아서 내 생의 과정들 속에서 해석해 낼 것인가도 일하는데 있어서 중요해질 거라는 예측이 불안했던 나의 생각들을 정리해주었다.

덕분에 집에 돌아와 읽은 책은 강의 내용을 좀 더 심도있게 다뤘다. 일의 정의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일하고 있는 이유들, 이것을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나 환경의 필요성 같은 것들. 무엇보다 '진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그렇게 일하고 고민하는 것, 당연한 거야'라는 격려를 해주었다. 고민을 하는 것이 나만이 아니며, 답은 혼자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책이 끝남과 동시에 진짜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찬찬히 질문들을 들여다보고 답을 찾아가고 있다.


최윤필기자의 <가만한 당신>도 잔잔하게 감동하며 읽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조한교수님 외 여러분이 공저자로 참여한 <노오력의 배신>도 줄 치며 재미있게 읽었다.



2. 올해의 연극 :  김은성 작 <썬샤인의 전사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썬샤인의 전사들>은 김은성의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극을 보고 집에 오는 길에 '천재는 있어. 어떻게 이런 걸 쓰지?'라는 말을 친구와 다섯 번도 더 했던 것 같다.


양손프로젝트의 <마이 아이즈 웬트 다크>도 좋았다. 



3. 올해의 뮤지컬 : <위키드>

예술의 전당에서 여섯번째 <위키드>를 보았다. 제일 좋아하는 뮤지컬이긴 하지만 1막 보다는 2막의 짜임이 느슨해서 늘 아쉬웠는데, 한 배우가 그 느슨한 짜임 사이사이를 메꾸는 것을 보았다. 2막을 어쩌다극장 멤버들이랑 쪼로로 앉아서 봤는데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계속 흘리는 바람에 턱받이가 필요했던 공연이었다.


올해의 뮤지컬로 고민했던 또 다른 작품은 <넥스트 투 노멀>. 올 해 초에 두 번 봤다. 다시 올라오면 또 볼 거다.



4. 올해의 공연 : 판소리만들기'자'의 <여보세요>


김애란의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만든 판소리. 좋아하는 이자람이 작/연출을 하고 좋아하는 소리꾼인 이승희가 작창과 소리를 하고. 이전 공연인 <추물/살인>도 좋았지만, 2000년대의 소설로 판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왜 판소리를 소설에 비유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에서도 마지막 장면이 아주 강렬한데 이 장면을 메트로늄으로 너무 멋지게 표현해서 소름 돋았던 기억.


이자람의 <아워타운> 워크샵공연이 가장 좋았지만, 완성된 공연이 아니었고.



5. 올해의 공연장 : 두산아트센터


두산아트센터는 작년에도 올해의 공연장으로 뽑혔는데 올해도. 올해 연극은 거의 '스페이스111'에서 봤고, 연강홀에서 <넥스트 투 노멀>도 봤고. 올해의 연극과 올해의 공연을 모두 두산아트센터에서 봤네.

 


6. 올해의 영화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꺼이꺼이 울면서 봤다. 진과 봤는데, 푸드뱅크 장면에서 둘 다 소리를 지르고 난 뒤 눈물을 디폴트 값으로 해서 격하게 울거나 조용히 울거나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한 정도. 올해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영화인데 이 영화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늘 내가 시민이고,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돕고, 빵과 장미 모두 필요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고 살아야지.


<브루클린>, <캐롤>, <주토피아>도 좋았다.



7. 올해의 떡볶이 : 상수동 '사이드쇼'의 차돌즉떡


지금 이순간에도 먹고 싶다. 하루 세끼 다 떡볶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또보겠지'도 1위 후보였지만 긴 웨이팅은 나의 반감 지수를 올려서 '과연 여기가 뭐가 맛있어서 줄을 서지'라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떡볶이를 먹게 되기 때문에 1위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사랑함. 사실 떡볶이 다 맛있었다(기준 없음).



8. 올해의 커피 : 대루커피의 플랫화이트

헬카페의 헬라떼를 꼽을까 했으나 맛있는 커피를 꼭 마시고 싶어 일요일 저녁 8시가 넘어서 마신 대루커피의 플랫화이트를 이길 커피는 없는 듯. 어떻게 이렇게 고소한 맛을 내는지. 특히 아이스플랫화이트는 대부분 얼음이 녹은 상태로 마시기 시작하는데 대루커피의 플랫화이트는 그렇지 않다는 게 신기.


헬카페의 헬라떼, 듁스커피 쇼룸의 플랫화이트도 맛있었다.



9. 올해의 장소 : 상수동Bar <리슨>

상수동 리슨, 12월 19일 토요일 밤

처음 간 건 지혜랑 이나랑 셋이, 아주 더운 여름날. 모히또를 하는 바를 찾다가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인데 그 때는 이후에 우리가 이렇게 자주 가게 될 줄은 몰랐지. 기분이 좋으면 좋아서, 또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들어서, 바쁘면 바빠서 잠깐, 시간이 많으면 많아서 오래오래, 온갖 이유를 대며 찾아가면 무심한 바텐더가 내게 맞는 술을 추천해주고, 한잔을 오래도록 마셔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곳. 탄노이 에딘버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한 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아주 바쁘던 여름의 한 중간에도, 눈물이 나던 겨울의 어떤 주말에도 리슨에 있었다.



10. 올해의 사건 : '오늘의 인물'에 선정되어버린 나


졸지에 설치는 여자 홍씨가 되었다.

http://news1.kr/articles/?2595040


11. 올해의 무념무상 : 서핑하던 세 시간


올 여름에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절대 머리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속 생각들이 많아져서 집에 오면 쉼 모드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올해 꼭 하고 싶었던 서핑을 하게 되었는데 서핑을 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첫 수업이었는데, 파도를 타려면 파도와 나와 보드에만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딴 생각을 하면 파도가 잡히지 않았다. 왜냐면 초집중을 해도 파도가 잡히지 않으니까, 아하하.

내년에는 좀 더 서핑을 많이 하고 싶은데, 서울이란 곳은 바다와 너무 멀며...제주도나 강원도에서 일하며 하고 싶을 때 서핑도 하는 언젠가를 꿈꿔본다.  



12. 올 해의 잘한 일 : 8년 만의 이사


문득,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어떤 일을 위해서 지금의 나의 삶을 유예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원래 늘 하던 것이었는데, 올해는 유독 더 강하게 들었던 생각. 왜 우리나라의 청춘들은 결혼할 언젠가를 위해서 지금을 늘 유예하며 사는 걸까,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새 집을 찾았고, 산지 8년 된 낡은 빌라를 떠났다. 대출을 좀 더 받아야 했고 월세를 조금 더 내야했지만 삶의 질이 달라졌고 내 삶에 대한 태도도 좀 더 적극적이 되었다. 어떤 시도는 그것만으로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유예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이다.



13. 올해의 섬 : 3월의 강화도


3월에 매주 강화도에 다녀왔다. 강의 때문에 유스벤처팀이 모두 함께 수요일마다 강화도에 있는 학생교육원을 찾았다. 막 겨울과 봄이 교차되는 시기였고, 그래서 같은 길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함께 봤다. 유독 그 시기가 생각나는 건,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우리들이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 안에서도 회의를 할만큼 바쁜 스케줄이었지만, 함께 뭔가를 만들어 나가고, 결과물을 함께 보는 것, 그리고 그 결과물에 대해 서로 칭찬하고 또 아쉬운 부분들을 찾아 다음엔 다르게 해보는 경험을 3월 내내 함께 했다. 이런 경험이 팀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던 경험. 마지막 주에는 개나리가 핀 것을 봤다.



14. 올해의 연구 : 진저티의 '밀레니얼 프로젝트'


나는 누구인가, 는 청소년기에만 하는 질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생의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더라. '밀레니얼'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을 갖던 중 1980년대 생의 나와 나의 세대는 어떻게 일하고 또 공익활동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 번의 개별 인터뷰와 세 번의 그룹 워크샵을 하면서 나에 대해 원없이 말했던 시간이었다. 과정 중에 굉장히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좋은 질문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기도 했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우리조에게 주어진 과제를 하나도 진행하지 못하고 '우리가 이걸 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주제로 끝도 없이 토론을 하던 순간. 세팅이 마음에 들지는 않고, 그렇다고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겨우 기록자분께 물었는데 "과제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논의를 하는 순간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셔라" 라고 대답해주셨다. 연구팀에 대한 신뢰가 있어 연구참여를 하기도 했지만, 연구 자체와 라포를 형성하게 되었던 계기.


연구 자료집도 예쁘게 잘 나왔다.

http://gingertproject.co.kr/archives/2198



15. 올해의 여행 : 뉴올리언즈 홀로 여행

2월 말 갑자기 갔던 출장. 일이 다 끝나고 휴가를 내서 뉴올리언즈를 여행했다. 가려면 가겠지만 내가 여행지로 고려하지 않았을 미국 남부의 어떤 도시. "음악 없인 도시도 없어요"라는 대사가 진짜 어울리는 곳. 어딜 가나 음악이 들렸고, 밤에는 길에 노래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맛있는 음식과 싼 물가 때문에 넉넉해져버린 마음 때문인지 다 좋았다. 돌아오기 전 날, 두 개의 미술관에 갔는데 미술관 벽 면에서 <Before I die>를 봤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뉴올리언즈라는 걸 알게 되었던 날.



16. 올해의 전시회 : 브리즈아트페어 2016

보라커랑 함께 갔던 <브리즈아트페어>. 사실 전시가 좋았다기 보다는 분위기가 좋았다. 맥주 마시고 떠들며 작품들을 본 것도 좋았고, 뽑기에서 '허승희 작가'가 나와서 소름돋았던 것 순간도 기억난다. 즐겁게 보고 느낀 것들을 마음껏 얘기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전시 보고 나와서 정말 맛있는 커피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아무데나 들어가는 바람에 컴플레인을 두 번이나 했던 그 카페도 잊지 않을 것이다, 영영...



17. 올해의 장면 : 강남역 10번 출구의 설치는 엽서

지난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이 보도된 날, 친구가 내게 사진을 한 장 보냈다.

"10번 출구에 우리 엽서가 붙었어."

아마도 우리 가방을 샀을 누군가가 보도를 듣자마자 강남역에 갖다 붙였을.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엽서를 보고 내가 하는 일들을 그만두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이어져있고, '너는 나다'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미세하게나마 알릴 수 있다면,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행동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되어야지, 다짐했던 장면.



18. 올해의 선언 :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졸업생 연대 <탈선>의 지지문

이에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문단,학교, 선생은 아니지만, 문학은 될 수 있다. B시인, C소설가, 우리는 문학이 되어서 네 이름을 갉아먹고 성장할 것이고, 네가 눈 돌리는 모든 곳에 너보다 먼저 와 있을 것이며, 네가 내딛는 모든 발걸음에 문학이 된 우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문학이자 산증인으로 우리 스스로를 증명할 것이다.
우리의 연대와 지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흙탕에서도, 아스팔트에서도 기어나올 것이다. 우리는 이제 시작했다.

올 해는 유난히 '선언'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지지선언. '우리는 문학이다'



19. 올해의 한마디 : "진아커는 작품하듯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한동안 함께 일했던 현선커는 언제나 탁월한 해석을 통해 나의 일들을 좀 더 근사하게 만들어주셨는데 잊혀지지 않는 한마디가 바로 이것. 일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시다가 내가 어떻게 일하고 또 어떤 순간에 힘이 나는 것 같은지 말씀해주셨는데, 그 순간에 힘이 났다. 저 문장이 모두에게 다른 해석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온전한 뜻을 나는 아니까. 가끔 일을 하다가 떠올렸던 말이다.

스스로 삶의 서사를 써내려가고 해석해나가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의 따뜻한 피드백들이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과한 칭찬이나 격려보다 오히려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도.



20. 올해의 수영 : 수영만 했던 여름의 제주도

6월에 이나랑 제주도에 갔다. 호텔 체크인 하고 체크 아웃할 때까지 2박 3일 간 한 일은 밥 먹고, 수영하고, 잔 것. 이외의 것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약간 수영에 미친 사람들처럼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번 수영을 갔는데 마지막 날에는 피곤해서 입 안에 구멍이 났고 여행에서 집에 돌아와서 정말 앓으면서 잤다. 왜 그랬지, 생각하지만 나는 내년에도 수영만 하는 2박 3일을 보낼 예정.



21. 올해의 그래그러자 : 우아하게 함께 늙고 있는 윤이나 신지혜 양유정


서핑 갈까, 촛불 집회 갈까, 떡볶이 먹을까, 고기 먹을까, 연극 볼까, 한강 갈까, 산책 할래, 노래방 갈래 블라블라. 뭐든 망설이지 않고 물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늘 대답은 그래, 그러자. 내 비빌 언덕들.



22. 올해의 송년회 : 정지원네 원룸 바닥에 츄리닝 입고 누워서 하는 아무말 대잔치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고, 정신차려보니 가까워져 버렸다...음?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라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심을 무너뜨려준 사람들. 각자 너무 다르지만 또 비슷한 점도 많아서 같이 있으면 재밌다. 무엇보다 웃겨...음? 한 해를 마무리하자고 모였지만 아무말을 새벽 여섯시반까지 쉬지 않고 했던 송년회. 지원님이 미리 마련해 둔 개인형 맞춤 잠옷을 입고(나는 주황바지를 입음), 방바닥에 누워서 누가 자든 말든, 가십과 삶이 걸린 고민 사이를 오가며 얘기를 나눴다. 이후에 같이 영화도 보고, 밤새 카톡도 하고, 고민을 나누기도하고, 크리스마스 이브 파티에도 갔다. 함께하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사진을 겁나 보내며 카톡으로 하나되는 우리.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쓴다는 것이 꼭 같이 보낸 시간에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23. 올해의 변신 : 강제 커트머리


연희살롱의 혜정쌤은 일년 여 간 나의 머리를 커트로 잘라주고 싶어했다. 나는 계속 그 유혹을 뿌리쳤으나 올 해 5월, 드디어 커트를 하게 되었다. 잘라보니 그리 나쁘지 않아서 한 번 더 잘랐는데, 선생님은 보여준 사진과 전혀 다른 머리를 해주었고, 나는 혜정쌤과 당분간 절교를 하게 되었다. 머리와 반목하는 하반기를 보냈고, 이제 점점 길어가지만 왜 겨울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내 머리를 여전히 커트인가. 하.

하지만 좋은 커트였다. 편하고!




24. 올해의 아티스트 : 정소영


예술이 인간을 어떻게 살게 하는지, 어떻게 버텨내게 하는지 올 한 해 생생히 보여준 사람. 나는 늘 '낮엔 일하고 밤에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건 말해서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안다. 언니는 올 한 해를 정말 그렇게 살았고, 결국 언니 작품으로 드라마가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아티스트와 가까이 할 수 있는 삶이라 고맙다.



25. 올해의 프로젝트 : 사회혁신가N명의 시국선언


사안도 사안이었지만,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함께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준 경험. 모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구글시트로 일했는데 이렇게 일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걸 깨닫기도 했다.



26. 올해의 인물 : 포기하지 않은 여성들


끊임없이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면서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여성들, 모두에게 올 해 많은 것을 배웠고 나 또한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나도 느리지만 조금씩, 계속 해 볼 생각이다.



27. 올해의 뿌듯함 : 포기하지 않고 홍진아어워즈를 끝낸 나


처음부터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다들 눈치챘겠지만 갈수록 짧아지는 코멘트. 또 뭔가 카테고리가 잘 나뉘어져 있지 않은 수상 순서. 그렇다. 중간에 하지 말까를 백번 고민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쓰고 끄고 쓰고 끄고를 계속 했기 때문에...

어쨌든, 이제서야 2016년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 쓰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잘 지냈으니 내년에도 잘 지내야지. 누군가를 꼭 따라가기 보다는 내 취향을 잘 발견하면서 나답게 사는 2017년이 되면 좋겠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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