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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Dec 27. 2017

2017 홍진아어워즈

올 한 해 나와 함께 해준 어떤 것들

'시간이 너무 빠르다'라는 말은 언제쯤 하지 않게 될까. 매년 연말에는 늘 시간이 금방 지났음을 감탄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시간이 빠르다는 감각이 언제부터였는지 문득 궁금해졌는데, 왜냐면 학창 시절엔 늘 시간이 안 간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이렇게 계속 빠르게 흘러도 되는 걸까, 언젠가 그 가속도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찾아오는 걸까, 이만큼 살았는데 또 모르는 것 투성이다. "세월이 살 같다"는 좀 과장된 문장을 언젠가 나도 말하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도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올 해는 '빠르다'를 표현하려면, '빠르다 제곱' 정도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16년 홍진아어워즈를 정리하던 게 며칠 전 일 같은데 뭔가 많은 일들이 지나가고 다시 2017년 홍진아어워즈를 쓰는 시간이 오다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래서 더더욱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뭘 했는지 왜 즐겁고 좋았는지를 정리해야 하는 2017년, 올해 나와 함께 해준 것들을 모아 본다. 지금 나는 내년이 좀 불투명하게 느껴지는데 이걸 하고 나면 어느 부분은 좀 투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0. 총평 : "N잡러, 균형 잡힌 삶을 살았나요?"

올해는 홍진아라는 이름과 함께 N잡러라는 별명으로 살았다. 2월에 전에 다니던 조직에서 나와 3월부터 두 개의 낮일과 여러 개의 밤일을 하는 N잡러가 되었다. 덕분에 2016년과 비교했을 때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더 많은 기회들을 얻었다. 여러 번의 인터뷰를 하게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N잡에 대해 얘기할 기회도 얻었고, 이를 통해 만난 사람들도 많지만, 제일 좋았던 기회는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 한꺼번에 두 개의 다른 환경에서 일을 하니 내가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일 뿐만 아니라 나의 성격이나 '해서는 안될 것들'에 대한 기준도 더 뾰족하게 생겼고, 특히 함께 일할 때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과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일을 좋아하고(정확히는 뭐든 할 거면 '일'로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이고 싶어 하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 덕분에 그 일들을 즐겁게 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충전을 제 때 잘 하며 보낸 일 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워크라이프 밸런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중요한 건 삶에 대한 주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인가 아닌가이지 일과 삶을 명확히 나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안 나눠지는 사람도 있거든. 그래서 오히려 '라이프밸런스'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았을까?  


...아니. 일을 많이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를 쓰고 나면 그걸 충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 없이 계속 머리를 돌렸던 한 해였다. 공연이나 전시를 보면서 충전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면서 리프레시를 하기도 하고, 또 낮일과 프로젝트를 번갈아 하면서 균형을 잡기도 했는데, 그게 깨졌다. 특히 하반기에 심했는데, 그래서 소진된다는 느낌을 받으며 낮에 하는 일을 했다. 주로 친구들과 만나서 얘기하거나 방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 충전을 했는데, 함께 해준 친구들 너무 고맙고 최고 사람들이며 좋은 책 써주신 작가분들께 감사한다. 대신 예매를 미리 해야 한다거나 찾아가야 하는 공연과 전시를 많이 못 봐서 아쉽다. 내 영감의 원천인데, 거기서 오는 에너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작년에도 똑같이 했던 것 같은데 내년에는 똑같이 하지 않길 바란다, 나여. 일 년에 서른여섯 편의 공연을 봤던 때도 있었는데 그땐 정말 체력이 좋고, 돈 쓰는데 두려움 따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 뭘까.


아무튼, 숲을 보며 칭찬과 반성을 했으니 이제 각론으로 들어가 본다.  


1. 올해의 떡볶이 : 사이드쇼 차돌 즉떡

떡볶이는 거의 나의 주식이었다. 2012년엔가 떡볶이 발명한 조상을 찾아 위인으로 기리자고 페북에 글을 쓰기도 했었다. 온갖 탄수화물과 매운맛, 단 맛의 조화. 누가 생각한 것이지. 그래서 맛있는 떡볶이를 찾아다니는 것이 즐거움이었는데, 올해는 새로운 떡볶이의 맛을 적극적으로 찾으러 다니지 못했다. 크게 반성할 일이다.

대신, 2016년 올해의 떡볶이였던 사이드쇼에 더 자주 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맛. 친구들 사이에서는 '사이드쇼 어떨까'라고 말하면 얘가 뭔가 허하구나, 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차돌박이를 넣어서 단백질을 조금 먹는다는 위안도 되고, 양념이 정말 맛있다. 넷이 가면 제일 좋은데 떡볶이 3인분에 버터갈릭포테이토를 함께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내년엔 다시 한번 적극적인 떡볶이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다.


2. 올해의 커피 : 카우앤독 아몽떼

아몽떼 맛있어. 라떼처럼 나왔지만 아몽떼다.

사실 맛있는 커피는 많았다. 뉴욕이나 교토에서 마셨던 커피들도 맛있었고, 포비의 플랫화이트, 듁스의 롱블랙도 그랬다. 하지만 카우앤독의 아몽떼만큼 힘을 내게 하지는 못했다.

카우앤독은 진저티프로젝트의 사무실이 있는 코워킹스페이스다. 1층에 카페가 있는데 우유 대신 아몬드브리즈를 넣고 진한 샷을 내려 넣어주는 '아몽떼'라는 메뉴를 판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생애 최장거리 출근(40분 정도... 음?)을 하고 난 내게 정신이 나게 해주면서도 든든한 느낌을 주는 커피. 약간의 떫은맛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샷이 진해서 쓰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내겐 너무 딱이다. 합정과 성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하는 진저티가 내가 출근하는 날 성수동 근무를 결정하면 아몽떼 마실 생각을 하며 행복하게 잤다. 차갑게 마시는 것도, 따뜻하게 마시는 것도 다 좋은데, 특히 눈 오는 날 마시면 너무 최고지.


3. 올해의 별미 : 코블러의 코블러파이

술이랑 같이 먹으라고 하지만 늘 먼저 먹어버려.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던 7월의 토요일 저녁에 들렀던 코블러. 한잔만 마셔도 굉장히 술 마신 기분을 낼 수 있는 경제적인 사람으로서 남들이 두 세잔 마시는 돈을 한 잔에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음?), 그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간 서촌의 위스키바. 여기에 진짜 코블러가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끝까지 하다 보면 갑자기 나타난다. 집 근처의 리슨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클래식한 분위기(바텐더들이 조끼를 입고 있다는 뜻)이고, 한옥이라 운치(맞은편에 여인숙이 있다는 뜻)도 있다. 주문을 하면 복숭아가 들어간 파이를 주는데 따뜻하고 달콤해서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파이만 먹으러 가고 싶을 정도.



4. 올해의 노래 : 태연 'I(아이)'

올해 여름은 '운동과 한강 달리기'로 정리해도 될 정도로 열심히 한강을 뛰었다. 원래 종종 조깅을 하긴 했지만, 올여름처럼 집중적으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한강에 나가 달리기를 한 적은 없었다. 달리기는 꽤 좋은 운동이다. 멘탈관리에도 도움이 되고, 하루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달릴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체력도 좋아지고. 달리기를 할 때 듣는 노래 셋리스트가 있는데 첫곡이 태연의 'I'였다. 도입부에서 태연의 목소리에 맞춰서 상쾌하게 뛰기 시작해서, 클라이맥스에서는 좀 더 빨리 뛰고 싶어 지는 곡. 겨울이라 뛰지 못하고 있는데 이 곡을 들으면 늘 달리던 한강의 여름 풍경이 펼쳐진다. 얼른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달리기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uXPkiJ5cOso

소녀시대에서 노래 말고 딴 거 안하는 유일한 사람. 리스펙트한다.



5. 올해의 10KM : 2017년 9월 10일

두 달 정도 달리기를 열심히 하고, 아디다스 10KM 마라톤에 나갔고, 완주했다. 그러고 보면 달리기가 올여름과 초가을에 내게 준 것이 많았구나 싶다. 달리기를 하면서 30분 단위로 생활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고, 어쩌면 서울 최대의 엔터테인먼트인 단거리 마라톤을 경험해보기도 했으니까. 서울에서 단시간에 볼 수 있는 최대 인파를 봤고, 마라톤 할 때 필요한 옷이나 도구들 안 가지고 온 사람 우리 일행뿐인 것 같은 기분이었으며, 신나게 사진 찍은 후 합정역 7번 출구나 파리바게트로 우르르 들어가는 사람들의 쿨함에 감탄하며, 나는 계속 뛰었다.


최고의 순간은 늘 버스를 타고 지나가던 양화대교 위를 달리던 순간이었다. 차가 다니지 않으면 탁 트인 공간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힘들었고, 또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으며 한강을 혼자 달릴 때보다 외롭지 않았다.


올해 10KM를 한 번 달렸으니 내년엔 두 번 달리는 것이 목표고, 이를 위해 3월부터 다시 달릴 생각이다. 한 번 해봤다고 내년엔 10번 할 것을 계획 세우고 그런 건, 하지 않아.



6. 올해의 책

올해는 책을 많이 읽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책을 아주 바빴던 하반기에 읽었다. 시작했지만 다 읽지 못한 책이 많고, 완독 한 책은 열여섯 권. 평균을 내면 한 달에 한 권 조금 넘게 읽은 건데 내년엔 두 권씩 스물네 권을 완독 하는 것이 목표다. 그래도 작년보다 네 권 더 읽었네.


1) 올해의 소설 : <빛의 호위>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는 순간에 일제히 퍼져 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그리고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 -'빛의 호위'에서


"그때마다 나는, 한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고 망각 속으로 침몰해야 하는 유실물이 세상에 보내오는 마지막 조난신호를 본 것 같은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일종의 상실감이었다." - '사물과의 작별'에서


워낙 소설을 많이 읽어서 소설과 비소설을 나누어 꼽았었는데, 올해는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좋았던, 이 소설집을 읽었던 봄부터 지금까지 '올해의 소설'인 소설집. 조해진이 쓴 아홉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소설의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어떤 사건이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거나 동시대의 지역을 가로질러 만난다는 것. 주인공은 거의 디아스포라인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타자화되어 지워진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태인 학살이나 동백림 사건 같이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와 만나는 지점에서 매번 감탄하고 안심했다. 아홉 편 모두 좋았고, 동생이 '택배 부치면서 좋은 소설 하나만 보내줘'라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 빼곡히 귀를 접은 소설집을 캐나다로 보냈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과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 테드 창의 <당신 인생 이야기>도 좋았다.


2) 올해의 비소설 : <아무튼, 피트니스>

"어떤 동작을 할 때 말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럴 때 먼저 체득한 사람이 시범을 보여준다. 나는 운동을 처음 배우면서 그동안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랬듯 운동에서 사용하는 용어, 영어 단어의 뜻 같은 데에 관심을 모였다. 그리고 책을 읽듯이 배우려 했다. 나도 가르치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설명을 얼마나 조리 있게 하느냐에 더 집중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몸으로 체득한 앎을 존중해야 함을 깨달아갔다."


올해는 재미있는 사회과학 서적들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비소설 분야에서 한 권만 골라야 한다면 류은숙의 <아무튼, 피트니스>를 꼽고 싶다. 일단 책이 재미있고, 감동을 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감동받았다. 나는 에세이 특유의 자기 연민(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류의 나만 받는 느낌이 있다)을 좋아하지 않아서 에세이를 잘 읽지 않는데 이 책은 그런 게 없으면서도 자꾸 곱씹게 하는 감동을 주었다. 50대가 된 인권운동가가 자신을 위해, 그것도 자신의 몸을 위해 처음으로 투자를 하면서 변화하는 삶을 단단한 문장으로 잘 풀어냈다. '(인권) 운동'과 '피트니스(운동)'을 매치시키며 글을 풀어나가는 것도 좋았고, 인권운동가의 눈으로 자신의 선생님인 나이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또 세대 차이나 생각을 차이를 꼰대질 하지 않고 이해하는 모습도 좋았다. 내가 50대가 되어도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기도 하다.


설명하는 것보다 읽는 게 훨씬 좋은 책이라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는데, 이 책을 읽고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꽤 된다. 연말 여행에 가지고 가서 친구 한 명이 다 읽고 남편에게 운동을 선물하겠다고 결심했고, 지금은 또 다른 친구가 읽고 있다. 좋은 걸 소문내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거 좋아하는데 너무 뿌듯한 연말인 것이다.


<IMF 키즈의 생애>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인터뷰이의 다양성이 좀 떨어져서 아쉬웠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친구들과 둘러앉아한 얘기들이 더 의미 있었다(하지만 정말 잘 쓴 책이다). <일하지 않을 권리>를 읽으며 N잡에 대해 정리한 부분이 있고, 선물 받은 <챕터 제로>를 읽으며 내가 하고 있는 기획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기도 했다. 리베카솔닛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도. 이러다 읽은 책 다 쓸 기센데, 생각해보면 좋으니까 끝까지 읽은 거잖아? ...음?



7. 올해의 영화 : 컨택트

올해는 영화도 많이 보지 않았고(흑흑), 영화관에서 본 영화도 많지 않다. 네이버 영화에 올라온 영화를 침대에 누워서 보곤 했지.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좋았던 걸 꼽자면,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


최고의 장면은 루이스가 외계인들에게 지구에 온 이유를 물은 뒤 가까이 다가가 대화하는 장면. 비과 로소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실루엣으로 처리된 루이스의 모습이 헵타포드의 그것과 닮아있던 순간. 난 그 장면에 Arrival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만약 당신이 전생애를 볼 수 있게 된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라는 루이스의 질문과 그의 삶이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굉장히 지적이고 철학적인 영화. 두 번째 봤을 때는 음악이 더 많이 들렸다.


영화 덕분에 테드 창의 소설을 읽게 되었고, 왜 사람들이 SF소설을 좋아하는지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과학이라는 것을 단순히 인간의 삶을 진보시키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규탄한다. 과학은 삶의 가능성을 더 넓게 하고, 상상의 힘을 더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걸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학창 시절의 과학이 좀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했다.



8. 올해의 드라마 : <마녀의 법정>

작년엔 한국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았는데, 올해는 여러 편 봤다. 그 중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 <비밀의 숲>이 기억에 남는다. 만듦새는 <비밀의 숲>이 훨씬 좋았지만, 그래도 <마녀의 법정>을 올해의 드라마로 꼽고 싶다. 여성 검사가 성범죄 관련 수사를 하고, 그 과정을 이렇게까지 밀도있게 그려낸 작품은 이전에 없었던 것 같다. 성범죄는 성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라는 것, 성범죄는 검사와 범인 간의 권력관계도 전복시킬 수 있다는 것, 성범죄 피해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피해 사실을 증명하며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잘 그렸다. 물론 주제의식을 드러내느라 만듦새가 투박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도 드라마와 잘 어울렸다. 우직한 느낌이 있었달까.

정려원이 작품을 잘 고른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번 작품으로 그 얘기를 믿게 되었다. 앞으론 정려원이 나오는 드라마는 일단 보기로. 연기도 잘했다.



9. 올해의 공연 : Dear Evan Hanssen

뉴욕에 갔을 때, 내가 언제 다시 뉴욕에 오겠어(뻥)라는 마음으로 2018년 1월까지 매진이라는 뮤지컬의 암표를 샀다. 그리고 함께 여행하던 가족들과 떨어져 지금 뉴욕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다는 그 뮤지컬을 봤다. 음악이나 무대, 내러티브 모두 좋았는데, 가장 좋았던 건 주인공인 벤 플랫의 존재. 워크숍 공연을 벤 플랫이 함께 했고, 그래서 더욱 캐릭터와 배우가 밀착되는 면이 있었겠지만, 그걸 떠나서도 벤 플랫이라는 배우 자체가 가지는 힘이 있었다. 그가 설득해내는 관객 중 하나가 되어 같이 울었다. 암표의 카드값은 가을이 시작되고 끝났는데, 올 해 내가 한 소비 중 가장 잘한 소비가 되었다. 왜냐면, 벤 플랫이 이제 이 뮤지컬을 안하거든. 데헷.



10. 올해의 시발비용 : 취소가 안 되는 거품목욕

5월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린 밤이 있었고,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거품목욕이 하고 싶었다. 나를 위해 이 정도 투자도 못하나, 라는 생각으로 금요일 저녁에 갈 수 있는 '욕조'와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 잠이 들었다. 모든 스트레스가 그렇듯이 자고 일어나면 조금 완화되는데, 그래서 어쩐지 거품목욕이 필요 없어져버렸다. 취소를 하기 위해 들어가 보니 취소가 되지 않는 조건으로 예약한 것을 발견했고, 그것 때문에 갑자기 또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차 저차 해서 결국엔 넷플릭스 보며 거품목욕을 했고, 덕분에 굉장히 행복했다고 한다. 써도 후회, 안 써도 후회하는 시발비용이라면, 나는 나를 위해 쓰는 2018년이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사실,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기회나 시간은 많아 보이지만 또 그렇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내게 필요한 걸 파악하고, 일을 열심히 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애쓴 나를 돌보는 일에 ‘시발비용’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나는 기꺼이 시발비용을 쓰겠다고.

관련된 얘기로 빠띠 연말 이벤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https://organizer.parti.xyz/posts/17915



11. 올해의 잘한 쇼핑 : 무인양품 잠옷

무인양품 사람

내가 영향을 받게 된 엄마의 철학이 하나 있는데, '자기는 자기가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좋은 거 사주고, 좋은 거 보면서 보살펴야 나중에 자기한테 미안하지 않다고.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도 스스로를 보살피려는 노력을 엄마는 부지런히 했다는 것을 다 크고 나서야 알았다. 입을 때 기분 좋게 옷을 다려 입는다거나,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침대의 침구류를 깨끗하게 관리하고 좀 더 마음에 드는 것으로 구입한다거나, 역시 오랜 시간 입고 있는 잠옷을 좋은 면으로 된 것으로 산다거나. 이 영향으로 나도 잠옷에 집착하는데, 그동안은 이것저것 맘에 드는 걸 입다가 올해는 무인양품 이중거즈면 잠옷으로 안착했다. 두 개를 사서 하나 빨면 다른 거 입고 또 빨고 하는 중. 올해 산 것 중 최고의 단가(제품 가격/사용한 횟수)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의 잘한 쇼핑을 꼽자면 아이헤이트먼데이 의 양말들. 신으면 예뻐서 기분이 좋고(남의 눈에 안보이지만 내 눈에만 보이는 그것) 가격이 아주 비싸지 않아서 하나씩 사모으는 재미가 있었다. 집 근처에 매장이 있는데 12월에는 일주일에 세 번 간 적도 있다. 어, 이건 시발비용 카테고리에 들어가야 되는건가?



12. 올해의 인터뷰 : <일하는 여자들> 인터뷰 with 효진님

올해는 인터뷰를 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좋은 질문이든 나쁜 질문이든 그걸 대답하는 과정에서 정리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의미있었다. 그 중에 제일 즐거웠던 인터뷰는 효진님과 함께 했던 <일하는 여자들> 인터뷰였다. 효진님과의 인터뷰에서는 전에 하지 않았던 얘기들, 페미니스트로서 일하기라든지, 협업에 관한 고민 같은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질문들이 좋았고, 즐거웠다. 나에 대해 이렇게 알고(레퍼런스 체크 안하고 하는 인터뷰도 있었다), 나의 어떤 면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얼마 전 효진님의 책이 나와서 보고 있는데, 서두에 ‘호기심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없는 편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고 써있는 부분이 있어 좀 놀랐다. 인터뷰를 할 때 호기심이 되게 많은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진님을 좋은 인터뷰어로 만든 건 호기심보다는 일에 대한 태도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할 때는 종종 태도가 재능을 대신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재능보다 태도가 더 필요하기도 하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그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려는 노력,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솔직함 같은 것들. 덕분에게 즐겁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일하는 여자'에게서 또 하나 배웠다.


인터뷰는 내년에 책으로 나온다고 한다. 두둥!



13. 올해의 컨퍼런스 : REWORK CONFERENCE 2017

올해 초, 4차 산업혁명 관련 토론회가 있었는데 11명의 연사 중 11명이 모두 남자였다(확인을 위해 다시 찾아보니 사회자까지 총 13명인데 13명이 모두 남자이다. 다시 믿어지지 않는 현실). 4차 산업혁명에 여성은 없는 것인지, 대체 어떤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했고, 한편으로는 절망적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 스스로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남녀 스피커의 비율이 5:5가 아닌 컨퍼런스에는 가지 않는다'가 그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런 예외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갈 수 있는 컨퍼런스는 아주 소수가 되었다.

리웍콘2017은 내가 갈 수 있는 몇 안되는 컨퍼런스 중 하나였다. 스피커로 참여했기 때문에 간 것도 있지만, 기획의 방향이나 준비하는 태도 모두 좋았기 때문에 기쁘게 참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여성들이 많았던 컨퍼런스였다. '노동, 전환, 실험'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있는 청중들이어서 그런지 발표보다 질의응답시간이 더 좋았고, 워크숍을 통해 N잡을 궁금해 하는 분들을 더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의미있었다.


내년에도 나는 계속 프로불편러로 살아갈 예정이다. 성비가 맞지 않는 컨퍼런스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일지 고민하면서.



14. 올해의 발견 : 인내심이 별로 없는 나

작년까지 나의 셀프이미지는 '인내심 있고, 협업을 잘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종의 좋은사람 컴플렉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공부를 좀 했다고 모두와 친구가 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을 할 때 누구에게나 좋은 동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많은 사람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인내심이 많다고 착각했던 것은 일을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왔기 때문이라는 것도, 인내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시간을 타이트하게 쓰면서 일하다보니 쉽게 분노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친구에게 "왜 그걸 혼자만 몰랐지? 회의 시간에 누가 회의랑 상관없는 얘기하거나 이상한 소리하면 얼굴에서 '아 그만하시져'라는 표정이 바로 나왔는데?" 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른다. 그나마 이제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람이 자신을 알면 성격을 고치지는 못해도, 대처를 할 수 있게 되니까,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어울려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좋은사람 컴플렉스에서 빠져나오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좋다.



15. 올해의 나도나도나도 : 범서파

어쩌다보니 여섯명이 모였다. 홍제동에 살거나, 홍제동에서 일하거나, 홍제동 옆(마포구나 은평구...음?)에 살거나 하는 사람들. 그래서 '범서대문파'라고 이름을 짓고 '범서파'라고 줄여서 말하는데, 혹자는 이 세 글자를 잘 외우지 못해 '범서방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꼭 홍제동에서 모이고, 모두 당연하게 생각하는 금요일 저녁 모임이 아니라 주중 저녁에 모이며, 만날 약속은 한 달 전에 잡는다. 그리고 만나면 일단 맛있는 걸 먹는다. 누군가 얘기를 시작하면 '나도나도나도'하게 되는데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다. 한번은 '나도나도나도'하고 싶을 때마다 천원씩 내면 어떻냐는 얘기가 나왔고,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룻밤만에 기부천사가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무도 내지는 않았다.

빡치는 일이 생길 때, 재미있는 짤이 있을 때, 혼자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뭔가 시작하고 싶을 때, 대관령의 눈 소식이 궁금할 때, 홍제동에 대한 기사가 났을 때, 그리고 그냥, 나는 범서파 카톡창을 연다. '나도나도나도'하며 이야기를 들어줄 다섯명의 조직원들이 늘(바로 답변이 오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린 일하는 여자들이기 때무네...*자고 있을 때도 있음) 거기 있기 때문이다.



16. 올해의 일요일 저녁들 : 우아하게 늙자

함께 송해거리를 걸었지

아이슬란드 해적당의 비르기따가 왔을 때,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가 삶을 지탱해주는 나만의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너는 멘토가 있어?"라는 질문을 받았고 "멘토 대신에 친구들이 있어."라고 대답했다.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는데, 그 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들. 비르기따에게 동네친구들을 소개했다. 매주,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일요일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일주일을 얘기하는 친구들 모임이 있고, 거기서 많은 걸 결정하고 또 격려를 받는다고. 무엇보다 웃겨서 함께 있으면 늘 즐겁다고. 비르기따가 보물을 가졌다고 얘기해주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17. 올해의 잘한 일 : ‘외롭지 않은 기획자 학교’

여성들이 스피커가 되어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작년에 <여성의 일, 새로고침>이라는 컨퍼런스가 있었지만 그 컨퍼런스와는 다르게 스피커들과 관객들의 나이를 좀 내리고 싶었고, 스피커와 관객이 좀 더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으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시도해보고 그 다음을 보고싶은 마음도 있었다. '누가 안부르면 내가 만들어서 불러야지'라는 오기 비슷한 마음도 한 몫 했다. 주변에 기획자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을 스피커로 초대하고, 기획자라는 직업을 궁금해하는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을 모았다.


늘 친구로만 만나던 사람들이 스피커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자리에 서 있는 걸 보는 경험이 의미있었다. 원래 좋아했지만 더 좋아하게 되었고, 그냥 일상의 이야기에선 알 수 없었던 그들만의 무기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어 나도 많이 배웠다.

마지막에 회고를 목적으로 참가자들과 함께 <외롭지 않은 기획자 학교>를 다시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내가 보지 못했던 걸 보는 눈들이 모아져 좀 더 근사한 프로그램이 되었다. 여기서도 또 많이 배웠다. 뻔한 말이지만, 일을 하면 그걸 기획하고 해낸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우는 것 같다. 아쉬움이 남지만, 그건 보완해서 내년에 또 하면 되니까...?!


엄청 바빴던 10월의 스케줄을 더 바쁘게 만들었던 기획자 학교. 하지만 내 숨구멍이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해방촌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18. 올해의 우려먹기 : 명함사진

잘 찍은 사진 한 장, 열 프로필 안 부럽다. 인터뷰 기사나 블로그, 발표자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의 명함사진. 사실 N잡러라는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기도 해서 알뜰히 잘 썼던 것 같다.

2017년은 개인의 브랜드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브랜드가 뭘까, N잡러가 내 브랜드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써야하는 걸까, 뭐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1년을 지내며 생각해보니 브랜딩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라는 생각도. 내가 하고 있는 시도나 실험,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직관적으로 던지는데 N잡러라는 브랜드와 저 명함사진이 열 몫은 하지 않았나.

내년엔 더 많은 N잡러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이다가도, 나도 할지 안할지 모르는데라는 마음이 들다가도, 꼭 두 개의 직장을 다녀야 N잡러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올 해가 N잡러라는 브랜드를 만든 해였다면 내년엔 그 브랜드가 가지는 내러티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한해가 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19. 올해의 흥행 :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 설치는 겨울가방들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 시즌1의 마지막 가방. 마지막이어서인지, 가방이 예뻐서인지, 더 많은 여성들이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시간이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잘 팔렸고, 즐겁게 시즌 1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반 동안 11개의 제품을 만들었고, 매번 재미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덕을 본 건 난데, 프로젝트를 하며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말로만 하던 '일상의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고작 가방 만들어 파는 것으로 무슨 정치냐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뻐서 모두가 자주 들고 다닐 수 있는 제품을 기획하는 것, 그것의 수익을 어디에 보내고 그 의미를 구매하는 페미니스트들과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아주 미약한 신호일지라도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 내겐 정치였다. 관심이 있지만 내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라 단절된 채 살았던 정치가 내 삶의 영역에 들어오고, 내 관심과 다시 이어져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경험.


새롭게 시작될 시즌2의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 하지만 2년 반 동안 일하는 여성으로서 느낀 것들을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캠페인과 기획을 하고 싶다. 작가이자 기획자이고, 30대 비혼 여성 둘로 이루어진 페미니즘 프로젝트 그룹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일 중에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제대로 하고 싶다. 그리고 내 일의 영역과 닿는 지점을 찾아 연결해보는 것이 내년의 목표다.



20. 올해의 순간 : 7월의 디모스 모임

엄청 기운이 없던 날이었다. 토요일이었고, 강남까지 가는데 좀 힘들었다. 부대찌개를 먹고, 예약해 둔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다른 곳에 아직 말하지 못한 얘기를 꺼냈다. 누군가에게 하면 웃을까봐, 철 없다고 할까봐 그냥 얼버무리고 마는 그런 이야기들. 이 이야기들은 전염성이 있어서 듣던 사람 안에 있는 비슷한 얘기가 꺼내진다. 사실 나도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어, 같은. 그렇게 여섯시간이 지났고, 기운이 났다.


디모스는 내게 '협업'이 뭔지를 매번 알려주는 프로젝트다. 작년 11월 이전에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한달에 5만원씩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한곳에 쓰기 위해 수많은 얘기들을 한다. 협업에서 중요한 건 서로의 기대수준을 맞추는 것, 그리고 그 기대수준을 확인하려면 많이 듣고 또 끝까지 얘기해야 한다는 것.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지나치지 않는 예민함이 있어야 하고, 그 예민함은 프로젝트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데 써야한다는 것. 제대로 역할을 나누고, 그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감사하는 것까지가 협업에 포함된다는 것도. 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천천히 하는 우리의 대화라는 것도. 규칙만 가지고 돌아가는 프로젝트는 없고, 신뢰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는 11개월 째, 이걸 배우고 있다.



21. 올해의 여행 : 연나페와 함께, 지리산

가까운 곳만 봐서 시야거리가 짧아진 사람이 갑자기 먼 곳을 보면 어지러울 수 있다는 걸, 올 겨울처음 알았다. 연나페 친구들과 차를 타고 지리산에 도착해 멀리 있는 산등성이를 보는데 갑자기 핑 하고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눈이 산등성이에 적응이 된 뒤에, 너무 노트북만 보고 살았던 지난 몇 달간을 정말 깊게 반성했다. 연나페 여행은 여러모로 좋았는데, 아마 이 어지러움이 내게 현실자각을 하게 했던 것 같다. 고민하던 걸 정리하고, 또 어떤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리산이 좋기도 했지만 같이 있었던 친구들 때문에 더 잘 쉬었다. 밥 먹고 자고, 또 일어나서 살살 돌아다니던 48시간. 올 해 가장 밀도있게 쉬고 얘기하고 웃고 또 울기도 했던 시간. 서울에 도착했을 때, 아, 이제 올 해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홍진아어워즈를 할 수 있는 이유도 어쩌면 이 여행 때문이다. 기운이 없어 못 할 뻔 했다구.



22. 대상 : 잘 살아낸 홍진아

나랑 사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다. 실험이라고 시작했는데 망하면 어쩌지 라는 마음과 싸우느라고 고생했고, 잘하고 싶은 마음과 잘 안되는 현실 사이에서 양쪽을 다 달래며 해내느라 또 수고했다. 그런데도 늘 재미있게 해보려 노력한 점, 낙관주의라고 쓰고 합리화라고 읽는 바로 그것을 적절히 발휘하며 나를 설득해낸 점, 싫은 건 싫다고 말하고, 또 좋은 게 있으면 기쁘게 칭찬한 점, 운전면허 갱신을 드디어 하고(운전은 못함), 귀찮은 일들을 꾸역꾸역 해낸 것, 운동을 시작하고 또 한강을 달린 것, 내게 잘해주려고 노력한 것, 많이 웃고 울고 싶을 땐 운 것, 안괜찮은데 괜찮다고 말하지 않은 순간들...지금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들까지도 칭찬한다. 잘했고, 또 내년에도 이렇게, 나답게 잘 살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이제 2017년을 마무리하고, 2018년과도 잘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기대하게 된다. 이렇게 잘 살아낸 홍진아와 잘 지내준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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