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May 08. 2017

재밌는 건 다하려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스페샬홍의 N잡 대모험>을 시작하며

왜 하고 싶은 일들이 있는데
그걸 자꾸 미루며 살고 있어?
       

 ‘왜 하고 싶은 일들이 있는데 그걸 자꾸 미루며 살고 있어?’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 날이 있었다. 아마도 2014년 말이었을 것이다. 이걸 하기엔 너무 늦어서, 또 저걸 하기엔 아직 준비가 안되어서 등등의 핑계를 대며 지금 하고 있는 일만 하는 삶을 계속 해나갈 이유는 없다는 현실 자각 타임이 온 것이다. 이후로 나의 프로필 어디든 ‘재밌는 건 다해요’라는 문구를 좌우명처럼 써놓고, 하고 싶은 일들을 망설이지 않고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2015년 5월, 당인리 네모네모실험실. 폐쇄되는 당인리 발전소 안에서 인터뷰를 하고 글을 썼다. '당인리 드라마쓰기 프로젝트'의 단편희곡 <친절한 세탁소>를 썼다.


 처음엔 퇴근 후에 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여성이나 소수자 이슈를 가지고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단체나 무브먼트를 후원하는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 인터뷰와 희곡쓰기를 통해 개인의 삶을 무대 위로 불러내는 작업이었던 '당인리 드라마쓰기 프로젝트', 이것이 이어져 만들어진 '어쩌다극장'의 뮤지컬 <합정역 7번 출구>. 생각해보니 마감을 정해놓고 마감날 끝난 작품을 들고 와서 낭독회를 했던 <고작>도 그 때 했던 모임이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작업하는 삶을 살았다. 대체 어디서 시간이 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모든 프로젝트를 매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2015년을 보냈다.


2015년 7월, <한국여성의전화> 행사에 유일한 팝업스토어로 참여했던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 오른쪽이 치마사장 윤이나.


이래서 좌우명을
잘 정해야 하는 건가 싶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쓰거나 만드는, 주경야작의 삶을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프로젝트와 생업의 경계가 없는 N잡러의 삶을 살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되어 삶으로 피어났달까. 이래서 좌우명을 잘 정해야 하는 건가 싶다.


'앞으로는 일의 형태가 바뀔텐데, 프리랜서가 아닌 사람이 여러 개의 일을 하면서 팀플레이어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 커리어의 포트폴리오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라는 질문이 2016년 하반기에 내 안에 생겼고, 질문이 생겼으니 답을 찾는 실험을 해보자, 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한 조직에서 주5일을 일하는 것이 아니라 두 조직에 주3일/주2일 출근하고 세 개의 개인 프로젝트를 하는 삶, 궁금한 걸 굳이 직접 실험해 보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냥 다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잖아?


 내가 원해서 시작한 N잡러의 삶이지만, 재미있고 좋을 때만큼 불안하고 초조할 때도 많다. 재미있는 일들을 계속 하다보니 머리가 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피로감도 있고, 프로젝트 간 생각의 경계가 모호해져서 내가 뭘하고 있는지 모른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퇴근을 경계로 생업과 프로젝트가 갈리지도 않고, 생각보다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은 환경. 그러니까, 이전에 알던 감각으로는 인지하기 어려운 세계가 펼쳐졌다.


두 개의 일과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은, 프리랜서가 아닌 팀 플레이어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냥 계약서가 두 개 되고, 명함이 두 개 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내 시간을 내가 컨트롤 해야한다는 건 물론이고, 언제 휴가를 가고(혹은 휴가를 갈 수 있느냐), 4대 보험은 어떻게 처리하며, 마감이 겹칠 때는 어떻게 하느냐(스토리텔링 또는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고 있어서 이런 일이 생기기도 한다)의 자잘하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건 '이전에 내가 어떻게 했더라?'라는 질문을 하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스스로 묻고 답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제가 해보겠습니다.

 

아주 다행히, 두 달을 지나면서 N잡러의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이건 내가 잘 헤쳐나갔다기 보다는 이런 내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기꺼이 실험을 해나가고 있는 두 조직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조직 내 민주적인 소통과 새로운 조직문화에 관심있는 빠띠, 아무도 주5일을 일하지 않으며 조직 내의 학습과 성장에 관심이 있는 진저티프로젝트에서 함께 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들이 있다.


N잡러의 명함컬렉션. 앞뒤로 명함들을 합치고 싶지만, 명함 뒷면들이 좋아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도 나처럼 N잡러로 살고 싶을 수도 있고, 더이상 정규직으로 살 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이 있을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내 기록이 어쩌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휴가나 4대 보험, 넘나들며 일하는 중에 도모해야 하는 스스로의 성장 같은 것들에 대해 지금 고민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딘가에 남으면 누군가의 참조점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시간에 쪼들리면서, 이곳과 저곳의 눈치를 보면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나는 오히려 나의 상황을 함께 고민해주는 팀과 일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잘 선용해야 한다는 모종의 의무감과 압박감(?)도 들었다. 물론, 그냥 내 삶을 한 번 기록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 친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거 왜 사서 하냐고 하지만, 지버릇 개 못준다고 시키지 않은 거 만들어서 하는 게 내 오래된 지병이자 버릇 같은 것 아닌가. 이렇게 좌우명만큼 중요한 게 버릇인가보다.


근속년수로 저의 전문성을
판단할 수 있나요?


퇴사를 결정하고 다음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조언했다. 그동안 재미있는 걸 많이 했으니 이제는 진짜 내 커리어를 진득히 쌓아나갈 조직을 만날 때인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듣고, 조금의 고민 없이 대답했다. "저의 근속년수로 저의 전문성을 판단할 수 없고, 그렇게 판단하는 회사에서는 저도 일하고 싶지 않아요."하고. 생각없이 한 대답이었는데 진심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하지만 가끔 저 때를 생각하면 서늘해 진다. 당당하게 얘기했는데, 실패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가끔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자주 불안하고, 재미는 가끔있다...음?(진심을 말하며 프롤로그가 에필로그가 되어버리...)


호기롭게 시작한 이 실험이 어떻게 끝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끝이 나기는 할런지, 계속 삶이 실험실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성공할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언젠가'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나로 사는 길을 유예하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성공과 실패 여부는 내가 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요구되는 삶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걸 걸 알기 때문에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 시작한 거니까. 이렇게 된 거, 그냥 해보는 거지 뭐.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프롤로그. 앞으로는 거창하지 않고 굉장히 사소하며 개인적인 고민들과 깨달음들을 주절주절 기록해 갈 것이다. 서울에 사는 N잡러들을 만나서 어떻게 일하고 쉬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에 대해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N잡러와 일하면 좋은 이유'에 대한 고백을 강요하고 싶기도 하다. 이 과정이 또 하나의 즐거운 과정이 되길. 언제 쓰일지 모를 에필로그에서 내가 스스로에게 제일 큰 칭찬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스페샬홍의 N잡 대모험을 시작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