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Jun 23. 2017

단상들

요즘 가끔, 때론 자주 하는 생각들

지금 나는 캐나다 상공에 있다. 캐나다에 들어온 지 꽤 되었는데도 아직 토론토에 도착하지 않은 걸 보면 캐나다가 넓긴 넓은 것 같다. 꼬박 열 시간을 날았고, 두 시간이 더 남은 상황. 여름 휴가의 첫 째날은 이렇게 비행기에서 끝난다. 


3월에 N잡을 시작하면서 쓰고 싶은 글들이 많이 생겼다. 정확히는 남기고 싶은 기록이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일주일 동안 일을 위해 쓰는 단어의 양이 너무 많아서 주말이 되어 책상에 앉으면 나를 위한 단어가 남아있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완결성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매번 글을 시작했다가 서랍에 넣어두기를 반복했다. 그런 파편들이 많아지니 처음에 내가 어떤 걸 남기고 싶었는지도 기억 나지 않는다. 왜 인간의 기억력은 이다지도 하찮은가.



내 휴가를 여는, 나를 위한 단어들로 기록하는 단상들. 더 긴 글을 쓰기 위한 메모들.





엑스트라 푸쉬


요즘 일이 많은데, 이유는 두 회사에 다니는 N잡러이기도 하고, 두 회사가 마구 성장하는 시기라 일의 절대적인 양이 많기 때문이다. 부르는 곳이 많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할 일이 많다. N잡러에게 중요한 것은 일과 삶의 경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N개의 일의 경계를 제대로 지어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물론 경계가 뭉그러지는 지점에서 생각이 확장되지만 어디까지나 경계 없음의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그걸 제대로 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못 견디겠거나 싫지 않다. 일을 많이 할 때 조증이 올 때가 있는데, 요즘 가끔 이런 상태가 된다. 일 하고 집에 오면서 아, 이거 더 해야지, 하고 자동으로 생각해 버리는 상태. 머리가 너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 싫지 않은 상태. 이건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만드는 결과물과 스스로의 뭔가가 좀 더 나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힘이 들 때 힘을 좀 더 써보는 경험. 그게 만들어 내는 성과들을 확인하는 시간을 지나는 중. 


무조건 일과 일상의 경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동안의 생각과 일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이건 더 많이 일하는 것이 좋다거나 일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어, 와는 좀 다른 이야기. 내 삶의 완급을 조절하는 주체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경계 안과 밖을 잘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제야 조금 알아가고 있다. 



일들이 뭉그러지는 지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말 그대로. 작년에 현선님이 내 생각이 난다며 공유해 주신 Ted 영상과도 연관이 있는. 진저티프로젝트와 빠띠, 몇 개의 크고 작은 개인 프로젝트를 하다보면 경계가 뭉그러지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다. 


모든 사람들이 N잡을 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모두가 하나의 직업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을 위한 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함께 일하기에 불편한 부분이 있겠지만, 그 불편과 함께 오는 기회들, 생각의 새로운 국면들, 그러니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 있겠구나, 깨닫는 중. 이것에 관해서는 좀 더 긴 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쓰기 전, 메모.


  

A와의 대화 :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삶



N잡을 하고 생긴 변화가 있다면, 내게 일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자신의 고민을 불쑥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아직은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사고와 대화가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는 걸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될거라고 N잡을 시작할 땐 생각도 못했지.


어쨌든, 지금은 직장을 다니지만 3년에서 5년 내로 자기 공간을 만들고 자영업자로 살고 싶어하는 A와 나눈 대화의 주제는 ‘자기 브랜드’였다. A는 N잡을 하려면 자기 브랜드가 있어야 되지 않냐는 질문을 했다. 프리랜서를 하든 N잡을 하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해야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 같다고. 관련해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쨌든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전보다 우리는 더 많은 자기증명서들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 증명서들의 형식이 없다는 것. 


개인들이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내 존재를 다른 사람이 규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 내 고유한 서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설명이 증명이 되어야 할 때, 그리고 나의 언어가 전해지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을 때 생겨나는 것 같다. 각자의 언어를 사회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가 제시한 몇몇 단어들, 몇몇 대단한 것들로 자기를 설명해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걸 우린 알고 있지 않나. 일의 형태가 다양해져 갈 수록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설명해내는 언어들도 많아져야 하는데 아직 통용되는 언어가 한정적인 것 같다. 또 일정 기간엔 통역하고 해석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이 언어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함께 고민해 나가면 좋겠다. 


B와의 대화 : 내게 진짜 중요했던 건 시간에 대한 내 주도권이었다는 것


자신이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중독인지 아니면 좋아서 하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얘기로 B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시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쓸까'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인데 모두에게 중요한 것인 줄 알았던 이 명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는 이야기도. 나 역시도 아침에 토스트기에 식빵을 넣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아침식사를 하면 좋겠군, 같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쓴다. 이건 B와 비슷한 지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점은 버스를 잘못 타서 시간이 낭비되었을 때, B는 초조해지고 나는 대체로 괜찮다는 것. 이 대화를 통해 나는 시간을 쓰는 것에 있어서 '내 선택', '주도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끔, 나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회사와 내 삶의 경계를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지, 왜 주말에 일과 관련된 연락을 받으면 불쾌해 지는 거지, 와 같은 생각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적도 있다. 성실히 일을 잘 하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나의 이런 태도들이 괜히 '불성실한 직원'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까 눈치를 보게 된 적도 있고. 그런데 요즘 일을 하면서, 그리고 B와의 대화에서 이건 '일'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성'이나 '주도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면 자동으로 모드가 바뀌던 그 때에도 모드를 바꿔서 내 일을 했다. 프로젝트를 하고, 공연을 만들고, 동네에 인터뷰를 다녔다. 내가 잘하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 리듬에 맞춰서 하는 일, 그 리듬을 잘 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내겐 큰 이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와 팀을 이루어서 일을 하는 한 온전히 나만의 리듬을 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에 움직이고 또 멈추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나를 좀 더 잘 활용할 수 있고, 또 함께 일하는 누군가에게 나를 조금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르고 안하는 것과 알고 조절해서 덜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나를 점점 더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은데, 대체 언제까지 알아야 하는 것일까 문득 지겨워지기도 한다. 하하하. 


회고와 항해일지

빠띠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다함께 회고를 하고, 일을 하다 얻는 인사이트나 그때그때의 감정들을 '항해일지'라는 이름으로 남겨 공유한다. 회고는 '브레인라이팅'의 형식을 빌려서 구글문서를 열어놓고 함께 쓰고 함께 피드백 한다. 내 생각을 글로 남기고, 또 모두와 공유하고, 이에 대한 피드백도 글로 받는다. 좀 귀찮은 일이기도 하지만 내 N잡 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도구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과 괜한 불안들이 내려간다. 회고와 항해일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쓰고 싶으므로, 일단 메모.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팀원들은 어디에 서 있는지 점검하고 보폭을 맞추려는 노력. 이런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같이' 일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N잡러의 노무는 어떻게?


'언제 쉬세요?' '휴가는 있으세요?' 등등의 질문을 또 종종 받는다. 쉬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므로 최선을 다해 쉬고, 휴가도 지금 가는 중이다...음? 하지만 이 질문들이 진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N잡러들은 어떻게 쉬고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걸까? 


예를 들면 이렇다. 나는 평일 오전, 또는 이른 오후에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한다. 사람이 없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보고 싶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시간대이기 때문. 연차와 정규휴가가 있었던 지금까지는 보고 싶은 전시들을 모아두었다가 휴가를 쓰고 보러 가기도 했다. 나머지 4일을 일하기 때문에 일의 연속성이 많이 흐트러지지는 않았고, 내게 보장된 권리였기 때문에 부담이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N잡을 하고보니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주 3일, 또는 2일을 일하는데 하루를 휴가로 써버리면 구멍이 난다. 물론 나는 이걸 이해해 주지 않는 조직에 있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부담감이 생긴다. 거의 프로젝트 베이스로 진행되는 일이기 때문에 매주 해야 할 일이 딱 정해져 있기도 하고.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인 것 같다. 더 많은 N잡러들과 만나서 얘기도 나눠보고 싶고. 휴가부터 시작해서 보험이나 퇴직금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권리를 쟁취하자, 뭐 이런 차원이라기 보다는 행복한 삶을 위해 시작한 N잡이므로 행복하게 일하기 위한 조건들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만 해도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에서 벗어난 생각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아직은.


글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


언제나 그렇듯 마침표를 찍는 경험은 중요하다. 그 자체로 끝까지 밀고 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기 때문. 우리가 뭔가를 프로페셔널리즘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제 때, 제대로 마침표를 찍는 것을 그렇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끝내야 해. 그래야 그 다음을 시작할 수 있고, 또 다음번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오기 전까지 마감했던 스토리펀딩과 우주당/빠띠에서 썼던 글들이 마침표를 찍는 경험을 하게 했다. 계속 고치고 싶은 부분이 나오지만 어쨌든 손을 떠나기 전까지 힘을 다해 쓰고 이후에 잘 안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알려줬다. 휴가가 끝나고 나서 또 내 단어가 남아있지 않은 하루의 끝이 자주 찾아오겠지만, 그렇게 써버린 단어들 역시 결국 내 단어가 된다는 것을.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잘 쉬고, 기운을 내야지.





비행기에서 다 마무리하지 못한 글을 휴가 중에 틈틈히 쓰고, 한국에 돌아와 시차적응을 하며 마무리 한다. 


이렇게 또 하나의 마침표. 사실 앞으로 계속될 글들의 시작점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재밌는 건 다하려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